캄캄한 바다를 자꾸 구두라고 불렀다 (홍성남 시집)

캄캄한 바다를 자꾸 구두라고 불렀다 (홍성남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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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일상어의 정교한 반전 혹은 ‘존재-함’의 깊이
2021년에 등단한 신예 홍성남 시인의 시집 『캄캄한 바다를 자꾸 구두라고 불렀다』가 시인수첩 시인선 87번째로 출간되었다.
이미 1996년 수필가로 등단, 빼어난 문장과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모국어에 향과 깊이를 더 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삶의 이면을 집중 조명하며 그 속에서 생(生)의 긍정을 이끌어내고 있다. 무엇보다 그 ‘긍정’은 존재-함의 놀라운 방식으로 터져나온다. 적어도 ‘존재’는 단순히 내가 이 땅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활과 실존 속에, 그리고 끊임없이 관계하는 ‘타자-들’과의 소통 속에 파고들어야 하는 적극적인 삶의 태도만이 ‘존재’의 긍정을 보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성남 시를 읽으면 인간다운 온기와 은은함이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를 읽은 독자들도 한결같이 시인의 문장에 깃든 강한 생명력을 느끼는바, 그조차 시인의 시선에 맺힌 울음의 깊이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시로 쓰면서 결코 어려운 문장을 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과장하지 않는다. 대범하게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결코 그것을 퍼즐처럼 분해하여 우리에게 던지는 예술가의 불편한 자의식도 없다. 그는 쉽게 쓴다. 일상의 언어를 벗어나지 않으며 우리가 늘 쉽게 접하는 단어와 친근한 목소리로 자신의 경험을 탁발한다. 아마도 수필가라는 오랜 경력에서 이끌어낸 분투의 흔적일 것이다.
이를테면, 시인은 “감자를 돌려 깎는다/ 지구본을 손안에 넣고 돌리는 것처럼// 지도를 펼치고 감자를 돌려본다// 감자의 중심을 자르면 생장점이/ 미지의 세계로 멀어지기 시작한다// 먼 바다의 풍경이/ 또 하나의 풍경에 얹혀서/ 하얀색이 된다// 아직은 미완성이죠// 감자는 어슷하게 썰고/ 양파는 채를 썬다/ 수프와 푸딩으로, 피자로, 부침으로/ 각각의 이름으로 생겨나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꿈을 꿀 수 있어 //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꿈을 움켜쥐던/ 쪼그라진 감자는/ 이국의 냄새를 품게 되고 // 아무렇게나 떠나보는 겁니다”(「밥은 안 먹지만 브런치는 먹습니다」)라는 문장은 친숙함을 넘어서서 마치 사진을 현상하듯 삶을 고스란히 옮겨온다. “한 손으로 서랍을 열어서는 안 돼요// 밤으로 뭉쳐진 해변이 길어지고 있고요/ 이불깃으로 수없이 끌어 덮은 밤이 있어요// 식물채집처럼 붙잡힌 흘림체의 날들/ 오래된 문장이 건조해져서 바닷물에 흘러가 버릴지 몰라요”(「서랍 속의 날씨」)라는 문장은 또 어떤가. 시인은 문장을 발표시키면서, 그 농익은 삶의 진리를 우리에게 펼치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놀랍게도 ‘존재-함’의 방식과 정교한 대칭을 이룬다. 요컨대, 시에 포착된 그 모든 장면들이 종국에는 ‘존재’라는 철학적 문제를 함의한다는 것이다. “벽은 서로를 꽉 깨물면서도/ 흩어지고 싶고/ 숨어 있기 좋은 방은 아늑해서 불안하다// 날마다 끼워도 어긋나는 조각들/ 더 치밀해져야 어둠이 생긴다”(「레고」), “벌써 물고기를 좋아해요/ 우리라고 하지 않으니까요/ 여기가 아닌 어디라도 라는 말은/ 너무 멀기도 하고, 너무 가깝기도 해서 울음이 섞여 있죠// 그런 저녁처럼/ 지느러미 속에는 유전자의 비밀이 숨어 있죠”(「베이비 박스」) 등의 문장에서 나타나듯, 시인은 일상어를 생활의 언어가 아니라 존재의 언어로 탈바꿈시킨다. 특히, “주목할 것은 홍성남 시인의 시에 나타나는 숱한 부재의 확인은 실제 없음이 아니라 없음의 인식을 통해 나의 있음을 발견하고 확인하려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라는 이승희 시인의 통찰은, 시인이 얼마나 긴 시간을 자신의 내면에서 무작위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갈고 다듬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

홍성남

1996년《한국수필》,2021년《문예바다》,《시와사람》으로등단했다.
2017년제2회책나라군포신인문학상,2019년제13회〈바다문학상〉대상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사과의자리·13
메멘토모리·16
토끼귀나오리주둥이나·18
포자의시간·21
브람스를아세요·24
휘카스움베라타·26
페페·28
코인세탁실·30
끝말잇기·32
화분이있는밤·34
베이비박스·37
레고·40

[2부]
버드스트라이크·45
서랍속의날씨·48
입국심사·50
텀블위드·53
나의왼쪽으로당신의오른쪽이자란다·56
새or사이·58
아보리스트·60
밥은안먹지만브런치는먹습니다·62
전야제·64
부레옥잠·66
의자게임·68
두부그리고편지·70
그러면좋겠다·72

[3부]
카레카레카레·75
소행성·76
아무나는항상의자에앉아있다·78
흐린화요일·80
숲의답신·82
유령어업·84
잃어버린등고선·86
오후세시망고·88
나는나를의심했다·90
어디로든떠나기좋은날이에요·92
뱅갈고무나무·94
모르는도시·96
어떤말에대하여·98

[4부]
새·101
스킨답서스의플랜·102
잠시봄을빌려왔습니다·104
페페는페페·106
공원·110
다른맛을낼수있습니까·112
피트·114
숨은그림찾기·116
퀼트·118
패턴·120
교암해변·123
초판본에갇힌당신을읽는다·126

해설|이승희(시인)
“낯선세계로들어가는입국심사”

출판사 서평

◨다음은시집에관하여시인과나눈짧은인터뷰내용이다.

[Q]주제와이야기의방향은?
[A]주제를염두에두고쓰지않아서특별히주제를말할수없습니다.방향이라면살면서타인과의관계속에서나라는존재를확인하고질문을합니다.삶에대한의미,회의적인것들,여러가지방식으로나를짓누르고채찍질하는것들.죽음이예비되어있는노정에서질문의문을열고들어가면또문이나오고끝없이문을마주합니다.언제쯤이면그문에서나온나와진정한대화를나누게될까요.삶의끝이보이는것같은데나는어디에도없고나없는세계는나없이도잘굴러가는것같습니다.이런질문들이이시집의방향이라면방향입니다.

[Q]이번시집의특징은?
[A]특징이없는게특징이라고해도되겠습니까.무늬없는것도살펴보면무늬가있고무늬있는것도자세히들여다보면무늬를찾을수없듯이.첫시집이라서잘열린과일도세팅이되어있는요리도아니라서부끄럽기만합니다.고슴도치처럼제자식이함함하다고하지않겠습니다.누구에겐가닫힌문을열고들어가조금이라도공감이되었으면합니다.

[Q]나는어떤시인인가?
[A]나는가진것이없고얄팍한시인입니다.아니시인이라기보다시를쓰고싶은사람입니다.그래서시를잘쓰기보다진솔하게쓰려고노력합니다.크고잘생긴나무옆에작은나무도있으니까요.그래서나는작은꿈을꿉니다.어쩌면꿈을꾸는것만으로끝날수도있겠습니다.그래도꿈을꾸렵니다.사는게꿈이니까요.
-「저자와의인터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