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것들만 남은 11층

반짝이는 것들만 남은 1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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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SF-시의 가능성 혹은 ‘디지털의 후예’
2002년 현대시문학으로 등단한 홍숙영 시인이 마침내 언어의 본질로서 길어 올린 시집 『반짝이는 것들만 남은 11층』을 시인수첩시인선 98번으로 발간했다.
시와 소설, 글쓰기 등 장르와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 다방면에 걸쳐 놀라운 작법의 가능성을 보여준 홍숙영 시인은 이 시집을 통해 세계를 직관하고 성찰한 시간을 시대의 화두를 넘나들며 정교하게 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단에 충격파를 던지리라 예상된다. 특히 시집에 깃든 주제 의식은 한 편의 장엄한 유화-이미지와 같은데, ‘AI-시’의 등장으로 시의 본질적 질문이 더욱 첨예하게 부각되는 시점에서 언어와 세계, 시인과 존재에 대한 실존적 가능성까지 이 시집의 원근은 뛰어난 예지력을 발휘하고 있다.
시인의 직관이 첫 번째 포문을 연 시는 「이상한 번역시와 골똘한 착상」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AI-시가 ‘엘리사 효과’ 곧 일종의 착란이라고 쓴다. “빛나는 언어가 별처럼 떠다니는 시인들의 채팅방, 한 시인이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각자 AI의 도움을 받아 시 경연대회를 열자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똑똑한 프로그램을 고른다면 위대한 시인으로 인정받는 거죠 사실 AI가 똑똑한 건 아닙니다 사람들은 엘리사 효과에 속고 있어요.” 그리고 화자를 통해 AI-시를 일종의 ‘이상한 번역시’라고 호명한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다. AI는 ‘시를 쓴다’라는 자기 각성 없이 문장을 만들어 내는바, 다만 기존의 문장들을 학습해 그 배치를 바꿨을 뿐이다. 여기에는 일상이 예술로, 평범함이 숭고함으로 바뀌는 마법은 없다.
그리고 이에 대한 혜안을 제시한다. 그는 영국의 포크 가수로 추앙받는 〈닉 드레이크〉를 소환해서는 예술로서의 시의 본질을 각인한다. 시인은 망설임 없이 노래한다. “조바심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성공이나 사랑, 혹은 면접을 치른 어두운 기다림 속에도 / 하지만 날것의 예술은 느림이 힘이죠 어떠한 모델도 필요 없어요 나는 그 자체로 특별하니까요 따라 할 이유도 없답니다 / 요절한 천재 닉 드레이크는 분홍 달빛에 희망을 걸었다고 합니다 아무도 그의 노래에 관심을 갖지는 않았죠”(「요절한 천재 닉 드레이크는 분홍 달빛에 희망을 걸었다고 합니다」). 닉 드레이크의 ‘분홍 달빛’이란 어쩌면 일상과 예술, 평범함과 숭고함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마법이다.
아울러 홍숙영 시인의 작품이 무척 다채롭다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SF-시라 명명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디지털화된 사회의 거의 모든 면모를 가늠하고 측정하며 작품에 투사한다.
「기억의 숲」을 보자. 특이하게도 시인은 ‘숲’을 실체화하지 않는다. 단지 전쟁과 역병이 창궐했던 행성의 어느 한 지역이라는 것만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숲에서 어떠한 의식이 집행되고 또한 무슨 이유로 화살을 쏴야 하는지 밝히지도 않는다. 기존의 시들이 완벽한 자기-세계 속에서 언어를 산출하고 있었다면, 그는 확정되지 않은 세계 위에 집을 짓는다. 이미 숲은, 생성되는 회로가 아니라, 만들어-진-세계다. 다시 말하자면 디지털-화된 세계라 해도 놀랍지 않다. 그런 숲에 사람이 모여 있고 이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리멤버’라는 주문을 외우고 있다.

숲에는 사이프러스가 고혹의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바깥세상에서 살기 위해 사람들은 술잔을 높이 들고 ‘리멤버’를 외쳤다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은 잊혔고 웃음이 찾아왔다 말하자면 그것은 망각의 주문이었다
-「기억의 숲」 부분

「네고 불가」는 데카르트가 선언했던 인간의 의미-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를 ‘소비’에 맞춰 전환한다. 말하자면 이렇다. “나는 소비하므로 존재한다.” 우선 상품이 소비되기 위해서는 이름과 가격이 부여되어야 한다. 시인은 뭔가 그럴싸하게 융통되는 언어들의, 그 어리숙하고 불편한 한계를 그대로 풀어낸다. 그리고 이름을 더욱 고급스럽게 만들도록 가격을 매기고 “네고 불가”라는 독립선언서를 붙인다. 이것이 예의이며 도덕이고 정언의 명령이다. “서로의 마지막 예의는 건드리지 않기로 해요 /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 당신의 이름을 봉인해 두는 것 / 마치 처음인 듯,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네고 불가」) 말이다.

당신의 이름은 네고 불가
39.9℃의 체온을 가졌습니다

화려한 여러 개의 배지를 단 우리는
2020 홀리데이 미러볼 디스코 텀블러를 사이에 두고
품질 좋은 과거를 거래합니다
-「네고 불가」 부분
저자

홍숙영

이화여대와프랑스파리2대학에서공부했다.2002년《현대시문학》신인상을받으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슬픈기차를타라』,장편소설『아일랜드쌍둥이』가있으며,『창의력이배불린코끼리』,『스토리텔링인간을디자인하다』,『생각의스위치를켜라:창의적인글쓰기프로젝트』등의책을펴냈다.현재한세대학교교수로재직중이다.

목차

시인의말·5
1부|요절한천재닉드레이크의희망
이상한번역시와골똘한착상·15
요절한천재닉드레이크는분홍달빛에
희망을걸었다고합니다·18
거룩한의사·20
기억의숲·22
그때까지자스민,흩어지지말아요·24
그라피티·27
디지털후예들·28
네고불가·30
(인조인간의)반격·32
별을대적하다·34
고래상어,나의헤테로토피아에게·36
푸른이스탄불·38
바르셀로나로가족여행다녀올때까지만·40
플랜B·42

2부|나는당신에게로흐르지않습니다
그럴땐오란다처럼·45
스물다섯번째조각·46
친애하는산호씨·48
아직쓸만한왼쪽이남아있잖아요·50
슬립의내면·52
밤마다신호등이바뀌기를기다리며
날개를굽고있었다·54
흑주술·56
겉은바삭하고속은촉촉한디저트·58
방금우리가완성되었지·60
소문처럼사라진아이들·62
달러에족쇄를채워·64
짙은곁을시치미떼며·65
어디에도길은없었지만·66
Breaking·68

3부|보잘것없는것들이만나가장뜨거워질때
나의산책과당신의묘비명·73
마지막파견·74
반짝이는것들만남은11층·76
바람의소송·78
위험한근육·80
실내의마술사·82
진화하는가족·84
하늘분양·86
명랑한철학을먹는꿈·88
차가운언어로낯선하루가시작되고·90
죄와벌·92
임대문의·94
난파선·95
작심·96
콩벤투두스카푸슈스·98

4부|사랑을나누는건유토피아의성바깥에서
벌어지는일입니다
마고뒷산·103
시인·104
희망의레시피는몰라도·106
부도난달·108
남겨진문장·109
이별은삼키기어려운알약같은말·110
검붉은그녀들·112
밀양역·114
저마다의집·115
4월에내리는눈·116
눈꽃·118
이름없는욕망·120
가장뜨거워질때,별은태어난다·122
외로움의소리·123
석양을보기위해서콘스탄티노플까지
갈필요는없습니다·124
가곡|작곡정지영,작시홍숙영
마음이길을내니·127

부치는글|홍숙영
나의시,나의헤테로토피아·133

출판사 서평

나의시,나의헤테로토피아

떠돌다

정주는나와거리가먼단어입니다.대구에서태어나서울에서다섯살까지살았고,다시대구효목동에서초등학교1학년초반까지살았습니다.지금은이름이사라진마산과삼천포에서도산적이있습니다.수원에서프랑스의이브리쉬르센느,불로뉴,미국의그린빌이라는마을에이르기까지짧게는10개월에서길게는12년까지떠돌아다니는삶이었습니다.그과정에서여러만남과이별이있었고,낯설고도소중한경험이있었습니다.
그래서나의문학도정착하지못하나봅니다.하나의문학장르를제대로하기도벅찬데,소설을쓰고시도씁니다.한때소설에집중하기위해시를쓰지않겠다고마음먹은적이있었습니다.그렇지만,늘시를읽었고,읽다보니다시쓰고싶은마음이들었습니다.사막과코르크수도원과고래상어의이빨사이를마구휘젓고다니는,어디로튈지모르는노마드의시를쓰고싶었습니다.그렇게시같은소설과소설같은시를쓰며,“부유하는”작가의삶을살고싶었습니다.

당신의유영이일으키는파동의질감
정주할수없는마음의바퀴를굴리며
어떤세계를얼마나돌아다녔을까요

플랑크톤으로부유하는나는
당신의집밥이될거예요
3만개의이빨가운데알수없는사이에끼어
당신이라는헤테로토피아에머물수있을까요

별을반으로접어배를만들었습니다.
천천히느릿느릿당신의미세한사이가되어
언젠가우리는우주에도달할겁니다
-홍숙영「고래상어,나의헤테로토피아에게」부분

기억하다

나는사회문제에관심이많습니다.그러나그런문제에즉각적으로반응하기보다는긴시간되짚어보고,한편의시에담고자했습니다.그렇게나만의방식으로오래기억하고싶었습니다.배를만들던이와,통닭을굽던소상공인과,거리와빌딩을청소하는이들을자세히들여다보았습니다.“인플루언서,사진가,패션디자이너,페미니스트,평범한직장인을꿈꾸”다이태원에서마지막을맞이했던“채림,수진,보성,경훈,아파그”를화석처럼남겨두기위해시를썼습니다.

이름도얼굴도죽음도남지않은좁고가파른골목길
램프의정령을불러환하게불을밝혔습니다
파장이일렁이자세계의중심에도균열이생겼어요

그들은눈물을금지하는법을만들었습니다
제주도나피피,어쩌면토두섬에서그림같이살고싶었던,
인플루언서,사진가,패션디자이너,페미니스트,평범한직장인을꿈꾸었던,
채림,수진,보성,경훈,아파그그리고
크고작은숨결들의관문은폐쇄당했습니다
-홍숙영,「그때까지자스민,흩어지지말아요」부분

인쇄소에서일하던“아버지”는“손가락두마디”를일터에바치고,다시일거리를찾아헤맵니다.겨우찾은일거리는고층건물의유리창청소.“난이도있는기술”을선보여야하는위험천만한일자리지만,아무도“눈여겨보지”않고,아무도“주목하지않는”11층에서그는그만삐끗하고맙니다.항상커다란호주머니가달린옷을입고,책을좋아하던그는여전히11층에서반짝이고있을까요?

낮은숨어있기좋은시간,민낯을내밀어도눈여겨보지않는다
별과경쟁하지않아도되니한숨돌릴수있다

반짝이는것들만남아있는11층,유리창에비친당신의두눈동자도
촛불처럼흔들리며빛난다

희붐해지는바깥을닦으면저절로맑아지는안,
지워지고싶다면중력을거슬러벽을타고오르면돼

커다란호주머니에손을감추고다니던아버지는인쇄소사장이도망갔다고울상을지었다
손가락두마디를바친일터가사라지자우리의먹을거리도동이났다
뒤적여도잡히지않는허공의새를향해

총을겨누거나붕어빵을구우려면민첩한손놀림이필요해
풍경을옮기기위해서도손가락의도움이있어야하는데
점점작아지는아버지의창,닳아지는끝

아버지가책장을넘길때마다몸속에서늘한돌이굴러다녔고
핏발서린언어들이소란을부렸다,이윽고

난이도있는기술을선보여야했다.
아무도주목하지않는무대에잠시바람이스쳤고그순간신이우리곁을지나갔을지도모르지

꼭꼭숨지않아도투명해지는11층,
보이지않게서서히탯줄을풀자쑥부쟁이처럼자라나는손가락두마디

선명해지는낮이뭉툭한끝을갈아낸다
-「반짝이는것들만남은11층」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