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문에 대한 예의 (김제숙 시집)

예문에 대한 예의 (김제숙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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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저 찬란한 안간힘” 낮은 자리에서 길어 올린 정형의 언어
시인수첩 시인선 108번째 시집으로 김제숙 시인의 세 번째 시조집 『예문에 대한 예의』가 출간되었다. 생활의 낮은 자리를 오래 응시해 온 시인은 이 시집에서 시조라는 정형(定型)의 옛 형식에 현대의 감각을 얹어놓는다. “말[言]들이 / 저마다의 / 생을 / 살고 / 돌아오고 있다 / 그 말들을 / 받아적는다” 라는 「시인의 말」에서 짧고 정확하게 이 시집의 출발점을 밝힌다. 말은 시인이 짓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것이며, 시인은 그것을 받아 적는 사람이다. 받아 적는 일이 시 쓰기라면, 시조의 정형은 그 받아쓰기의 격식이다. 시집 5부의 시편 「받아쓰기」에서 시인이 “저물녘 / 참 잘했어요 / 호명 한번 받고 싶네”라고 쓸 때, 그 바람은 시인이 자신의 시 쓰기를 어떤 높이에 두고 있는지를 증언한다.

전 5부 65편으로 구성된 이 시조집은 생활의 사물에서 사회적 현실로, 몸의 감각에서 시론(詩論)으로 나아가는 다섯 개의 지층을 이룬다. 1부 “내 생의 숱한 의문들 어디쯤 묻혀 있나”는 나물, 맨드라미, 무궁화호, 바이올렛, 고무신 같은 낮고 구체적인 사물들이 배치된 자리다. 이 사물들은 시인이 아름답다고 선언해서 빛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이 오래 들여다봄으로써 스스로 의미를 열어 보이는 존재들이다. 시집 제목 『예문에 대한 예의』는 작은 예문을 정성껏 읽어야 큰 본문이 열린다는 주제로 이것은 시론이면서 동시에 응시의 윤리다.

2부 “수만의 언어보다도 더 뜨거운 행간을 읽는다”는 이 시집의 사회적 발언이 집중된 자리다. 채굴 광산 매몰 사고를 배경으로 한 「그믐에서 보름 사이」, 도시 개발의 그늘에 잠긴 공동체의 기억을 다룬 「용의 행방」 그리고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 유최안 씨의 투쟁에서 길어 올린 「동지여, 동지여」 는 “한 그릇 따신 밥 어깨 기댈 작은 방"의 소박하고 당연한 것을 탐했다는 이유로 일 미터의 철골 안에 자신을 가두어야 했던 인간의 현실이 5수의 시조 안에 압축된다.

3부 “비로소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묻는다”라는 몸의 언어로 쓴 부다. 늑간통 오십견, 손을 포개는 일, 백자 달항아리의 둥근 어머니 가슴 통증과 체온이 시의 언어가 된다. 4부 「왔던 길 돌아가는 지금 낯익은 길 환하다」는 중년을 지나 저물녘에 이른 한 생애의 풍경이다. 조각보처럼 잇대어진 시간이 “왔던 곳 돌아가는 지금 낯익은 길 환하다”라는 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을 그린다.

5부가 시 쓰기를 주제로 한 시편들이 모인 자리라면 이 시집에서 가장 압축적인 성취를 보이는 「끙」이 여기에 놓인다. “온몸을 바닥으로 내려놓는 소리/ 온몸을 바닥에서 일으키는 소리/ 한 생애 비밀 병기였다 / 저 찬란한 / 안간힘”(「끙」) 의성어 하나로 한 생애의 무게를 들어 올린다. “끙”은 내려앉는 소리이면서 동시에 일어서는 소리다. 그 두 방향이 동일한 음절 안에 공존한다는 사실이 이 시의 전부다. 시인은 한 문장을 다섯 행으로 나눠 각 행 사이에 깊은 여백을 연다. “저 찬란한 / 안간힘” 두 행으로 분리된 이 종결에서 ‘찬란함’과 ‘안간힘’은 충돌하며 섬광처럼 의미를 이룬다.

시집 『예문에 대한 예의』가 일관되게 밀어붙이는 것은 초월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이 시집은 높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그 높이가 시작되는 곳을 아래로 바꾼다. 나물을 데치는 손끝, 잎 속에 숨은 봉오리, 고무신 안에 뿌리내린 풀꽃,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는 소리. 김제숙의 시에서 초월은 언제나 이 낮고 작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것이 이 시집의 시학을 가로지르는 내재적 초월이다.

문학평론가 황정산은 해설 「현실을 건너는 정형의 힘」에서 “정형은 오래된 형식이지만, 그 안에 담기는 삶은 늘 새롭다”라고 쓴다. 김제숙의 시조에서 정형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실을 건너는 힘이며, 흩어진 삶을 붙들어 세우는 언어의 뼈대”라는 것이다. 이어 맺음말 5장에 “나물 한 줌, 꽃 한 송이” 그리고 “노동자의 등”과 “손주의 탄생, 늙어가는 말들 앞에서 시인은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그는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다독이고, 행과 연의 질서 속에 앉힌다. 그 과정에서 낮은 것들은 존엄을 얻고, 사소한 것들은 의미를 얻으며, 상처 입은 것들은 다시 피어난다.” 이와 같이 예문을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만이 읽어낼 수 있는 본문, 그 본문을 이 시집은 가만히 열어 보인다.
저자

김제숙

목차

시인의말·5

1부|내생의숱한의문들어디쯤묻혀있나
나물을무치며·15
행복·16
미치지않을자유·17
함정·18
툰드라의꿈- 하당에르 고원·19
무궁화호·20
늦게라도오는것·21
회복·22
길항·23
11월의맨드라미·24
다도해·25
저녁의말[言]·26
예문에대한예의·28

2부|수만의언어보다도더뜨거운행간을읽는다
그믐에서보름사이·31
동지여,동지여·32
공존의방식·34
용의행방·35
로켓배송·36
전면통제중에도·37
시의온도·38
위대한유산·39
고독한인텔리겐차- 월북작가 박승극·40
개망초꽃·42
후회·43
배꼽·44
결핍·46

3부|비로소나의안부를나에게묻는다
손을얹는일·49
늑간통을읽는방법·50
백자달항아리·52
숨은꽃·53
칼바도스의어둠- 레마르크 『개선문』을 다시 읽으며·54
속수무책·56
평화·57
또다시봄·58
사랑도이런사랑·59
동락(同樂)·60
사루비아·61
보름달·62
받아쓰기·63

4부|왔던길돌아가는지금낯익은길환하다
차선의미덕·67
즐거운본능·68
빅뱅체험·69
역설·70
월척에의꿈·71
오래된착각·72
랜덤낚시질·74
종전(終戰)으로가는길·75
확인·76
리셋(reset)하다·77
오십견·78
아보하·79
조각보·80

5부|잊혀진노래를찾아서가만히불러줄까
감염- 詩作·83
청매,오다·84
맹목의출처·86
시쓰는책상·87
시인본색·88
배롱나무·89
숨은행복찾기·90
종말의날·91
11월의숲·92
신화(神話)·93
끙·94
시인의일·95
시집·96

해설|황정산(시인·문학평론가)
현실을건너는정형의힘·97
-김제숙시조의내재적초월과현대시조의가능성

출판사 서평

◨시집해설들여다보기

1.들어가며:정형의기억과현대시조의새로운가능성

시조는우리의오래된정형시형식이다.정형이라는말속에는일정한음수율과장구성,율격적질서만들어있지않다.거기에는세계를바라보는하나의태도,삶을받아들이는정신적자세,무질서한현실을일정한언어의틀속에서다스리고자하는미학적의지가함께들어있다.전통시조가오랜시간동안유지해온힘은바로이지점에있다.그것은감정을무작정풀어놓는양식과는거리가먼,감정을절제하고,흩어진생각과정서를압축하며,삶의균열을언어의질서안으로끌어들이는양식이었다.
전통시조의세계에는대체로조화와균형에대한믿음이깔려있다.자연과인간,개인과세계,감정과이념이하나의질서안에서만날수있다는믿음이다.물론모든시조가평온하고안정된세계만을노래한것은아니다.사대부시조에는정치적좌절과유배생활의어려움이있고,사설시조에는욕망과생활의거친활력이있으며,기녀시조에는사랑과이별의애절한감정이있다.그러나그다양한변주속에서도시조는대체로마지막순간에어떤수렴의형식을지향한다.종장의전환과마무리는감정의소용돌이를하나의깨달음,탄식,해학,결의로거두어들이는역할을한다.시조의정형은바로이수렴의힘을통해삶의무질서를견디는형식이라할수있다.
그러나현대의삶은전통시조가기대했던조화로운세계상과상응하지않는다.현대인은자연과더불어살아가는존재라기보다도시와자본,노동과기술,소외와경쟁의장속에놓인존재다.삶의속도는빨라졌고,공동체의감각은약화되었으며,재난과참사와사회적불평등은일상의삶에깊이들어와있다.이런현실앞에서시조가여전히유효한가하는질문은피할수없다.정형은오늘의복잡한현실을감당할수있는가?오래된율격은현대인의불안과상처,사회적고통과몸의감각을담아낼수있는가?현대시조의한계와가능성은바로이질문에대한응답속에놓여있다.
김제숙의이번시조집『예문에대한예의』는이질문에대해매우설득력있는답을보여준다.그의시조는전통시조의정형성을의식하면서도그것을박제된형식으로보존하지않는다.김제숙은시조의절제와압축그리고배경과사물에대한간결한묘사의힘을받아들이되,그안에오늘의구체적현실을끌어들인다.그의시에는나물,맨드라미,바이올렛,보름달,고무신같은생활사물들이등장한다.동시에봉화광산매몰사고,대우조선하청노동자의투쟁,복개된도시의개천,실향민의상처같은사회적현실도들어온다.이처럼작고낮은사물과크고아픈현실이한권의시조집안에서함께그려져있다.(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