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중생활, 사라 베르나르의 회고록

나의 이중생활, 사라 베르나르의 회고록

$35.00
Description
벨에포크(Belle Epoque) 시대 프랑스 문화의 아이콘이었던 사라 베르나르를 통해서 우리는 그 시대의 문화적 감수성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빅토르 위고의 ‘마지막 사랑’이었고 장 콕토에게는 ‘신성한 괴물’이었다. 오대륙을 누비며 활동한 그녀는 당대 최고의 뮤즈로 마르셀 프루스트를 비롯해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우리시대에도 줄리언 반스가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에서 사라 베르나르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전개한다.

1844년 10월 22일, 파리에서 태어난 그녀의 어머니는 네덜란드-유대계의 고급창부였다. 그녀가 살아 있었을 때 아버지가 누군지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 정작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사라 베르나르는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 등장했다. 1860년대부터 대중은 자신들의 우상이 찍힌 사진을 신문가판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세밀한 일상을 신문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사라 베르나르의 하루가 공개되었고 대중은 열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경제와 사회면보다는 가십에 사람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그 주인공인 사라 베르나르라면 더욱 그랬다. 일간 신문은 187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연극이 엔터테인먼트의 주요 형태였기 때문에 연극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연극배우가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것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당시 기록을 찾아보면 연간 1,200만 명의 사람들이 런던이나 파리, 뉴욕의 극장을 찾았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일주일에 서너 번은 연극 무대를 관람했다.

오늘날 유명스타들이 전세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순회공연했듯이 사라 베르나르는 증기기관선을 타고 한 달 보름 만에 프랑스에서 미국까지 갈 수 있었다. 그녀가 생애 다섯 번이나 미국과 프랑스를 오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당시에 새로 발명된 증기기관선의 도움이었다. 또한 1860년대에 이미 철도는 미국 곳곳에 뻗어나가 있었고 사라 베르나르는 기차를 타고 시카고와 뉴욕 그리고 필라델피아 등의 대도시에서 공연했다. 루이빌이나 멤피스 같은 지방 소도시까지 투어목록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은 촘촘하게 연결된 미국의 철도 네크워크에 힘입었다.

20세기는 에드몽 로스탕의 신작(L'Aiglon)으로 시작되었다. 이 작품은 1900년 3월 15일에 초연되어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타이틀롤로 250회 공연했고 그 후에도 미국 투어를 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도 이 작품을 공연했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1900년에 그녀는 햄릿 역을 맡아서 영화(Le Duel d'Hamlet)를 촬영했다. 1906년에 그녀는 당시 연인(Lou Tellegen)과 함께 아르망 뒤발 역을 맡아 또다른 영화(La Dame aux Camélias)를 촬영했다. 또한 루이 메르캉통이 감독한 영화(Elisabeth, reine d'Anglaterre)와 1913년에는 트리스탄 베르나르 감독의 잔느 도레(Jeanne Doré)를 촬영했다. 이 영화는 사라 베르나르 최고의 영화로 평가된다.

1905년 남미 투어 중 토스카의 마지막 장면인, 난간에서 뛰어내리다가 오른쪽 무릎을 다쳤다. 1915년에는 이 부분이 썩어들어가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1916년에 마지막 미국 투어를 시작했고, 1년 6개월 동안 순회공연했다. 1918년 11월 그녀는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곧 유럽 투어를 떠났고, 앉아서도 연기할 수 있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다 극작가 기트리의 새로운 작품인 〈소설을 위한 주제〉의 드레스 리허설 도중 그녀가 쓰러졌지만, 서서히 회복됐다. 1923년 3월 26일 파리의 자신의 집에서 아들의 품에 안겨 사망했다. 사인은 신부전으로 인한 요독증. 장례식에는 15만 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었고 시신은 파리의 페르 라세즈에 묻혔다.
저자

사라베르나르

SarahBernhardt
사라베르나르(1844년10월23일~1923년3월26일)는벨에포크시대최고의인기를끌었던프랑스의연극배우이다.1870년대부터유럽무대에서명성을쌓았다.유럽과미국에서19세기의가장유명한여자배우로평가되었다.그녀는아르누보의화신으로군림했으며빅토르위고를비롯한많은작가들에게영감을주었다.알폰스무하도사라베르나르의포스터를그리면서주목받을수있었다.

목차


차례

1.어린시절9
2.기숙학교에서17
3.수녀원생활33
4.새로운시작51
5.새로운시련67
6.나의첫극장방문79
7.첫번째수업99
8.음악원시험107
9.콩쿠르의날121
10.코메디프랑세즈에서의첫만남147
11.몰리에르의집에서의데뷔165
12.스페인여행181
13.마르탱극장에서오데옹까지201
14.튈르리에서229
15.보불전쟁255
16.오데옹극장에서:사라베르나르의구급차269
17.파리포격289
18.대담한여정319
19.파리로의귀환359
20.빅토르위고377
21.기억에남는만찬385
22.다시코메디프랑세즈에서409
23.페드르로서의첫등장435
24.알렉상드르뒤마457
25.‘에르나니’,풍선여행471
26.코메디프랑세즈가런던으로갑니다491
27.게이어티극장에서의첫공연515
28.런던에서의공연525
29.다시코메디프랑세즈553
30.첫번째미국여행을위한준비561
31.덴마크여행579
32.르아브르에서뉴욕으로597
33.뉴욕도착613
34.보스턴에서645
35.몬트리올의그랜드리셉션657
36.스프링필드/볼티모어/필라델피아/시카고673
37.뉴올리언스,나이아가라폭포방문701
38.프랑스로의귀환,르아브르에서의환영735

출판사 서평

회고록출판

1907년사라베르나르가회고록을파리에서출판했을때연극배우로서그명성은절정에달했다.이회고록은사실1898년에쓰여진것이다.그녀의유년시절부터사십대중반의나이로1881년첫미국여행을마치고프랑스의르아브르항구로돌아오면서끝난다.원래그녀는회고록으로두권으로생각했다.물론두번째권은쓰여지지않았다.이책을출판하고도그녀는42년을더살았다.

사라베르나르가회고록을쓴여러가지이유중하나는신문같은왜곡된매체가아닌자신이직접대중을향해이야기하고싶었기때문이다.따라서회고록에는그동안자신에게너무했다고생각한신문기사나공연평을재수록하고조목조목반박한다.

회고록은전체적으로매우생동감있게쓰여져있는데보불전쟁과같은역사적사건에자신의이야기를녹여놓고,100년후에도명성을유지할사람들과자신을연결함으로써독자의관심을사로잡는다.특히작가빅토르위고와의관계를강조했는데,그의진가를알았기때문이다.물론이모든것은빅토르위고가그녀의연극에감동해서눈물을흘렸고이눈물모양의다이아몬드를사라베르나르에게선물했기에가능했다.

연극배우로서사라베르나르는전무후무한인기를누렸는데한시대의문화적아이콘으로군림했다.사회적존재로서그녀는드레퓌스사건에서에밀졸라를지지했고,페미니스트이자무정부주의자인루이즈미셸을변호했으며사형제도에맞서싸웠다.당대최고의여배우로서쉽지않은선택이었지만그녀는자신이믿는가치를실천하는데주저하지않았다.

알폰스무하와의인연

성스테판의날(12월26일)에무하는르메르시에인쇄소에서친구의일을돕고있었다.그때사라베르나르의지스몬다포스터를제작해야하는상황이벌어졌다.당시르메르시에의직원들은크리스마스휴가중이었기때문에무하가이기회를놓치지않았다.이포스터는1895년1월1일아침파리전역에게시되었다.길고좁은모양,은은한파스텔색상,실물크기에가까운인물의고요함은위엄과절제의느낌을주었다.포스터는어마어마한성공을거두었고이후사라베르나르의포스터는알폰스무하가도맡아작업했다.

사라베르나르에대한찬사

“여성연기자에는다섯종류가있는데나쁜여배우,좋은여배우,더좋은여배우,위대한여배우그리고사라베르나르가있다.”마크트웨인(MarkTwain)

“가장존경했던세여성은사라베르나르,릴리랭트리,빅토리아여왕이다.나는그들중누구와도기꺼이결혼했을것이다.”오스카와일드(OscarWilde)

“사라베르나르는이상적인삶의비전이다.그녀는살아있는전설이다.”아나톨프랑스(AnatoleFrance)

“오,야생동물,아름다운표범의매혹과분노에찬가젤,상처를입은채흐느끼는사슴처럼한숨을쉬는그녀를보고듣는것은…사라베르나르의연기에는이모든것들이녹아들어가있다...”디.에이치로렌스(D.HLaw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