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기억》
“어른이된다는것,누구의침묵으로가능한가”
1.빛이잔혹한섬에서시작되는‘첫기억’
여름끝의섬은유난히밝다.그러나그밝음이야말로잔혹하다.낮잠(시에스타)시간의고요,반들거리는담장,골목을가르는발소리,이모든것이낯익은평화의표정으로다가오는순간,우리는곧알아차린다.전쟁은멀리에있고,폭력은가까이에있다는사실을.아나마리아마투테의《첫기억》(Primeramemoria,1959)은그보이지않는폭력의공기속으로독자를데려간다.
이소설은마요르카로암시되는지중해의한섬을배경으로,열네살소녀마티아의시선에서한여름의몇주를기록한다.어머니는이미세상을떠났고,아버지는‘어딘가’에나가있다.소녀는권위적이고차가운외할머니의집에들어와규율과체면의언어로움직이는어른세계에둘러싸인다.사촌보르하는비상한재치와잔혹이한몸인소년이고,소작인의아들마누엘은어쩌다소녀와마주앉으면몇마디말로세계의균열을드러내는아이이다.섬은작은도시의모형,그안의큰집은낡은권위의거처다.아이들은이곳에서어른들의세계에관해너무많은것을‘알게될’운명이다.펭귄모던클래식스는이작품을“억압적더위속반항하는사춘기의서사”라요약한다.
2.이소설이겨냥하는전쟁-‘멀리있으나가까운’스페인내전(1936-1939)
《첫기억》의시간은1936년여름이후,스페인내전이막시작된즈음이다.공화국정부(공화파,Republicanos)와군부반란을중심으로한국가주의세력(국민파,Nacionales)이맞섰고,후자는파시스트팔랑헤,군주주의·보수주의세력과결합해독일·이탈리아의지원을받았다.전쟁은1939년국민파승리로끝났고,프란시스코프랑코의독재가1975년까지이어졌다.
섬의지정학도중요하다.마요르카는내전발발직후국민파가장악했고,1936년8~9월공화파의상륙(소위‘마요르카상륙작전’)이실패로돌아간뒤로섬은국민파의거점이된다.‘전쟁은본토에서벌어졌지만,섬은보이지않는억압과자경의공포가일상으로스며드는공간’이된다.이섬의공기-신문과라디오로만들려오는전황,그러나골목마다울리는군화소리-가소설의정조를이룬다.위키백과
마투테는이‘멀리있으나가까운’전쟁을섬의생활감으로번역한다.대로의포화대신가족ㆍ마을ㆍ학교에얽힌미시권력,계급적거리두기,‘우리편/저쪽’의말버릇,언제든누군가를밀어낼수있는분위기가아이들의놀이와의식에스며든다.스페인내전·프랑코체제의검열과폭력은그의세계인식전체를규정했고,마투테문학의핵심주제-아이ㆍ사춘기의상실,배반,고립-는이시대사의반영으로읽힌다.
3.초반부인물과무대-스포일러없이문턱을넘어가도록
마티아는어머니의부재,아버지의부재,두겹의빈자리를안고큰집으로들어온다.외할머니가통치하는이집에는,아름다움과비밀을함께지닌이모에밀리아,집안일을도맡은안토니아,아이들을건사하며우스꽝스럽게‘치노(Chino)’라불리는안토니아의아들라우로가산다.보르하는사촌이자마티아의그림자같은존재로,교묘한장난과조롱으로섬의권력언어를‘연습’한다.소작인의아들마누엘은가난과오해의상징같으며,그존재자체로아이들의세계질서를어긋나게한다.작품은여름방학처럼보이는몇주동안,섬의끝과마을의광장,큰집의식탁과방,바닷가와바위언덕을오가며“아이의언어가어른의언어로변하는순간”을잡아낸다.
초반부의긴장은대체로사소한발견에서시작된다.누군가의편지,거짓말처럼들리는소문,어른들의은밀한신호들.마티아는알고싶지않다고다짐하지만,알게되는순간이뒤늦게도착한다.그때마주치는것은‘거짓말의기술’이아니라,침묵의책임이다.작중의상징물이를테면아이가품고다니는작은인형같은-은유년의마지막부적으로등장하지만,그부적조차현실의빛속에서금세낡는다.이서늘한열림이곧《첫기억》의문턱이다.
4.문체와형식-한소녀의호흡으로,두개의시간층을엮다
마투테의서술은일관되게1인칭이지만,그안에는두개의시간이공존한다.‘그때’의감각으로휘몰아치듯서술하다가,괄호·줄표·겹화살괄호(≪≫)같은장치로‘지금’의성찰이비집고들어온다.그래서독자는종종하나의문장안에서‘아직모르는나’와‘알아버린나’를동시에듣는다.이형식은읽기의호흡을소녀의심장박동에맞춘다.의식의흐름이섬의열기와엮이며,독자는문장사이에숨어있는권력의미세한손짓-조롱,무시,방관,순응-을감각적으로포착한다.
5.역사적층위-프랑코체제,검열,그리고은유의정치학
《첫기억》은1959년,프랑코독재의초중반에나왔다.소설가였던마투테는같은시기에검열의직격탄을여러번맞았다.이를테면초기장편〈반딧불이들〉(Luciernagas)은검열로불허되어1955년〈이땅에서〉(Enestatierra)라는제목으로수정되고전면개편되어나와야했다.전후스페인문학의검열양상과그영향은다양한연구·논문으로상세히복원되어있으며,‘은유와기호화’가당시작가들의공통전략이었음이반복적으로지적된다.마투테의산문이신화·동화·환상의뉘앙스를품는이유도바로이시대적맥락과무관하지않다.저자는대놓고말할수없었던것을,섬의역사적상흔과일상의편견으로우회해드러낸셈이다.이런의미에서《첫기억》은성장소설이자기억정치의교과서이다.
6.문학사적위치-삼부작‘상인들’의문이열리는지점
《첫기억》은마투테의‘상인들’(Losmercaderes)삼부작의첫권으로,뒤이어《병사들은밤에운다》(1964),《함정》(1969)으로이어진다.1959년나달상(PremioNadal)수상과더불어,이후반세기넘게스페인전후문학의대표성장소설로읽혀왔다.이삼부작의핵심은‘아이들이어른이되는방식’과‘계급,성,이념의균열’이한개인의양심을어떻게바꾸는가에대한탐구이다.
한편작가의위상자체는의심의여지가없다.마투테는1996년스페인왕립한림원(RAE)회원으로선출되어1998년공식입회했고,2010년세르반테스상(스페인어권최고문학상)을받았다.그녀의문학적유산은2025년탄생100주년에맞춰스페인각지의전시·특별판출간으로다시확장되고있다.
7.한국독자를향한해설-리스트가아닌,하나의이야기로
가정,학교,군대,회사,온라인커뮤니티-형식은달라도‘우리/저쪽’을가르는언어는비슷하다.사실과진실사이,소문과인격사이,안전과양심사이에서인간은늘때를놓치고,그때마다침묵이한사람의삶을기울게만든다.《첫기억》은그고백을한소녀의문장으로들려준다.그래서이소설은1930년대스페인의이야기를넘어,오늘한국의시민적감수성을다듬는훈련이된다.
도시의클래스감각은섬의계급질서와닮아있다.큰집의식탁매너,골목의눈빛,누구는총을들고누구는의심을산다는비공식계급도가일상을재단한다.우리는오늘도지역·학력·직업·젠더·혐오의언어가눈에보이지않는장벽을세우는광경을본다.마투테는그장벽위에앉은아이들의여름을보여준다.비극은거대한사건에서만오지않는다.종이에적은두어줄의문장,나오지않은한마디가누군가의미래를바꾸는힘을갖는다.소설은“그한마디를말하지못한자의죄책”을다루되,독자를설교하지않는다.문장의온기로만설득한다.
또한《첫기억》을읽는일은한국어의가능성을확인하는일이다.마투테의문장은시와호흡으로전진한다.번역자는빠른사건요약대신,밀도높은감각어로문장을깎는다.섬의열기,햇빛의각도,모래와물의온도,식탁의질감,귓속에서울리는부끄러움의소리까지한국어로옮겨졌을때,독자는문장만으로도윤리적결정을앞둔마음의떨림을체감한다.그것은교양의뻔한교훈이아니라,감각의훈련이다.
마지막으로,이작품은기억을어디에저장할것인가라는질문을던진다.우리의현대사는여전히기억의정치를통과중이다.기념과망각,기려야할이름과가려진이름.《첫기억》은거대한기념비대신,아이의여름을선택한다.아이의부끄러움·침묵·두려움을정면으로응시하는이소설은‘거대한서사’가아닌관계의서사로민주주의의습관을가르친다.장면이켜켜이쌓이고,독자는어느새‘나는무엇을침묵했는가’라는질문앞에선다.설득은그자리에서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