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기억은 산호색이다 - 시인의일요일시집 15

당신의 기억은 산호색이다 - 시인의일요일시집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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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잡히지 않는 유년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환상’과 ‘꿈’으로 詩가 된다
수년 전 2000년대 후반 이후에 등장한 ‘포스트 미래파’ 시인을 호명하는 자리에서 조강석 평론가(연세대 국문과)는 이근일 시인에 대해 “거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술의 힘이 있고, 이미지도 거침없이 구사한다”고 상찬한 바 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이광호, 신진숙 등 당대의 평론가들이 모여 “언어적 모험을 하는 시인들, 시의 주제를 새롭게 확장시키고 있는 시인들, 시와 문학의 새로운 개념과 기능을 창출하려는 시인들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좌담 자리였다.

어느 때보다도 많은 시인과 시집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문학 시장과 저널리즘에서 그 영역은 왜소해졌고, 누구나 시를 쓰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시대에서, 우리 시단을 이끌어갈 새로운 동력으로 주목받은 이근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당신의 기억은 산호색이다』가 출간되었다.
200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근일 시인은 첫 시집에서 ‘둥근 꿈과 허방의 현실 속에서 잘 숙성된 한 편의 정갈한 숲의 몽유라고 부를만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번 시집에서도 여전히 자신만의 시적 장점을 잘 지켜내고 있다. 꿈과 현실, 실재와 환상의 경계를 지우면서 싱싱한 감각을 직관의 상상력으로 길어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맡은 이정현 문학기고가는 시집 『당신의 기억은 산호색이다』을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이 시집의 중심축을 ‘유년’과 ‘사랑’으로 간파하고, 유년과 사랑의 변주에서 드러나는 그리움과 근심, 사랑의 상실에서 빚어진 슬픔이, 이미지 중첩으로 회오리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집의 시편들은 ‘유년시’와 ‘사랑시’로 대별할 수 있다. 유년은 ‘어린 시절의 천진한 기억’이고, 사랑은 ‘자신의 삶 속에서 후회해야 할 것밖에는 발견하지 못하는 한 성년의 신음’이다. 시인의 시에서 유년은 손에 잡히지 않아 ‘환상’이고 사랑은 이룰 수 없어 ‘꿈’으로밖에 표기할 수 없다. 그래서 그에게 유년은 ‘예찬’이고 사랑은 ‘환멸’이다. ‘환상’과 ‘꿈’은 시집 『당신의 기억은 산호색이다』의 양쪽 바퀴와 같고 동시에 시를 끌고 가는 엔진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이근일

2006년,<현대문학>에시「가물거리는그흰빛」외4편을발표하며등단한시인이다.서울과학기술대문예창작과를졸업하고,동대학원에서문예창작학석사학위를받았다.현재시인으로활동하며1인출판사인‘기린과숲’을운영하고있다.쓴책으로는시집『아무의그늘』,그림우화『안녕,나는고래야』와『코끼리쿤』,각색고전『허생전·예덕선생전』등이있다.

목차

1부

섬/그건착각이어라/당신의기억은산호색이다/구름의증식/침윤/저만치/파두/자수/마음/문

2부

빈방/애월/것/숨바꼭질/침묵/꿈꾸는생/동경/나는차가운심장으로/팥죽/토마토먹고싶다는생각/이나무/나비를꿈꾸는얼굴로/침잠하는빛들의고요를마신다/꿈은어디있습니까/서커스/시를쓰다잠든밤

3부

독심술/파리지옥/통증/아이리스/침묵/백송/물보라/균열/밑/내게무슨말인가를/그를기다린다/흐리고진눈깨비/폭염/묵호/달의형벌/악어의눈물/눈동자/독

4부

환멸/너의붉은손처럼/섬/그것으로부터/마치고양이처럼/귀향/탈피/목월빵집/셀리아의유령/북극에서온답장10

해설익사|이정현(문학기고가)

출판사 서평

다만이야기로남은마음의폐허,
무한으로넘어가려는몸짓과포즈

무한으로넘어가려는몸짓이등단이후네가쓴대부분의시에서아른거린다.“신의계시”를“옮겨적는일”따위는네시에서결코일어나지않겠지만그럼에도너는세계의틈을무언가로메울수있다고가끔착각에빠진다.네가말했듯,‘착각’은때로오해의비를부른다(「구름의증식」).물론네시안에서‘착각’은증식하지않는다.그것을깨닫는순간,곧바로침묵에빠지기때문이다(“착각이”“오해의비를뿌리고/우리는침묵했다”,「구름의증식」).무한으로넘어가려는네몸짓은사실,대수롭지않다.그저포즈일뿐.오늘도,어제도,내일도탈출을꿈꾸는언어감옥의수인들을보라!시인들은그곳에서“못다한이야기”(「숨바꼭질」)를속으로속으로공글리는자들인데어리석게오촉짜리희미한알전구아래앉아오늘도이것을꿈꾼다.

잠도,꿈도,그녀도우물같다.“한번눈을감았다/뜨면”우물밖,다시눈감으면우물안,“어떤날엔눈을감아도/보이는길이있었다/그길을걸을때마다/발바닥이퍼렇게멍들곤했는데//계속걷다보면달라진널만날수있었고(……)그러다갑자기사라진길을보고/이것이꿈이라는걸깨달았다”(「백송」).“그런데나는왜아직/여기에머물러있을까//왜자꾸물보라일으키며/혼자하얗게부서지는것일까”(「물보라」).스톱!「붉은손」‘사랑시’편주해는이것으로충분하지않나요.“죽은줄알았던은줄팔랑나비가강물위를난다”(「그건착각이어라」).퍼렇게멍들고(「백송」)하얗게부서질지라도(「물보라」)은줄팔랑나비가나폴나폴허공을향해난다.“잊은줄알았던감정한짝”(「그건착각이어라」)찾으러너울너울은줄팔랑나비가난다.멍들겠지요,부서지겠지요,잊혀지겠지요,사라지겠지요.우물로뛰어든익사직전,당신의얼굴을본다.아니,우물에서건진사랑하는당신얼굴을본다.그래,“영영오지않을그를기다리며”(「그를기다린다」)이글을쓴다.알고있는지,네가쓴‘사랑시’들을우물에장사지내고남은건열망과동경뿐.우물은닫혀있고연인들은드물게하늘을본다.그래,오늘은여기까지!“준비한빵이모두소진되었습니다”.

시집을압축적으로보여준「붉은손」파트1의키워드가‘유년’과‘사랑’임을명토박은이상,파트2해석이제한적일수있음을감안해야한다.그럼에도상당한은유를내포한‘불가사리’는논쟁을불러일으킬만하다.추측건대첫시집후반부에위치한「다른기차」에누군가아무도몰래비밀파이프라인을설치한것처럼보인다.복기해보면그것은오지않은미래의일이고(2023년)아직은(2017년)아무도모른다.너는지금2017년에가있다.은유인줄알았던(“섬은멀리서빨갛게꿈틀거린다섬은미지의세계를품고서유혹하는아름다운불가사리”,「다른기차」)그것(“아름다운불가사리”)이,은유가아닌미래의당신이바다에띄워보낸‘실재하는불가사리’(“모래톱위/꿈틀거리는불가사리하나”,「붉은손」)임을알게될때독자들은혼란스럽다.과거를향해“열어놓은바닷속”(「다른기차」)에서무슨일이일어난걸까.알수없어라.미래에서과거로역진(逆進)하는시간을보라.시간은은유를이기지못할것이다.‘은유하는실재’(‘빨갛게꿈틀거리는섬’)가꿈틀거린다.(……)먼미래에서온당신목소리가들린다.그래요,“지금내가할수있는건”“그걸주워다시바다로/(과거속의당신에게)잠잠히띄워보내는일”,그게다예요.미래의해변을서성이는당신이보인다.당신은조금전아무도몰래비밀파이프라인에실어바다로‘그것’(“불가사리”)을부쳤다.내가읽은「붉은손」파트2의전모다.

■시인의말

어릴적벚나무에올라버찌를따먹던기억
이기억은지금까지날따라다닌다

기억을오르다보면헛디딜때도있다
왜곡되거나꿈인지생시인지모를기억을밟았기때문이다
그러나허방가지들에도검붉은열매는달리고
쬐그만이황홀경을음미하다보면시간가는줄모른다

내게시쓰기란나무오르기와도같은것
몇번을미끄러져도다시오를수있는것
오르고올라도그끝자락엔영영닿을수없는것

책속에서

몰랐다그것이덫이라는걸모진바람을피한대신새들은눈에갇힌채수천킬로미터를빙빙돌아야한다는걸

산호는죽으면골격만남는다
살구는죽어도무르고무르다

당신아니면누가또날기억해줄까,이런생각으로나는단단해진관계의골격에살구를달아주었다
---「당신의기억은산호색이다」중에서

어떤계기로곡선을잃어버린이에게나풀나풀강을건너는나비의리듬을선물하고싶다.벽은문으로열리고,이벽을쭉따라가면문대신사람을만나게되리라.늘머뭇거리는사람.하얀벽에다시하얀색을칠하는사람.내가잘아는사람.또내가잘모르는사람.지금나는그사람을기다리는것이다.여전히문을열어둔채로.
---「문」중에서

우리는저마다모란꽃속으로숨어들었다,그속에고통이스멀거리는줄모르고
우리는깊은밤달을파고지난사연을묻었다,그것이온세상에누설되는줄모르고

그사이강은비틀린운명에휩싸여소용돌이치고
이따금우리의마음을쑤시는찬연한빛이쏟아질때면
강은아팠다그리고강의아픔이먹빛을걷어낼때마다

속내모를알수없는색의파랑이일었다,온종일너와내가울먹이도록
---「침윤」중에서

계절을역행하며휘몰아치는눈보라처럼이나무는문경에다다른다.아니문경으로부터점점밀려나고있다.이나무는어쩐지내전생을훤히들여다보는것같고,또그런몸짓을반복해서보여주고있다.그런몸짓으로내게무언가말을건네고있다.침묵에가까운,내가잘이해할수없는말들을빈가지마다늘어뜨린채.나무에서나무와나무로끝없이재생중인이나무와나사이시간은잠시멈춘것도같고.여전히알수없는몸짓으로말하고,밀리고,휘어지는이나무를나도이제는좀알것도같다.사방에흩날리는이말의부스러기는무엇인가.희끗희끗내눈썹에내려앉은이은밀한비의는.
---「이나무」중에서

너와가지않으려는마음을
기차라부를까기차가밟고간철교라부를까

너를강물에빠뜨리고싶은마음을
배꼽이라부를까배꼽보다깊은싱크홀이라부를까

네가죽어야내가산다는말
내가죽어야네가산다는말

사람들의말과말사이
뜨겁거나차가운물이흘러넘쳤고

나는보았다물속에서
서로할퀴는날카로운손톱들을

짙푸른물갈퀴달고빠르게흩어진사람들을
---「물보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