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에대한편견은없는가
다시살펴보는분청사기의미(美)
분청사기는고려청자와조선백자사이의국내3대자기로서당당히위치함에도불구하고대중에게뚜렷이인식·확산되지못한아쉬움이있다.거기에는누가사용한그릇인가하는쟁점이있었다.『호암미술관에서감상하는교과서에서배운미술』이라는책에의하면“형태와장식을살펴보면청자는귀족적이며섬세한아름다움을자랑하지만,분청은서민적이고소박하고어떠한방식이나규범에도구애받지않는즉흥적인형태와문양을사용한다.”라며분청사기가서민적이고소박하다는의견을피력한다.이논점은근현대한국미술철학에막대한영향력을미친일본인야나기무네요시(1889~1961)의“중국의유적천목과조선의이도다완모두잡기로서민중의질그릇으로거칠고자연스러운제작방식으로태어난산물이지만,천한민기(民器)에서비범한아름다움을간파한것이야말로초기일본다인들의역량”이라칭찬하며자부심을드러낸표현에서비롯되었다고볼수있다.
이점에대하여저자는유적천목과이도다완이중국과한반도에서민중이사용한일반질그릇이아니라실제로도찻그릇으로사용된도자기였다면야나기무네요시의주장은큰모순에서출발한것이라말한다.아직국내에이도다완에대한문헌기록이발견되지않은아쉬움속에서몇몇문학속에언급되어있는당시엘리트조선문인들의차문화를통해조선차문화와찻그릇에대한의견을주장하며,차후학자들의활발한연구를기대한다고덧붙이고있다.저자는이책을통해분청사기의초창기부터전성기와쇠퇴기에이르기까지그역사를살펴보고,표현기법과개별작품을통해분청사기를바라보는예술적인안목을전한다.뿐만아니라당시국가적인관리시스템및주변국과의관계속에서분청사기의위상과역할등을확인하며그동안미진했던분청사기의미(美)에대한논의를보다담대히해나갈것을제안한다.
조선전성기시대를상징하는그릇
담백함으로표출될수있었던자부심의깊이
분청사기는동시대주변국보다남달리번성했던조선전기에만들어진도자기로,특히세종~세조시대에가장뛰어난그릇이제작되었다.1468년관요가성립되어질높은백자가생산되기전까지조선에서만드는최고도자기로서의위치를유지했다.대략1420년부터1460년까지약50년이그시기다.세종부터세조시대인이때는조선사를넘어한반도역대역사중에서도최소한다섯손가락에꼽힐정도로문화적으로활발하고선진적인시대이기도했다.이때한반도에서는한글이탄생하였고,4군6진으로영토가크게넓어졌으며,법전인경국대전을만들고,음악과토지및여러제도를정리했다.더나아가수많은학자들과관료들의연구성과로과학기술과더불어문학수준도높아졌으니,오죽하면중국에위치한명나라마저조선의실력을함부로무시하지못할정도였다.세조시대에는조선의자주성도남달라원구단을만들어중국황제처럼하늘에제사를지내기도했다.
그런만큼당시조선인들은자신보다아래에여진과일본이있다여겼고,두지역을적극관리·통제하였기에여진과일본역시당연히조선을큰나라라생각했다.따라서당시조선인들의한반도영역을넘어서는넓은세계관과더불어자부심역시남달랐다.바로이시점에만들어진분청사기는당연히조선전기,즉조선전성기시대를상징하는그릇이었다.이렇듯동시대중국의백자와비교하여조선만의독특한미감과격을갖춘도자기가선보인것은나름이유가있었다.
15세기에구현된모던함과추상!
폭넓게공감하지못했던분청사기의미(美)
2011년뉴욕메트로폴리탄미술관한국실에서“한국의분청사기”라는제목으로특별전이개최되었다.당시미국의한미술평론가는[뉴욕타임스]를통해“수세기전점토로빚은그릇이현대성을말하다”라언급한바있다.뿐만아니라“도자기로서표현할수있는모든방법을분청사기가이미다했다”라는말처럼분청사기의매력에높은평가를하는해외반응은국내의인식과대비된다.분청사기에대한국내의인식은단순히수치상으로보더라도고려청자는국보,보물숫자를합쳐서무려80개가넘어가고,조선백자도국보,보물이60여개에육박하는반면분청사기는국보와보물을합쳐겨우30여개에불과하다.이는분청사기가청자와백자사이의징검다리라는단편적인인식,더나아가그동안분청사기만의미감을충분히설명하여설득시키지못한탓일것이다.이책은이런우리의분청사기가일본에서는모모야마시대이래로엄청난가치의도자기로대접받는이유는무엇이며,지금보아도손색없는현대적이면서도추상적인표현으로세계유수의도자기들과차별되는미감으로평가를받는이유는무엇인지를탐구하고발견하게한다.
조선전기전성기는왜분청사기를택했고,
일본모모야마시대이후일본의다도인들은왜이도다완을택하였나
1392년개국한조선은고려의마지막모습을매우선명하게기억하고있었다.원나라의몽골인들과한몸처럼기생하던고려귀족들의부의독식과사치,그리고조국에대한배신등으로나라가크게약해지고,틈을노린외적들의침입은끊이지않고백성들은생존에급급하여살던터전을버리고유랑하는모습이었다.이에조선은개국후왕실부터검약을강조하였고,고려시대와달리가능한담담하고화려하지않은예술관을추구하려고노력하였다.그결과유교문화중가장중요한가치를부여하는제사에서조차분청사기로만든제기를사용했다.그렇게한땀한땀정성스럽게만든분청사기제기는제사에사용되며고려말전국토가파괴당하면서가족이해체되고무너진상황을극복하도록만든다.즉당시제사는가족주의의회복이자마을의회복이며,더나아가국가의회복을위한행사였던것이다.
한편일본은무려150년가까이전쟁을벌이며서로를배신하고죽이는일로가득했던전국시대를지나,이를극복하는과정에서전국의다이묘들은차를통해,더정확히는엄격한형식을강조한다도를통해질서를회복하고자했다.그과정에서전란전에사용하던화려한중국찻그릇은점차담담한미감의분청사기로교체되었으니,이는전시대에대한통절한반성이만든문화가아닐까싶다.이에당시기준으로일본보다문화적으로선진국인조선이전란극복후부터사용하던분청사기에점차매력을느낀것이아닐까?저자황윤은이처럼일본의초기다인들도분청사기가어떤의미를지닌그릇이었는지충분히이해하고있었다고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