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환영 (이서진 장편소설)

푸른 환영 (이서진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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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 소설은
소설 『푸른 환영』은 이서진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로 문장의 균형감각과 조화가 창작의 교과서적인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현실 저 너머의 몽상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를 향한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현하고 있다. 작품을 완독하고 나면 푸른 장미 문신을 한 여자가 아득한 환영처럼 머릿속을 맴돈다.
소설을 써보겠다고 기존의 일상을 뛰쳐나온 주인공 도영의 현실을, 작가는 유려하고 세심한 문장을 통해 인물의 모습과 상황을 손에 잡힐 듯이 전달하고 있다. 이처럼 문장의 장인이 펼쳐 놓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도영이 절감하는 일상적인 현실과 갈망하는 꿈 사이의 거리감이 저절로 체득된다. 절실한 염원을 가지면서도 최소한의 밥벌이에 시달리는 도영이 대면한, 앞날의 불투명한 불안감은 작품을 읽어 본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제되고 신중하게 선택된 문장들이 독자들의 마음속 열망을 적확하게 건드리고 있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일상의 요원한 꿈을 선명하게 전달한다.
소설에서 도영과 상반되는 인물이 여자인데, 주제적인 측면에서 도영의 대위법적 존재다. 두 사람의 관계는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서로 이름조차 모르고 도영은 여자의 얼굴도 뚜렷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뒷모습, 그것도 목덜미의 푸른 장미 문양이 기억에 남을 뿐이다. 도영의 남루한 분위기와 달리 여자는 세련되고 우아한 분위기다. 도영이 일상의 누추한 생활의 냄새를 묻히고 살아간다면, 여자는 그와는 다소 거리가 먼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모호한 신비스러운 느낌이다. 소설은 이 같은 두 인물의 상반된 특징인 현실과 비현실, 일상과 꿈 사이의 절묘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상실과 결여의 상처라는 공통점을 중심으로 작품을 이끌고 있다.
『푸른 환영』에서 여자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목덜미에 있는 푸른 장미 문양이다. 푸른 장미의 꽃말은 기적, 환상,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다. 갈망하는 꿈의 환상을 찾아 떠나온 도영 앞에 그 같은 환영의 육화로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두 사람은 주로 전화 통화를 통해 만나는데 말하는 주체는 대체로 여자이며 듣는 쪽은 도영이다.
여러 겹의 물결 같은 은유 가득한 여자의 목소리가 전하는, 불우한 이야기에 도영은 깊이 공감하며 이입된다. 도영 역시 그 못지않은 불행한 가족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런 여자의 이야기와 도영의 이야기를 교차하면서 서사를 이어간다. 그 과정에서 조화로운 선율의 절묘한 화합을 끌어내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어, 독자들은 두 사람의 사연에 깊이 빠져들 수 있다.
도영은 여자의 말을 듣게 되면서 지지부진하던 글쓰기를 그제야 생생히 이어간다. 그 행위는 여자를 향한 공감이 깊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향한 성찰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가족사를 돌이켜 보며 오랫동안 내면 깊숙이 묻어두었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린다. 무엇보다 가족에게 지울 길 없는 상처와 피해를 주고 떠난 어머니를 더는 외면하지 않는다. 그것을 글로 옮기면서 그간 자신이 지닌 상실과 결여를 뒤늦게 직시한다. 자신 속에 잠재되어 있던 버거운 무게로 인해 무언가를 절박하게 갈망하고 있었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그것이 결국 글을 쓰겠다는 열망의 바탕이라는 사실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결말에서 여자는 도영에게 파미르고원으로 가는 길에 만난 어떤 존재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무겁게 덮어씌운 무언가를 버리기 위한 수행의 길을 가면서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많은 짐이 실린 수레를 또 힘들게 끌고 가는 노정이 우리 삶의 모습이 아닐까, 라는 암시를 남긴다. 그 암시는 현생의 시간, 우주 속의 한낱 미약한 존재로 살아가는 모두에게 건네는 강렬한 화두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자는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말 저편으로 사라진다. 도영은 더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면서 깊은 상실의 좌절을 안는다. 현실인 듯 비현실인 듯 경계의 혼돈에서 아슬한 생의 조각 조각으로 흔들린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짙은 안개 속 어딘가에 켜졌을 희미한 불빛을 찾고자 한다. 그런 도영의 앞길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라는 질문이 독자들 앞에 놓여있다.
저자

이서진

강원특별자치도고성거진에서태어났다.2006년「문학마당」신인상에「해당화피고지는」이당선되어창작활동을시작했다.진주가을문예에중편소설「동행」이당선되었으며중편소설「빨간눈이새」로김만중문학상,중편소설「그림자정원」으로원주문학상,단편소설「봄날,이야기」로강원문학작품상을수상했다.지은책으로소설집「달의뒤편에드리운시간들」「낯선틈」「당신의허공」장편소설「밤의그늘」이있다.

목차

1~23/8

해설
환영의대위법_장두영(문학평론가)/239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한없이남루했다.서너걸음만움직이면사방동선이연결되는좁은공간의그것들이지금도영에게실현되는실체였으며최선이었다.그에비해오늘여자의말속공간은이상향일뿐이었다.좁고어둑한틈새로과하게비집고들어오는햇살뭉텅이를바라보는심정이었다.문득한번도가보지못한먼이국의사막이뜬금없이떠올랐다.처한공간의좌표를알지못하는불안함을안고무작정걸으며,강렬하게쏟아지는열기에휩싸여헉헉대는거라면그와별반다르지않을까싶다.

서글펐다.가고있는이길이맞는건가.방향은제대로가고있는건가의문이들었다.아닌것같았다.걸어야한다고해서걷지만뚜렷한목적없이기계적인걸음만옮겼다.자신임에도제삶에대해무엇하나구체화할수없는무력감이덧씌워졌다.
오래전부터명확히규정할수없는어떤열망이쟁여졌다.쌓아둠은시간이지날수록자주내면을툭툭건드렸다.그럴때마다허튼갈망이라여기며스쳐보냈다.벗어날수없는남루한현실을올무처럼매달아야하는생활이었기에지나치는갈피마다그갈망을구겨넣어야만했다.
그랬음에도몸살같은열망은빈번히치올랐다.일상곳곳에서틈새를비집고나와울컥대는설움으로덮쳤다.바닥을마구뒹굴어형편없이지저분하고구겨진옷자락을보듯속이쓰렸다.생활은긴장상태일때처럼자주경직되었고먼지가잔뜩낀탁한유리통에갇힌듯답답했다.
더이상그속에있고싶지않았다.갈망하는것이무엇인지알지못해모호했으나막연히묻어두고싶지않았다.속절없이지나치는시간을허허로이놓치면서새로운걸음을떼는시기가더늦어서는안될것같았다.오래도록짓누르던어떤것들에서벗어나정확한보폭으로정확한지점을향하고싶었다.그것을확고히끄집어내서탁한통속을벗어나숨을크게내쉬고싶었다.

푸른장미의징표가박힌목덜미는나임에도내가볼수는없어요.그러나짧은머리로훤하게드러나많은사람은볼수있듯,나와아주긴밀한그들이어디서든확연히볼수있을거라여기고싶었어요.기적이라는꽃말을가진푸른장미를담고있으면그들이실체를드러낼것같아서요.그바람이실현불가능하다는걸알면서도간절히믿고싶거든요.
무얼까…여자의말은.도영은짐작하기어려웠다.
허망한바람인줄알면서오랫동안기를머리를단호히자르고피부에상처를내면서까지문신을새겨넣는간절함은어떤걸까.쉽게지워질수없는표식을몸에심고서긴밀한이들에게드러나길바라는기적은무엇일까.

도영은입력한문장을다시읽어보며어느날예기치않게다가든여자의무게가문득짚어졌다.여자는어쩌면구름이많이끼어흐린날,사이를뚫고나온무심한한때의햇살같은걸까,잠시스치는어지러운빛의산란같은걸까.만약그런거라면…이미발길이들어섰는데미처볼수없었던차가운유리면이놓여있다면…혹여그게깨질까불안해지는거라면어찌할까.도영만의그런불안함이확실시될지는알수없으나그럴수도있을지모른다는생각이들자심경이아주쓸쓸해진다.아무래도여자를향한마음이이미깊어진것같다.

돌아보면어머니에대한멀건감정은도영스스로쳐놓은지독한상실감의다른함량이었다.채워질수없어안타까이갈구하는헛된발버둥이,복병으로도사렸다가형체도불분명하게스멀대고기어나와갉아대는거였다.어느날불현듯절박한무언가를끄집어냈던것도그발로의표출이었을지도모르겠다.그것의바탕이글을쓰고싶다는대체염원의궤였는지도.

척박한길위의한여자와한남자를보며결국삶은도돌이표라는생각이들었어요.어딘가로나아가고무언가를벗어내려하지만주체가뿜어내는수많은욕망안에서뱅뱅돌고있는건아닌지.그들은무엇을버리고무엇을얻으려고혹은무엇을깨닫기위해저토록힘든노정을가고있는건가,라는궁금증이들었어요.과학문명인자동차에앉아편히가고있는내게대신물었으나대답할수없었어요.내가지나고있는현생의시간속에서나라는개체의의미마저파악하지못하니말이에요.나또한수많은욕망안에서뱅뱅돌고있는우주속의한낱미약한존재니까요.

그래도그너머막연한어딘가를향해눈길에바짝힘을주어좀더먼시선을두었다.그곳에분명히있을거라믿어질뚜렷함을잡고싶었다.무엇보다흐려진여자를다시보고싶었다.지난계절처럼여자의이야기속시공간에함께섞여생생히흐르고싶었다.
도영의향망은흐린눈발막을활짝젖혀버릴듯단숨에치올랐다.그랬음에도시선은더멀리나아가지못하고몰아치는눈발에가로막혔다.눈발의이쪽과저쪽인경계의혼돈에서아른대는절실한갈망은갈피를잡지못해자꾸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