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침묵하지 않았다 1 : 만해평전소설

님은 침묵하지 않았다 1 : 만해평전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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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우리 민족의 크나큰 자랑이며 자부심, 만해 한용운 일대기를 집대성한 소설!
승려, 학자, 시인, 독립투사 만해 한용운의 원동력이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젊은 시절 그에게 도대체 어떤 생의 궤적이 있었기에 이런 1인 다역의 삶을 영위하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바탕으로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만해 한용운의 불가 귀의 이전의 편력과 귀의 이후의 사회활동과 독립운동에 대한 서사를 그리고 있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부모가 정해준 여자와 결혼해 평범한 농사꾼으로 살아가던 한유천(한용운)은 머리가 비상해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며 『서상기』를 독파했고 『통감』을 읽고 뜻을 다 파악했으며, 『서경』을 거듭 읽어서 기삼백주朞三百註를 통달한다. 1896년 17세에 서당의 훈장이 병석에 눕자 스승의 뒤를 이어 학동들을 가르치던 유천은 의병운동을 위해 고향을 떠난다. 나라를 구하고자 참가한 창의군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고향에 가면 옥살이를 할 처지에 놓인 유천은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 등지를 전전한다. 불목하니 노릇을 하면서 절밥을 얻어먹고 있던 유천은 7년 만에 고향에 내려가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녹슨 호미와 아내이다. 집에서 몇 달 머무는 동안 아내가 임신을 하자 계속 있다가는 농사꾼으로 생을 마칠 거라는 예감이 들어 집을 나와 떠돌던 유천은 오세암에서 만난 지우스님 인도로 백담사에서 불가에 귀의한다. 이때가 26살이었고 계명은 봉완이다. 봉완은 절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편력을 하다가 강대용의 누이동생 강연실과 인연을 맺는데, 둘의 관계는 소설의 마지막까지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봉완은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돌아다니면서 온갖 사람들을 만나고 견문을 넓히는 와중에 일진회 중으로 오인 받아 죽을 고비를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귀국길에 오른다. 조선으로 돌아온 봉완은 석왕사에서 석전 박한영 스님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국내 불교를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망국의 길로 걸어가는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 눈을 뜬다. 이 무렵 한영스님과 시를 주고받으면서 시의 묘미를 알게 된다.
다시 백담사로 간 봉완은 학암스님에게서 『기신론』을 배우고 원효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원각경』과 『능엄경』도 배우며 용맹정진하면서 법력이 깊어진다. 1907년 봉완은 건봉사의 만화스님에 의해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로 다시 태어난다. 1907년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한 해이기도 하다. 일본에 가서 제국의 실체를 보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한성으로 간 만해는 강연실이 일진회 회원이자 통감부 직원인 이용범의 후처가 된 것을 알게 된다. 지피지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본에 간 만해는 시모노세키, 미야지마, 교토 등지를 순유하면서 신문물과 일본 불교를 시찰한다. 도쿄의 고마자와 학림대학에서는 불교와 서양철학을 청강하며 견문을 넓힌다. 조종동의 대표 승려 히로쓰 다케조와, 아사다 오노야마 교수, 일본 유학 중인 최린 등과의 다양한 대화를 통해서 한일관계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확립하게 되고, 일본에 정신적으로 예속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책을 마련하기도 한다. 일본 여행 중에 일본이 곧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토지사업을 하리라 예측한 만해는 이에 맞서고자 측량기계를 구입하고 귀국 후에는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해 소장으로 취임한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더라도 개인 소유 및 사찰 소유의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토지 측량을 치밀하게 하고 토지문서를 잘 챙기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만해의 예측대로 일본은 1908년에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토지사업을 실시하고, 토지문서에 없는 땅은 일본의 귀속 영토로 만들어 버린다.
30대에 접어든 만해는 강원도 표훈사에 불교 강사로 취임하지만 한일합병 소식에 절망하면서도 조국의 독립운동과 불교계의 개혁운동을 동궤에 놓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하고, 한일불교동맹조약 체결 조짐이 보이자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해 분산하고, 범어사에 조선임제종 종무원을 설치해 관장에 취임한다. 1911년 만주로 쫓겨나지만 이때다 싶어 만주지방 독립군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고, 망명 중이던 박은식 이시영 윤세복 등 독립지사들과 만나 향후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논의한다. 1913년 박한영 장금봉 등과 불교종무원을 창설하고 다음 해에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한다. 1914년에는 뷸교 경전을 대중이 읽을 수 있도록 『불교대전』을 발행하고, 1917년에는 『정선 강의 체근담을』 발행하고, 1918년 월간 『유심』을 창간한다. 비록 조국 산천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지만 만해는 불교계의 핵심인물로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가 된다.
만해는 1919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조선 독립을 천명해 세상에 알리는 일에 목숨을 내놓기로 한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를 설득해 앞장세우고 문장력이 뛰어난 최남선에게 〈독립선언서〉 초안을 잡아달라고 부탁한다. 초안이 넘어오자 자구를 수정하고 공약 삼장을 추가한다. 소설은 사실상 만해의 주도로 진행되는 기미년 3월 1일의 대한독립운동 과정의 상황을 시종일관 긴박감 넘치게 묘사하고 있다. 마침내 3월 1일, 탑골공원 옆 태화관에서 모여 독립을 선포하다가 투옥된 만해는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서도 독립운동의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1922년 5월에는 조선불교청년회 주최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철창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그해 9월에는 조선학생회 주최로 천도교회관에서 ‘욱바라밀’이라는 주제로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강연을 한다. 일본이 만해를 다시 구속하지 못한 것은 그랬다가는 무슨 소요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26년에 『십현담주해와』 『님의 침묵』을 발간하고, 다음 해에 항일 단체인 신간회를 발기한 만해는 조선불교총동맹을 발족하고 일제의 불교탄압에 정면으로 맞선다. 광주학생의거가 일어나자 민중대회를 열어 장거를 지지한다. ‘심우장’을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고 지을 수 없다고 북향으로 지은 것은 만해의 대꼬챙이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만해는 광복운동의 선구자 김동삼이 옥사하자 유해를 심우장으로 모셔와 오일장을 지내기도 한다.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조선인 학병 출정을 반대하기도 한 만해는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6월 29일 신경통이 악화 되어 심우장에서 입적하는데, 예순다섯이었다.
김호운의 장편소설 『님은 침묵하지 않았다』는 이처럼 만해 한용운 일대기의 활동상을 치밀하고도 역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역사학자들이 놓친 부분이나 각종 재미있는 일화들을 발굴하여 소설의 한 장면 한 장면으로 입체감 있게 보여주면서 만해를 생생한 인물로 재현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이용범의 개심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친일로 돌아선 인물들에 대한 심판조의 비난도 가슴을 후련하게 만든다. 일진회에 몸담았던 친일 부역자들이 마음을 바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시작한 ‘대동단’ 사건은 우리 역사에 묻혀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한때 친일분자였던 것만으로 지금까지 역사의 정면에 서지 못한 그들의 활약상을 잘 보여준다.
『님은 침묵하지 않았다』 만해 한용운 하면 『님의 침묵』을 쓴 시인이자,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덧붙이면서도, 그 외의 것은 잘 떠오르지 않은 독자들에게 그의 삶을 입체적으로 집대성해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소설이다.
저자

김호운

저자:김호운

소설가,수필가

1978년『월간문학』신인작품상에단편소설<유리벽저편>이당선되어등단.장편소설『표해록(漂海錄)』『바이칼,단군의태양을품다』등,소설집『그림속에서튀어나온청소부』『사라예보의장미』등,콩트집『궁합이맞습니다』(전2권)등,에세이집『연꽃,미소』,칼럼집『나비를잡는아이의마음』,인문학저서『소설학림』등작품집30여권출간.한국소설문학상,한국문학백년상,녹색문학상.PEN문학상,둔촌이집문학상,대한민국예술문화대상,리더스에세이문학대상수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표창,문화체육관광부문학진흥정책위원,한국소설가협회이사장역임.현재국립한국문학관자문위원,국제펜한국본부자문위원,한국문학예술저작권협회이사,산림문학회고문,한국문인협회이사장.

목차

작가의말

출향·10
한성에나부끼는열강의깃발·14
인연따라가는길·44
해뜨는동쪽으로·71
바람은허공에머무는데·95
무명초를자르고·109
병속을빠져나온새·132
인연의끝을떨치며·150
무상은바람을타고·184
블라디보스토크를향하여·223
쓸쓸한귀국길·259
석왕사쇠북소리·288
다시병안에들어간새·298
배는기울고·323
구름위를나는용·351
먼땅,가까운숨결·361
동경하늘에비는내리고·385
꽃을찾는벌과나비·420
외로운선각자·44

출판사 서평

이소설은
승려,학자,시인,독립투사만해한용운의원동력이과연어디에있었을까?젊은시절그에게도대체어떤생의궤적이있었기에이런1인다역의삶을영위하게되었을까?하는궁금증을바탕으로작가적상상력을발휘하여만해한용운의불가귀의이전의편력과귀의이후의사회활동과독립운동에대한서사를그리고있다.
열네살어린나이에부모가정해준여자와결혼해평범한농사꾼으로살아가던한유천(한용운)은머리가비상해서당에서한문을배우며『서상기』를독파했고『통감』을읽고뜻을다파악했으며,『서경』을거듭읽어서기삼백주朞三百註를통달한다.1896년17세에서당의훈장이병석에눕자스승의뒤를이어학동들을가르치던유천은의병운동을위해고향을떠난다.나라를구하고자참가한창의군이전투에서패배하고,고향에가면옥살이를할처지에놓인유천은강원도인제의백담사등지를전전한다.불목하니노릇을하면서절밥을얻어먹고있던유천은7년만에고향에내려가지만그를기다리는것은녹슨호미와아내이다.집에서몇달머무는동안아내가임신을하자계속있다가는농사꾼으로생을마칠거라는예감이들어집을나와떠돌던유천은오세암에서만난지우스님인도로백담사에서불가에귀의한다.이때가26살이었고계명은봉완이다.봉완은절에머무르지않고세상편력을하다가강대용의누이동생강연실과인연을맺는데,둘의관계는소설의마지막까지독자들의흥미를불러일으킨다.봉완은블라디보스토크등을돌아다니면서온갖사람들을만나고견문을넓히는와중에일진회중으로오인받아죽을고비를아슬아슬하게넘기고귀국길에오른다.조선으로돌아온봉완은석왕사에서석전박한영스님을만나많은대화를나누면서국내불교를개혁해야할필요성을느끼고,망국의길로걸어가는국내의정치적상황에눈을뜬다.이무렵한영스님과시를주고받으면서시의묘미를알게된다.
다시백담사로간봉완은학암스님에게서『기신론』을배우고원효를본격적으로연구하기시작하면서『원각경』과『능엄경』도배우며용맹정진하면서법력이깊어진다.1907년봉완은건봉사의만화스님에의해법명은용운,법호는만해로다시태어난다.1907년은대한제국이일본에의해강제로을사늑약을체결한해이기도하다.일본에가서제국의실체를보고와야겠다는생각에한성으로간만해는강연실이일진회회원이자통감부직원인이용범의후처가된것을알게된다.지피지기해야한다는생각으로일본에간만해는시모노세키,미야지마,교토등지를순유하면서신문물과일본불교를시찰한다.도쿄의고마자와학림대학에서는불교와서양철학을청강하며견문을넓힌다.조종동의대표승려히로쓰다케조와,아사다오노야마교수,일본유학중인최린등과의다양한대화를통해서한일관계에대한나름의견해를확립하게되고,일본에정신적으로예속되지않으려면어떻게해야하는지방책을마련하기도한다.일본여행중에일본이곧조선을식민지로만들고토지사업을하리라예측한만해는이에맞서고자측량기계를구입하고귀국후에는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개설해소장으로취임한다.조선이일본의식민지가되더라도개인소유및사찰소유의땅을빼앗기지않으려면토지측량을치밀하게하고토지문서를잘챙기고있어야한다고생각했기때문이다.결국만해의예측대로일본은1908년에동양척식주식회사를만들어전국적으로토지사업을실시하고,토지문서에없는땅은일본의귀속영토로만들어버린다.
30대에접어든만해는강원도표훈사에불교강사로취임하지만한일합병소식에절망하면서도조국의독립운동과불교계의개혁운동을동궤에놓고혼신의힘을다한다.백담사에서조선불교유신론을탈고하고,한일불교동맹조약체결조짐이보이자승려궐기대회를개최해분산하고,범어사에조선임제종종무원을설치해관장에취임한다.1911년만주로쫓겨나지만이때다싶어만주지방독립군들에게독립사상을고취하였고,망명중이던박은식이시영윤세복등독립지사들과만나향후독립운동의방향성을논의한다.1913년박한영장금봉등과불교종무원을창설하고다음해에조선불교회회장에취임한다.1914년에는뷸교경전을대중이읽을수있도록『불교대전』을발행하고,1917년에는『정선강의체근담을』발행하고,1918년월간『유심』을창간한다.비록조국산천은일본의식민지가되고말았지만만해는불교계의핵심인물로우리민족의정신적지도자가된다.
만해는1919년미국의윌슨대통령이민족자결주의를제창하자조선독립을천명해세상에알리는일에목숨을내놓기로한다.천도교지도자손병희를설득해앞장세우고문장력이뛰어난최남선에게<독립선언서>초안을잡아달라고부탁한다.초안이넘어오자자구를수정하고공약삼장을추가한다.소설은사실상만해의주도로진행되는기미년3월1일의대한독립운동과정의상황을시종일관긴박감넘치게묘사하고있다.마침내3월1일,탑골공원옆태화관에서모여독립을선포하다가투옥된만해는3년옥고를치르고나와서도독립운동의투쟁을멈추지않는다.1922년5월에는조선불교청년회주최로기독교청년회관에서‘철창철학’이라는제목으로.그해9월에는조선학생회주최로천도교회관에서‘욱바라밀’이라는주제로학생들에게독립사상을고취하는강연을한다.일본이만해를다시구속하지못한것은그랬다가는무슨소요가일어날지예측할수없었기때문이다.
1926년에『십현담주해와』『님의침묵』을발간하고,다음해에항일단체인신간회를발기한만해는조선불교총동맹을발족하고일제의불교탄압에정면으로맞선다.광주학생의거가일어나자민중대회를열어장거를지지한다.‘심우장’을조선총독부와마주보고지을수없다고북향으로지은것은만해의대꼬챙이성격을잘보여주는일화이다.만해는광복운동의선구자김동삼이옥사하자유해를심우장으로모셔와오일장을지내기도한다.창씨개명을반대하는운동을전개하고,조선인학병출정을반대하기도한만해는광복1년을앞둔1944년6월29일신경통이악화되어심우장에서입적하는데,예순다섯이었다.
김호운의장편소설『님은침묵하지않았다』는이처럼만해한용운일대기의활동상을치밀하고도역동적으로그리고있다.역사학자들이놓친부분이나각종재미있는일화들을발굴하여소설의한장면한장면으로입체감있게보여주면서만해를생생한인물로재현하고있다.뿐만아니라이용범의개심과정을흥미진진하게그리고,친일로돌아선인물들에대한심판조의비난도가슴을후련하게만든다.일진회에몸담았던친일부역자들이마음을바꿔우리민족의독립운동을시작한‘대동단’사건은우리역사에묻혀있는중요한사건이다.한때친일분자였던것만으로지금까지역사의정면에서지못한그들의활약상을잘보여준다.
『님은침묵하지않았다』만해한용운하면『님의침묵』을쓴시인이자,민족대표33인중의한사람이라고덧붙이면서도,그외의것은잘떠오르지않은독자들에게그의삶을입체적으로집대성해보여주는기념비적인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