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외출

불온한 외출

$13.00
Description
이 소설은
김영범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으로 표제작을 비롯해 9편의 작품을 싣고 있다. 가공할 자본의 힘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다시 일어나야 하는 인물들의 현재 일상과 그곳에서 벗어나고픈 자유에 대한 욕망과 그리움이 송곳같이 꽂혀있는 소설이다.
「불온한 외출」은 지하철 2호선에 탑승한 주인공이 들고 있는 가방 안에는 온갖 연장이 가득하고, 그 연장들이 언제든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서 비롯된 긴장감이 독자를 압도하는 작품이다. 지극히 불안정해 보이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는 단순히 개인적인 분노가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공분으로 가닿고 있다. 이 작품은 상대방을 향한 분노와 비판이 비정상적으로 끓어오르는 오늘날의 사회적 분위기를 주인공 나의 지극히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통해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서부영화를 보는 시간」은 옛날 서부영화를 새벽 두 시 도시의 편의점과 엮어 정년퇴직한 중년 남자와 함께 풀어가는 상상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서부 개척시대의 서부영화에 푹 빠져 바코드 건을 마치 권총처럼 휘두르며, 폐기 처분되는 삼각김밥을 골라내는 편의점 알바 남자의 형상은 최후의 결투에 나오는 배우를 닮은 고독한 비애를 물씬 풍긴다. 중년 남자의 속화된 로망이 자아내는 희화적인 장면이 오래오래 잊히지 않는다. 서부극의 서사와 주제는 명쾌하다.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치고 정의를 실현하거나 사랑을 쟁취한다. 중년 남자의 로망이다.

「위대한 노보 씨」는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미래 세계를 다루는 SF소설이지만 이 작품은 보통의 공상과학소설과 다르다. 기술의 진보와 발전된 미래상에 대한 경탄이나 신기함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대신 토마스 무어 스타일의 고전적인 유토피아론을 피력하기 때문이다. 최신의 유행이나 미래로의 지향이 아니라 정반대의 인문학적 상상력, 인간과 사회의 본질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길 위의 길」은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상황을 외롭게 살고있는 장 씨, 기구하게 살아온 여자, 그리고 길고양이, 이들을 유기적으로 엮어 형상화하고 있다. 소설 마지막에 지금까지 사람의 눈길을 피하기만 하는 삶을 살았던 장 씨에게 선택의 순간이 주어진다. 여자를 추적하는 사채업자와 대면을 회피할 것인가, 아니면 문을 열고 그들과 대면할 것인가. 똑똑 소리가 나는 문 앞으로 다가가는 장 씨의 발걸음은 문을 열고 그들의 눈을 피하지 않으면서 여자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것 같은 희망이 보인다. 그것은 장 씨가 자신을 둘러싼 굴레에 맞서 구멍을 내고 깨부수기를 바라는 독자들이 가져보는 희망이기도 하다.
「흔들 머리 된다고」는 어린 시절에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어머니의 마음 흔적을 짚어가는 이야기이다. 소설에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추억하는 문장들은 한편의 추도문으로 읽힌다. “엄마 노발대발 흔들 머리 된다고”라는 노래 가사는 꾸민 허구가 아니라 육화된 그리운 어머니 목소리로 다가온다. 그러기에 어머니를 형상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작가의 진심이 독자의 마음에 고스란히 와닿는다.
「라스코 동굴로 가는 길」은 아내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종일 집에서 무료하게 빈둥거리는 명퇴자는 신문을 정독하다가 태국의 어느 유소년 축구팀 선수와 코치가 실종된 사건을 접한다. 동굴 수색 작업이 펼쳐진다는 기사 내용은 동굴, 흔적, 벽화, 라스코 동굴을 연상하게 하고, 어느새 구석기 시대의 혈거인의 생활로 주인공 상념을 정교하게 이끌어간다. 여러 일상적 소재를 엮어서 활발한 상상력의 전개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갑갑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욕망은 소설에서 ‘의도적 실종’으로 불리며. 주인공은 스스로 완벽한 실종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스스로 동굴 밖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우물가의 삽화」는 주인공인 소년이 그리워하는 성희, 민희 두 누나에 관한 이야기를 잔잔하면서도 담백하게 풀어나간다. 이 회상의 정서는 근본적으로 어떤 안타까움의 정서와 연결되어 있다. 그 안타까움은 누나들이 어떤 소문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소년의 능력으로는 그들을 돕거나 구조할 수 없다는 죄책감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더욱 독자의 마음을 안타깝게 흔들었다.
「리리의 꽃밭」은 누군가를 향한 추억 이야기인데, 리리라는 여성에 대한 인상이 강렬하다. 이 소설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자그마한 상처나 부끄러움, 원망은 희미해지고 남게 되는 것은 누군가를 향한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의 현장을 그리고 있다.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그럼에도 시간과 회상을 통과하면서 그리움의 존재로 미화되는 리리라는 인물이 이채롭게 그려진다.
「로타네브와 베나토르」에는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존재감에 대한 회의,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에서도 겉돌기만 하는 생활, 갑갑하고 답답한 일상의 동굴에 갇혀 살아가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남자의 아내는 최근 개업한 카페에 정비소 기름 묻은 작업복 차림의 남편이 접근하는 것을 금지한다. 가게 매출이 줄어들 것 같은 계산 속 때문이다. 가족이나 직장 동료와 소통이 부족한 남자는 트윗 모임방에서 발견한 작음 숨구멍 하나에 위안을 느낀다. 하지만 위안을 준다고 믿었던 작은 공동체가 허위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당혹감은 환멸로만 이어지지 않고 뒤늦은 깨달음에 대한 암시로 이어진다. 아내의 욕심에 거부감을 느꼈던 남자도 아내와 다름없이 허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 겉으로는 반대처럼 보이던 로타네브와 베나토르가 결국 하나였다는 깨달음이다.
김영범 작가의 소설 『불온한 외출』은 우리 주변의 흔한 인물들의 삶을 원숙한 시선으로 탐구하면서도, 낡은 통일성이나 총체성의 관념에 대한 거부의 몸짓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소설은 인간의 노동, 시간, 가치, 지성을 생활의 실재성으로 집요하게 파헤치면서도, 현실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상징과 상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싸우는 상대와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 부단히 질문하고 있고, 그 날카로운 질문이 송곳이 되어 갑갑한 삶에 자유의 숨구멍을 뚫고 있는 것이다.
저자

김영범

저자:김영범
당진에서태어나작가를꿈꾸며국문학을공부했다.지천명에이르러<월간문학>을통해‘소설가’라는타이틀을얻었다.
한국문인협회·한국작가회·한국소설가협회·계간문예작가회·시에문학회·영등포문인협회회원으로활동하고있다.
현재,남산도서관<청소년문학교실>강사로출강한다.

목차


책을펴내며

불온한외출/9
서부영화를보는시간/35
위대한노보씨/61
길위의길/89
흔들머리된다고/115
라스코동굴로가는길/141
우물가의삽화/169
리리의꽃밭/197
로타네브와베나토르/225

해설
외출을위한연장_장두영/255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표제없는책에남아있던메모가떠올랐다.판면밖으로튀어나온메모는각기다른필체로어우러져있었다.‘세상에나서려거든반대편에서맞서라.그러지않으면훗날얻을게없다.’그밑에는색깔도필체도다른문구가떡하니버티고있었다.‘한발한발나아가다보면세상은좋아질것이다’라는두개의글귀가.그중하나는미순이가남긴말일거라고확신했다.
‘세상에나서려거든반대편에서맞서라.그러지않으면훗날얻을게없다.’반대편에서맞서야얻는다는게무슨뜻일까.세상은언제든뒤바뀌게마련이니반대편에서부딪쳐야세상이바뀔때한몫챙길수있다는말이겠지.그렇게하지않으면,세상이천지개벽을한다고해도개돼지로살아야하니까.그렇겠지.세상은어차피시소게임인것을.바뀌는세월,바뀌는시국이좀더느리거나좀더빠를뿐.아무리견고한세상일지라도변치않고영원할수는없을테니까.
‘한발한발나아가다보면세상은좋아질것이다.’그랬다.나또한그렇게생각했다.조금조금씩살기좋은세상이올거라고.세월이흐를수록사람들끼리싸우는일도줄고,굶주리는사람도줄어들거라고.아니었다.세기가바뀌고정권이바뀌어도세상은여전히아귀다툼이었다.평화로운세상은애초부터불가능한것이었을까.더많은이들이더많이다투고,더큰사건과사고로온세상은시끄러웠다.아무리평화를외쳐도세상은진흙탕싸움이었다.그렇지만나는미순이를믿는다.그녀의소망을확신한다.나는지금도그녀를믿고있다.
(「불온한외출」)

밖에있던검은모자가들어왔다.새우깡에오징어한마리,그리고맥주를빼들었다.맥주는딱3캔뿐.맥주를시원하게마시기위한저들만의전략일거였다.
나는바코드리더기를빼들었다.탕타당탕,게리쿠퍼의총솜씨를떠올리며레이저를쏜다.삑삐빅삑,레이저불빛이발사된다.어느위치에물품이있어도바코드를정확하게찍어댄다.삑사리하나없이모두백발백중이다.
“와,진짜빠르네요.”
“뭐가요?”
“찍는거.”
빠른지느린지를아는거보니까,녀석도편의점알바를좀했었나보다.
“아,그렇습니까.”
으쓱해진나는녀석에게하나더보여주기로한다.리더기돌리기.‘슝슝슝-’,마치게리쿠퍼가총을돌리듯리더기를빙빙돌린다.‘투둑툭’,권총집에총을찔러넣듯리더기를거치대에올려놓기까지.리더기를돌리기는쉽지않다.권총처럼손가락을끼울수있는방아쇠울이달린것도아니니,리더기돌리기에관한한내가게리쿠퍼였다.
(「서부영화를보는시간」)

노보는사무실에서꼼짝하지않고로토피아의형세를지켜보았다.훔쳐보는재미라고나할까.노보는요즘그런것을만끽하고있었다.어리석은자들의시시비비를내려다보는것이이토록흥미로운일이었던가.보이지않는마력같은것을손에쥔느낌이었다.노보는주민들의관심을돌릴만한,그들의공포를재울만한주민을하나더유치하기로했다.
노보가점지한36호주민은바로무당이었다.데이터분석가A의보고서에따르면무당은21세기말까지도그명맥을유지했다고하는데….노보는무당의등급을높이기로하였다.자그마치3.3으로AI수치를올려놓았다.
첨단과학의결정체인로토피아에무당을들이다니.인공지능로봇이살아가는로토피아에무당로봇은상상밖의선택이었다.과학적데이터를능가하는것은신의영역이었고,신의영역을엿볼수있는직분은무당밖에없었다.과학으로는도저히밝혀낼수없는불가사의,가오리블랙오션의실종은불가사의에가까웠다.과학문명의위력을무시한채벌어지는불확실성의예측불가능한미래.그미래를내다보는신의눈을가진,신의뜻을전달하는이는무당이제격이었다.
노보의판단과결정에의한것이었겠지만,노보는무당을통해주민들이흥미로워할만한사건을하나꾸미기로작정했다.
(「위대한노보씨」)

그들의눈길을피해선유도를끼고하류로내려갔다.의도적인실종.아이를구하고사라진남자.종적을알수없으니실종이다.
한동안경찰은한강변을샅샅이수색할것이다.내시신을찾기위해서.아무리그래도내가살아있다는걸세상은끝내모를것이다.세상밖으로나가지않는한영영.구급차소리가멀리서들려왔다.
알리바이는확실했다.포장마차에서국수를말아먹고…,여자를따라갔고…,낚시가방은포장마차에있을것이고….낚시가방에서카드전표하나쯤은발견될테고…,내신상은분명히드러날것이다.
이벅찬순간,현에게전화라도해볼까.아니다.그러면실종이아니다.아,그런데휴대폰은?옳지.그렇지.휴대폰이내신상을확실히밝혀주리라.그것또한포장마차에있을테니까.나는완벽한실종자였다.알리바이가확실한채꼬리를감춘실종자.
그래,이여편네야.걸리적거리는남편은이렇게꺼져주마,이여편네야.나는허탈한웃음을흘리며,결투에서쓰러진사내를찾아라스코동굴로향했다.
(「라스코동굴로가는길」)

여름방학이끝나갈무렵,태풍이몰아쳤다.태풍은바닷가는물론,온동네를쑥대밭으로만들었다.언덕의미루나무는꺾어지고쓰러지고,길은파이고끊어져뒤죽박죽이었다.태풍과함께폭우가내린탓이었다.도랑이란도랑은모두망가진채물이넘쳐흘렀다.우물물도넘쳐흘렀다.봄날,맑게반짝이던샘물은자취도없이사라지고시뻘건물이우물통을흘러넘쳤다.동네사람들과해안가군인들이합동하여쓰러진나무를베고망가진길을닦았다.
그런와중에해괴한소문이나돌았다.성희누나를둘러싼소문이었다.동네뒷산대밭에서우체부와누나가붙어먹었단거였다.태풍이몰아치던날밤,대밭에서둘이서손잡고나오는걸보았다는사람도있었다.소문은걷잡을수없이부풀었다.이번에는우체부가아니라건넛마을을성이총각이란말이돌았다.그러더니해안가에근무하는군인이라는말로바뀌었다.뒤이어소문은이상하게흘렀다.몸을더럽힌성희누나는마을에서쫓겨날거라고했다.
(「우물가의삽화」)

얼마나무안해할까,얼마나민망해할까,매몰차게내친다면.리리의심정을헤아리지못하는매정한짓이리라.모든걸감수하고내방을찾아왔으련만.이래저래변명하거나말을돌릴줄모르는리리의일상을보아온나로서는그녀의요구를꺾을방법이없었다.슬픔을이겨내려는그녀만의해법이었으리라.
리리를이성으로대한적은없다지만일이그렇게되고보니적이당황하는쪽은나였다.내게서주체하지못할감정의변화가일었다.리리를성숙한여인으로대하고있는것은아닐까.이혼란스러운상황에온신경이소용돌이쳤다.
어쨌든달라질건없어야한다고.나야나대로잠만몰아자면그만이라고.리리가병아리의죽음을잊을수만있다면.마음을다독이며그녀의심정을헤아리기로했다.그랬다.모르는타인처럼옆에서뒤척이지않는잠만자면그만이었다.설사할머니가그우스꽝스러운광경을지켜본다하더라도부끄럽지않을잠자리를.생각이거기에이르자,근원모를용기가솟았다.
넓지도않은침대에젊은남녀가한이불을뒤집어쓰고있는꼴이란영락없는동침이었다.멀뚱히눈만감고온신경은이불속으로쏠렸다.그런와중에속으로끄윽끄윽삐져나오는웃음이란.이무슨별꼴이란말인가.리리도격없는자기행동을어떻게설명해야할지고민하는듯했다.리리의몸이자근자근뒤척이고있었다.잠적해버린병아리를잊지못해그러는것같았다.
빛이없는어둠의시간은무척이나더뎠다.째깍거리는초침소리가또렷했지만,자정을넘겼을법한괘종시계종소리는좀체들려오지않았다.누구든먼저말을풀어놓아야한다고생각했다.적당한얘깃거리가잡히지않았다.꽃밭이야기도,병아리이야기도,난초에관한이야기도모두가슴아리는일이었다.어설픈말이리리를더욱더슬픔에빠뜨릴것만같았다.눈을감으나뜨나온밤은캄캄하기만한어둠.그때였다.‘쿵’하는천둥소리가터졌다.
(「리리의꽃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