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해방직후역사의미스터리를해명하고시대의전체상을파악하다
한국현대사의본격적출발점,해방직후는자료의태부족과왜곡으로묘연한채수수께끼로남아있었다.굵직한사건들만상식선에서알려져있을뿐,일본패망이후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성립과조선인민공화국(인공)으로의전환,건준의실체와위상,미군정하에서한국민주당(한민당)의권력장악등에관한사정은구체적으로알지못했다.해방직후사에대한설명은공백이거나미스터리로남아있었던것이다.
이책은새로운자료와오랜시간온축한연구성과와역사학자의성찰을바탕으로,1945년해방직후역사의미스터리를해명하고시대의전체상을파악하고자한다.조선총독부,좌익과우익,미군정,그밖의다양한주체들이과연어떻게움직이며현대한국의시작을직조했는지,그생사를건투쟁의드라마가펼쳐진다.
‘치안유지회’를‘건준’으로탈바꿈&한민당계열은사실상건준에참여하지않았다
1945년8월10일~15일,총독부와여운형의협상으로일본은치안유지협력을약속받았고,여운형은총독부에협조하는태도를취하면서정치범석방,식량확보,치안활동의자율성,집회ㆍ결사의자유등‘5개조’의승인을얻어내사실상어느정도의행정권을이양받는다.한민당계열이나중에여운형을‘친일파공산주의자’라고매도한것은총독부와의협상을두고중상모략하는것인데,이는사실건준의발빠른대응과위세에밀려초기의헤게모니를빼앗긴뒤사후적흠집내기에불과했다.총독부는한민당송진우측에도협상을제의했으나송진우는여운형과총독부합작의종전대책이구체화되는데반발하며협상에응하지않았다.오히려여운형측이총독부와의협상과정에서송진우측에연합을제안했지만송진우측은이역시받아들이지않았다.
저자는총독부가애초여운형과의협상을통해‘치안유지회’를의도했지만,여운형이대담하고노련하게‘건국준비위원회’(건준)라는국가건설기구형태로탈바꿈시켰다고평가한다.한민당측은국가건설을준비할수있는역량을갖추지못했을뿐아니라의지도없었다는게저자의생각이다.그들이건준과이후인공(조선인민공화국)을비판하고부정할수밖에없었던이유도바로여기에있다.학계에서는건준이민족통일전선,좌우합작기구로출발했으나좌익의우세와우익의탈퇴로인해위상을잃었다는설명이지배적이었으나,저자는한민당계열이사실상건준에참여하지않았음을밝히고있다.
『1945년해방직후사』는총독부와여운형협상의실제,건준탄생과성립과정에대한“총체적이고종합적인설명”을내놓을뿐아니라,건준과한민당의관계,건준에대한한민당의대응전반에대해설명하고있다.
급조된“임시혁명정부”조선인민공화국
제3차건준조직개편이재건파조선공산당에의해주도되고나서얼마지나지않아건준은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라는“임시혁명정부”로전환되었다.짧은시간에인공으로전환한이유는여운형등건준지도부가미군진주에대비하려는데있었을것이라고저자는말한다.북쪽에진주한소련이인민위원회에행정권을이양하는선례를주목했을수있다는것이다.저자는“낙관적정세관”이빠른시일에인공을수립케했다고본다.다른한편우익의중경임시정부지지에맞대응하기위한방편이었을가능성을타진하기도한다.여운형은임정이많은독립운동단체중하나라고여겼다.그러나인공은재건파조선공산당의성급함과무책임성(이승만ㆍ김구등인사들의명의도용)으로말미암아좌ㆍ우익과미군정모두로부터비판받기에이른다.저자에따르면여운형은이무렵부터해방정국에서의주도권을상실한다.
“아무도아닌자”해군소령조지윌리엄스가한국현대사에끼친심대한영향
1946년1월,미국인의사조지Z.윌리엄스가막귀국하여미국감리교선교단에서연설을했다.그는일개해군소령의무관으로미군정에복무한,지금까지그존재가드러난적이없는“아무도아닌자”다.한국에서단3개월을체류한해군소령은미24군단이인천에상륙할때한국어를유창하게한다는이유하나로주한미군사령관하지중장의비서겸정치고문역할을수행했다.그가한국어를잘할수있었던것은아버지프랭크윌리엄스가감리교선교사로15년간공주에머물렀기때문이다.
윌리엄스는기독교,선교사,연희전문학교인맥을통해한국의인사들과접촉했는데,친미,반공,기독교,연희전문학교라는배경을가진자들이미군정에서권력을획득할수있었던이유이다.한국어가유창하다는이유로우연히하지의비서가된해군소령의무관이자기입맛대로자리를나눠주고권력을불하했다.“윌리엄스가한국현대사에결정적영향을끼치게되는상황과구조는미군진주이후한국현대사가당면한총체적모순과위기를설명하는열쇠다.”
친일파에서친미파로,또다시찾아온천금같은기회
친일파출신한민당인사들에게미군정의무지한인사정책은천금같은기회가되었다.그들은여운형과건준및인공을“친일정권이자공산주의자”로매도하고“자신들은보수적이고친미적이고좋은교육을받은민주주의자,애국자로포장하면서”미군정하에서권력을차지한다.어제까지귀축영미(鬼畜英米)를외쳤던친일파가오늘은친미파가되어또다시한국을장악한것이다.악질적친일파였던이묘묵(보스턴대박사)이하지의공식통역으로발탁되어미군정의‘문고리권력’이된것이대표적사례다.이묘묵은미군정에서체포된일본인고위관리를풀어주는데힘을써주는대가로자신의친일기록을지웠다.이는“한국현대사의결정적순간중의하나였다.”
미군정ㆍ이승만ㆍ한민당의3중주,비밀리에추진된미군정예하의행정부
1943년이래미국의공식적인대한(對韓)정책은미국ㆍ중국ㆍ영국ㆍ소련의합의에의한‘다자간국제신탁통치’(카이로선언)였다.1945년12월예정된모스크바3상회의의주요의제중하나는한반도신탁통치에관한것이었는데,이를주도한것은바로미국정부였다.그런데여기서놀라운사실은미군정이국무부의신탁통치계획을알고있었음에도이를무산시키려했다는점이다.미군정은상급기관인국무부의계획을알면서도따르지않으려했다.저자는미군정이국무부지침을어기고심지어파기시키려한계략이심각한문제가아닐수없었다고진단한다.미군정은정치적중립을지켜야한다는지시도무시하고있었는데,이승만을중심으로한민당과손잡고친임정노선을택했던것이다.즉하지의군정은국무부의‘다자간국제신탁통치’지침을따르지않고미군정예하의행정부또는과도정부를비밀리에출범시키려했다.
미군정은1945년12월에신탁통치결정이내려지기전에독촉중협(독립촉성중앙협의회)을현실화하고자이승만과한민당수뇌부에모스크바에서신탁통치안이논의될것이라는정보를사전에알렸다.이승만을위시하여한민당세력이중심이되어정부를구성하기위한독촉중협에좌파는물론이거니와임시정부계열조차도참여를거부한다.이승만과한민당이임정봉대(奉戴)를내세웠지만사실그들은임정의후광을이용하고자했을뿐,임시정부에권력을내줄생각이전혀없었다고저자는본다.미군정ㆍ이승만ㆍ한민당의3중주였던독촉중협은권력을장악하기위한정치공학이었다.
우리는임시정부계열이1945년말모스크바3상회의이후반탁운동을주도한것으로알고있다.이에대해저자는‘진정한반탁운동’은미군정과이승만그리고한민당이비밀리에추진했다고말한다.물론그들의반탁은민족주의적명분에의한것이아니라,정치적욕망과책략일따름이었다.“한국현대사의운명을좌우한실질적인동력과모멘텀은1945년말반탁운동이아니라미군정초기미군정주도의반탁이었다”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