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차이나는클라스]출연(2024년1월6일방영)
비무장지대(DMZ)의역사를총체적으로다룬‘최초의책’
유엔사(UNC)군사정전위원회자료를발굴하여전면적으로활용한‘첫연구서’
한국전쟁의유산이자,정전체제를지탱하는3개의축
―정전협정비무장지대(DMZ)유엔군사령부(UNC,‘유엔사’)
한반도의전쟁은끝나지않았다.한국전쟁이멈춘지는70년이되었지만,정전협정(문서),비무장지대(공간),유엔군사령부(행위자)는3개의핵심축으로기능하며정전체제를존속시키고있다.우리는이렇게굳어진상태에서어떻게벗어나전쟁을종식시킬수있을까?어떻게해야생산적인남북간의논의를통해평화(그것이어떤형태든)로향할수있을까?
정전체제의변화가능성,즉정전체제의평화체제로의이행가능성은비무장지대라는공간과이공간을탄생시킨정전협정,또유엔군사령부의역사적변화로부터찾을수있다.이셋모두는처음의모습이아니다.정전협정문자체가바뀐것은아니지만,사실상사문화했다.비무장지대는역설적이게도무장지대화했다.유엔사의임무또한미묘하게,하지만크게달라져왔다.이책은비무장지대라는공간을중심으로정전협정이라는제도와유엔사라는행위자의역사적변화를추적하고실상을파악하려는최초의작업이다.이것은분명현재체제의대안을논의하고그논의를현실화하는데중요한참조가될것이다.
DMZ의과거에서알수있는것들
―1960년대의무장화와군사충돌1970년대의화해기류와남북접촉
2018년에이뤄진9,19군사합의이후,남북은DMZ의GP각11개씩을철거하고,향후DMZ내모든GP를철수해실질적비무장화를추진하기로했었다.완충구역을설정하고우발적충돌을방지하자는합의도있었다.2018년남북정상회담을통해채택한‘9월평양공동선언’의부속합의서인군사합의결과나타났던이런움직임이1970년대에있었던비무장지대의비무장화를포함한남북교류움직임의연장선에있다면,2023년말북한의군사정찰위성발사에이어진연쇄적인‘합의파기’와재무장화움직임은마치1950년대말미국이한반도에원자무기를도입하겠다는계획에반발해북한이지하갱도(땅굴)를포함해‘전지역의요새화’에나섰던‘무장화’의연장선상에있다고할수있다.‘DMZ의역사’속에서,남북이경쟁적으로GP무장화에나선이후인1960년대에는한국전쟁이후가장극심한군사충돌이비무장지대에서벌어졌다.9,19군사합의파기이후어떤일들이연쇄적으로이어질지,접경지역의주민들은또얼마나불안에시달리게될지가그려지는이유이다.‘역사는반복된다’는명구(名句)는또한번증명될까?역사학자한모니까는『DMZ의역사』에서“한반도의평화로운미래를위해누가무엇을어떻게해야하는지에대한길”을찾고자했다.놀랍게도그는“우리는이미비무장지대가어떻게평화지대화할수있는지알고있다.”고말한다.1970년대에이미평화지향적인방안들이정부의주도하에검토되었기때문이다.
1953년7월27일국제연합군총사령관과북한군최고사령관및중공인민지원군사령원이한국군사정전에관한협정에서명하고70년이흘렀다.정전이후70년간,한반도의긴장감은높아졌다완화되었다하는일을반복해왔다.국내정치와국제정세의물결에따라DMZ도성격을달리해왔다.이곳은무장화와군사충돌의전장(戰場)이되었다가도,남북사이에훈풍이불면교류와접촉이일어나는만남의공간이되기도했다.평화로향하는발걸음은앞을향하다어느순간멈추어퇴보하곤했다.지금우리는또다시반환점에섰다.하지만이책에서다루고자하는DMZ라는공간또한,역사의산물이자정전협정이라는제도의산물이다.이곳은멈추어있거나고정된공간이아니며,제도를만든/제도가낳은행위자들의인식에따라어느방향으로든움직일수있다.우리가앞날의행위자로서DMZ의역사를알고다음에올무언가를상상해보아야하는이유이다.
이책의제1장에서는비무장지대의탄생을살핀다.시기적으로는1950년10월38선북진이후1950년대후반까지다.비무장지대에관한첫발상과확산,정전회담에서의논의와정전협정조항등을살피고,정전이후제도의이행과균열등을살핀다.
제2장은1960년대비무장지대무장화의핵심내용과과정,사건,그로인한경관의변화등을살핀다.가시화된철책과경계초소(GuardPost,GP),불모지,비가시화된땅굴등을비무장지대의핵심적인냉전경관으로주목하고,형성과정을분석한다.‘경이로운’생태의모습도‘군사생태’(militaryecology)의측면에서살핀다.무장화와사건,경관의변화는남북관계의차원이아니라,베트남전쟁,한,미관계,북,중,소관계의변화,군사와과학의결합등과관련되어있으며이는비무장지대경관원형의형성이라할수있다.
제3장에서는비무장지대의화해와체제경쟁을살핀다.시기적으로는정전이후부터1970년대초까지다.북한,유엔사,남한,중립국감독위원회등이처음으로제안한평화적이용방안들,‘자유’와‘평화’의경쟁과실상등을다룬다.
DMZ의기억하나,
―비무장지대는처음부터늘,그곳에있었다?
DMZ는한반도의중앙부를가르는지리적공간으로서‘분단의상징’이라는인식때문인지,가보기힘든미지의공간이라는비밀스러움때문인지내,외국인을가리지않고관심을많이받는곳이다.생태에관한연구를비롯해DMZ관련연구도양적으로상당히많은편이다.그럼에도,DMZ의‘역사’를다룬연구는찾아보기힘들다.흥미롭게도DMZ를다룬거의모든보고서와논저,안내서등의도입부에는이곳의역사가반드시소개되곤한다.하지만그내용은DMZ가한국전쟁의결과탄생했다는점과정전협정제1조의규정으로인해생겼음을언급하는정도이다.DMZ는처음부터늘그곳에그대로있었던것처럼인식되어왔다.
한반도에DMZ라는공간을두자는생각은누가제일처음떠올렸을까?그런의견을주고받고합의한주체였던이들은어떤논쟁과정을거쳤을까?정전협정문의조문은어떤과정을거쳐확정되었을까?『DMZ의역사』는우선제1장에서DMZ가탄생하게된역사적맥락을다룬다.DMZ의‘탄생’은다음과같이이루어졌다.
누가?영국이다.언제?1950년11월이다.(한국전쟁이1950년6월25일에발발했고,정전협정이1953년7월에야조인되었다는점을보면생각보다이른시기이다.)어디서?영국참모위원회와내각이다.무엇을?영국에서논의된것은‘완충지대’를설치하자는구상이었다.어떻게?유엔의개입을통해관련국들이합의에이르게하자는생각이었다.왜?
영국은‘왜’1950년11월에한반도에완충지대를두어야한다는생각을떠올렸을까.1950년6월25일북·중·소의합의와북한의선공으로한국전쟁전면전이시작되자,전세는빠르게국제전쟁의양상을띠게되었다.직접참전하지않은유럽의국가들도각기남북한을여러형태로지원했다.한반도에서발발한열전(熱戰)은미국과소련을각축으로한냉전의축소판이었다.1950년10월1일,유엔군과국군이38선너머로북진하여북한전역을점령하는승리를눈앞에두고있었을때,중국의참전으로전세는역전되었다.이후의전황은어느한쪽이확실한승기를자신하지못하는상태로이어졌다.비무장지대는이런상황속에서,중국의참전으로‘제3차세계대전’으로의확전을우려한영국측에서전쟁을한반도에국한시키고종전을앞당기기위해내놓은아이디어였다.
한국(남한)입장에서는낯선구상이었지만,한반도DMZ같은‘완충지대’는서방강대국들이영토분쟁이나국경지대의적대행위를종결시키는과정에서이미여러차례실험해본‘해법’이었다.(자세한내용은책의50~52쪽참조)이렇게DMZ의탄생은정전회담장테이블위에올라오기전에이미국제열강들과유엔의각국대표단사이에서공유되고,논의되고있었던것이다.
DMZ의기억둘,
―북한의기습남침용‘땅굴’?
『DMZ의역사』첫머리에서저자는어린시절의기억을소환한다.1970~1980년대,기억속화면에비친DMZ는“하얗게쌓인눈을배경으로조를이룬군인이철책주변을순찰하는모습”으로기억되었다.뉴스는“북한의기습남침에대비하여‘철통같은방비태세’를갖추었다”며강조했다.‘땅굴’소식이대중에게처음전해진것도그무렵이었다.(땅굴은1974년연천에서처음발견되었다.)어렸던그는“좁은땅굴의남쪽출구를막으면”남침용땅굴은무용지물이되는것아닌가하는의문을가졌다.하지만그당시에DMZ는‘무서운’곳이었고,‘갈수있는’곳도아니었다.DMZ는그렇게멀리그러나‘가까이’있었다.
후에역사연구자가되어DMZ를바라보자그의눈에는‘철책’이가장먼저들어왔다.저자한모니까는의문을갖기시작했다.철책은언제왜만들어졌을까?우리는DMZ를얼마나알고있을까?DMZ를만든다는아이디어는누가처음떠올렸고,어떻게만들어졌을까?‘비무장’지대는왜‘비무장’상태가아닐까?
이어지는질문에대한답을찾아갈수록,길지않은한반도DMZ의역사가실에꿰였다.그곳의과거를들여다보자,이런저런사건들이시간과공간을넘어남북한의경계인DMZ에얽혀있는모습이보였다.그는DMZ를분단의구조화와관련된문제로본다.우리는의식하지못하지만,DMZ는1953년7월27일체결된정전협정이실제로적용되고있는공간이다.그리고정전협정을만든,정전협정이규정하는행위자들의인식과정책이펼쳐지는곳이다.그행위자들이대립하는공간이다.정전체제와관련된직접적인문제들이터지는곳이다.우리는‘정전체제’하에있음을,우리가분단국의국민임을,전쟁이아직끝나지않았음을의식하고살아가지않지만,DMZ라는공간은여전히분단의무대이다.냉전이라는배경을두고남북한의드라마가펼쳐지는곳이다.
1974년연천에서처음발견된‘땅굴’은이드라마의복선(伏線)과도같은존재였다.흔히‘땅굴’이라알려진‘비무장지대지하갱도’는현재총4개가발견되었다.(1974년연천,1975년철원,1978년파주,1990년양구에서발견)땅굴의존재는충격적이었다.땅굴이‘무장간첩남파와남침용’으로건설된것이라추정되었고,대중에게도그렇게알려져있었기에더그랬다.그런데땅굴의군사적활용도가중대한데비해,그목적도,만들어진배경도제대로연구된적이없다.땅굴이처음발견된것이1974년이고,베트남전에서‘지하갱도’가활용되었으니북한땅굴이북베트남의영향을받은것은아닐까?하지만『DMZ의역사』에서저자는동유럽(동독과헝가리)의외교문서와군사정전위원회회의록,미국국무부자료등을폭넓게활용해서아주흥미로운사실을밝혀낸다.북한이DMZ에건설한땅굴(지하갱도)은1950년대후반,미국이한반도에원자무기를도입하자그에대한대응책으로서만들어진것이다.(이에대한자세한설명은이책의제2장에서읽어볼수있다.)
DMZ라는공간이어느날갑자기한반도에‘생긴’것이아니듯,땅굴또한그탄생의맥락을좇다보면어느새한국전쟁까지돌아가게된다.한국전쟁때북한은갱도식진지를구축하고주요시설을지하화하여유엔군의폭격에대비한경험이있다.고지전이잇달을당시에는,전선일대에갱도식진지체계가구축되었고평양을비롯해북한각지에는방공호와지하시설이구축되었다.북한은이렇게구축한지하시설을한국전쟁에서유용하게활용했는데,김일성은이를두고1963년5월소련대사에게“바위동굴로첫번째전쟁에서승리했었고,두번째역시그러할것”이라고언급하기도했다.북한은1950년대말,미국이한반도에원자무기를도입할계획을세우자다시한번한국전쟁의경험을살려‘전지역의요새화’에나섰던것이다.
이렇듯북한이한국전쟁때의경험을살려DMZ일대에땅굴을구축해나간것은곧1962년의‘4대군사노선’의채택으로이어졌다.(4대군사노선이란,‘전인민의무장화’,‘전군의간부화’,‘전지역의요새화’,‘전군의현대화’이다.)북한은특히‘전지역의요새화’를통해북한전역에지하갱도를구축해나갔다.DMZ에서발견된땅굴의목적을기습남침용이라는단순한것으로만볼수없는이유이다.북한은한국전쟁때부터쌓아온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