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 슬로우

슬로우 슬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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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등단 20년을 맞은 강성은 시인은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 불가해한 감각과 이미지를 길어 올리며 익숙한 세계를 흔들고 낯설게 해온 시를 꾸준히 써왔다. 이번 시집에서는 그간의 여정을 응축하며,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악몽 같은 현실을 정직하게 응시하면서도 끝내 함께 있으려는 마음을 드러낸다.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단지 조금 이상한』 『Lo-fi』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를 이은 다섯 번째 시집.
저자

강성은

저자:강성은
1973년11월경상북도의성에서태어났다.책과음악이끌어준길을따라오다보니시를쓰게되었고여전히책과음악을좋아하는사람으로살고있다.겨울을좋아하고눈내리는풍경을좋아한다.잠을많이자고꿈을많이꾼다.세계의다양한캐럴음반컬렉션을갖는것이꿈이다.스물일곱,심심해서무작정서울로올라온이후로홍대인근에서십여년째살고있다.2005년문학동네「12월」외5편의시가당선되어등단했으며시집『구두를신고잠이들었다』『단지조금이상한』『Lo-fi』『별일없습니다이따금눈이내리고요』가있다.2015년『더멀리』에단편소설을발표한후느리게소설을쓰고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

소리나는시
미니멀라이프
낮잠
내곁에있어줘
세계가불타는데
KnockingonHeaven’sDoor
피묻은빵
물물교환
세탁실
미친개가온다
과거가없는사람들
재생반복
뭇국의맛
출국
자두가너무많다
불행중다행

2부

별일없습니다이따금눈이내리고요
큐브
소우주
F/W
안녕히가세요
F/W
예외없음
대기실
사람이떨어지는소리
놀이공원
겨울에갇힌한남자에대하여
개를데리고다니는여자
모든것이끝나기라도한것처럼
설명서없음
말년운은말년이되어야알수있다
미귀가
병원
당신집의모든것

3부

혼자사는집
흰냄새가나는식탁
그것
네집으로가
당신은계속멈춰있다
우리는알수없는이유로
태풍의눈
지붕없는집
물속의여름
밤의가시광선
동전의빛
매립지
구덩이
창가의유령
과수원
눈보라

발문
『이토록하염없이반복되는꿈속에서』(황인찬)

출판사 서평

강성은이걸어온스무해의길
멈추어들을수밖에없는깊고넓은음역(音域)의시

강성은의다섯번째시집『슬로우슬로우』가출간됐다.2005년문학동네신인상으로작품활동을시작한지올해로20년을맞은시인은,네권의시집『구두를신고잠이들었다』『단지조금이상한』『Lo-fi』『별일없습니다이따금눈이내리고요』를통해현실과비현실,의식과무의식,불가해한감각과이미지를길어올리며익숙한세계를흔들고낯설게해왔다.세월호참사와문단내성폭력이라는사회적재난을응시하며쓴『Lo-fi』는제26회대산문학상을수상하며“암울하고불안한세계를경쾌하게횡단하며끔찍한세계를투명한언어로번역해낸점”을높이평가받기도했다.

그궤적의연장선에서이번시집은더욱힘있게목소리를낸다.비평가들이지적하였듯그가쓴시를읽는일은“이편의세계에서저편의세계로건너가는일”이아닌“그동안살아오던세계가통째로무너져내리는일”(장은정문학평론가)임을떠올린다.그렇게무너진자리에서다시시작되는목소리,즉“불안과슬픔과불면의밤”에거듭쓰인이야기가“어떤위안과안심과깊은잠의세계”(김나영문학평론가)로우리를이끌것임을의심치않는다.『슬로우슬로우』는그간의여정을응축하며,끊임없이되풀이되는악몽같은현실을정직하게응시하면서도끝내함께있으려는마음을드러낸다.

여름밤선풍기소리
겨울유리창이어는소리
잠의문이열리는소리
밤이흰상복을입는소리

내가열일곱살이었을때
스물이었을때
서른일곱이었을때
다시아홉살마음으로돌아가던소리

시에도소리가있다면
이런것일까

당근을씹는
고요한밤

가만히들어보다가
멈추었다가다시
_「소리나는시」부분

시집의문을두드린다.수록된50편의시에서제각기다른소리가난다.「소리나는시」로시작해「눈보라」에이르기까지,강성은의시는깊고넓은음역(音域)으로연주된다.단순히아름답게만들리는것이아니라흘려들을수없는,반드시귀기울이게만드는소리이다.그것은“꿈을통해현실을끌어올리고,불분명한세계를그불명확성자체로정확하게표현하는것.일견모순되는말처럼여겨지기도하지만이것이야말로강성은의시가가장잘하는일”(황인찬시인,발문에서)이다.

이토록반복되는꿈,참혹한세계의기록

『슬로우슬로우』의시들은반복되는악몽의이미지를거느린다.여름인데눈이내리고,시계가가도내일이오지않는다.나무에매달린과일은영영익지않는다.“공포와불안과절망이제멋대로건반을두드린다”(「큐브」).그세계는불길로가득하다.

어느해에는사람들이
여자들의머리채에불을질렀고
다음해에는여자들이
스스로의머리채에불을질렀다

불은쉽게꺼지지않는다
불은여자들을태우고그다음해에는모두를태웠다
그래도꺼지지않았다

사람들은불에타죽은줄모르고
자꾸만자기머리채에불을질렀다
_「세계가불타는데」부분

여자들의머리채에서시작된불은곧세계전체로번져간다.“세계가불타는데아직도너무춥다”(「세계가불타는데」).「물물교환」에서도“굶은불이겨울내내꺼지지않고”타오른다.「출국」에서도“밀밭과콩밭이산과언덕과계곡과바다가/집들과빌딩과공장과병원이/불타고있”다.

어서오세요
마스크를쓴사람들이줄을서서
천막속으로들어간다
줄은길고기다리던사람들이픽픽쓰러지고

어서오세요
재난과안전이번갈아수신되고

(…)

어서오세요
몸에서물이뚝뚝떨어지고
나는얼음처럼녹는다
_「안녕히가세요」부분

악몽은또다른형태로되돌아온다.재난속에서사람들이쓰러진다.우리삶을휩쓴팬데믹의풍경이겹쳐진다.이제는다지나간심란한꿈일까.다음세계가시작된걸까.그러나시인은본다.“울음이쏟아지기직전의뒷모습”으로약국앞에선사람들을(「낮잠」),“폭격으로가자지구의병원에있던모두가죽었다”는뉴스를(「예외없음」),“사람들이멍하니기계적으로시간을한장씩넘기고있”는장면을(「대기실」),세계의일부가“사라지고나서도세계는사라지지않는다”는것과“잃어버린것은돌아오지않는다”는것을(「모든것이끝나기라도한것처럼」).

악몽의이미지는반복되고변주되며현실을직접지시하거나은유한다.옆사람이무슨일있냐고물어도,전화기너머에서별일없냐는목소리가들려도입을떼기어렵다.별일없다고.아무일도없다고말하는것밖에.그러나이모든악몽이,이모든참사가어떻게우리와무관한일이겠는가.

정직하게응시하는느린시선

이토록참혹한불길을번지지않게하는건멈추지않는기도뿐이다.시인은무거운먹구름을머리에이고천천히걷는다.걷고또걷다가발이사라져무릎으로걷는다.고통의자리를외면하지않는다.“빛같은것이눈같은것이/골목안그늘에서있는아주작은사람위로떨어”지면그것은여자같고눈사람같고사람이아닌것같다.그러나“혼자두고싶지않아서/계속본다/자세히본다”(「창가의유령」).강성은의시는타자를홀로두지않으려는응시로부터출발한다.

반복되는악몽의이미지와기도의언어는“현실개변의불가능성을반증하는슬픈거울”을드러낸다.그럼에도『슬로우슬로우』가남기는아름다운반향은강성은의시가도저(到底)한정직성과정확함을바탕으로하기때문이다.그의시에서꿈은허구의장치가아니라현실의언어가포섭할수없는현실을드러내는통로다.“우리가자각하지못하는현실을가까스로감각하기위해”꿈은개입한다(황인찬시인,발문에서).

그러나아무리세계가끔찍한것이라하더라도,그세계속에서우리가함께할수있다는바람,그마음을손에꼭쥐고놓지않으려는저태도를아름답다고부르지않을수없겠지.자꾸애를쓰는사람,안된다는것을알면서도포기하지않고계속말하는사람,부서지고깨진언어로라도말하고자하는사람,차라리함께참담함속에놓이자고기꺼이말하는사람,이런사람을사랑하지않을수없겠지.우리가강성은의시를,그리고시인을힘껏사랑하는까닭또한거기에있다.
_황인찬시인,발문「이토록하염없이반복되는꿈속에서」부분

우리를함께이도록하는시적환대

『슬로우슬로우』를관통하는움직임은다름아닌‘멈춤’이다.첫시「소리가나는시」의“가만히들어보다가/멈추었다가다시”라는구절은처음부터우리에게귀기울이는법을가르쳐준다.하던일을멈추고자장가처럼내리는눈을듣는순간,시는참았다가터트리는숨처럼긴장과해방의순간을동시에경험하게한다.마지막시「눈보라」는도로한가운데정지한자동차들을그린다.모두가달려가던채로멈추어선장면에서더욱분명해지는것은절망과무력감속에서도우리를함께이도록만드는시적환대다.느림과멈춤은단순한휴지(休止)가아니다.‘없는것’과‘있는것’사이를오가며사라진존재와부재한목소리에귀기울일수있는태도이다.그틈에서기억나지않는많은것들이재생된다.잊힌것들이꿈의궤도를돈다.돌아가신할머니가이방과저방사이를오간다.사라진세계는사라진줄도모르고돌고돌아점이된다.사위가잠든고요한밤,이시집을펼칠사람을위해“노래는사라지지않고입속을맴돌고”(「안녕히가세요」),다음날이면“잠들기전의세계와/눈을뜨고난후의세계가/서로다른방향으로천천히미끄러져간다”(「낮잠」).

도로한가운데자동차들로둘러싸여
앞이보이지않는다

모두달려가던채로
정지해있다

죽은사람에게는자동차가필요없다는생각이문득
가야할곳이있다면그건산사람의일

아무도타지않은자동차들이
가야할곳이있기라도한것처럼

길을잃고서있다
눈보라속에있다
_「눈보라」전문

시인의말

슬로우슬로우
눈내리는소리

여름인데
어쩌지

첫눈오면만나기로한친구들아
녹지말고
죽지도말고
우리여기서만나자

2025년8월
강성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