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설화

죽림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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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마디라도 있어 이만큼 견딜 수 있음을…./원춘호
 


곧은 대나무 위로 소복소복 눈이 내린다. 오랜 땅속 성장을 준비하는 휴면기를 거쳐 지난 늦봄 땅을 뚫고 우후죽순 하늘을 향해 숨 가쁘게 올라온 댓잎 위로 내리는 서설(瑞雪)이다. 세상을 향해 한껏 싹을 틔운 어린 대나무는 처음 보는 눈이 신기하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댓잎과 가지 위로 켜켜이 눈이 쌓인다. 대나무는“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는 않는다”라는 우리의 상식처럼 꼿꼿함 으로 버티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낭만적인 겨울이 대나무에겐 생사를 넘나드는 인고(忍苦)의 시간. 대나무는 밤새 내린 흰 눈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부러진다. 고요와 적막이 감돌던 대숲 사이를 관통하며 십리 밖까지 굉음이 진동한다. 가벼운 눈이 견고하던 대나무를 무너트리는 순간이다.

바람이 분다. 삶은 흔들림의 연속이다. 자의든 타의든 흔들고 흔들린다. 혼자 서있기 힘들어 외로운 영혼들끼리 몸 비비고 의지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굳건하게 땅에 뿌리를 묻고 바람을 여유롭게 즐길 날이 언제 올지..

대숲에 이는 바람이 훑고 지나간 후 눈꽃이 지상을 향해 화려한 추락을 한다. 바람이 대나무에게 전해주는 선물이다. 대나무의 후련함은 아침 햇살 속에서 찬란하고 영롱하게 빛난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정겹다. 바람을 맞이하는 대나무는 땅속으로 연방 굳건한 뿌리를 내리며 흔들림을 즐긴다. 행복이란 기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삶의 기억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고통을 딛고 흔들리며 극복하는 묵묵함 속에서 참된 행복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바람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빛은 누구의 품으로 스며드는지 알 순 없다. 그러나 바람은 알 것만 같다

창백한 그림자가 지배하는 영혼의 시공간

​대숲은 배타적(排他的)인 공간. 청정한 여백 속의 순수한 영혼이 머무는 곳.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을 차단하면서 생기는 그늘과 세속과 분리된듯한 고요가 전부인 이곳에 바람이 공명한다. 어둠이 내리면 잠자리를 찾아 날아드는 새들로 잠깐의 소란을 겪은 후 적막감은 달빛과 함께 새벽까지 이어진다.

아침 햇살이 검은 진공의 공간으로 스며든다. 햇빛마저도 굴절이나 반사를 통해서 들어오는 은밀한 지대. 대나무를 헤집고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새벽녘의 광선은 마디마디 이어지는 검은 선을 흰 선으로 채우며 어둠과 밝음, 직선과 곡선, 움직임과 멈춤을 시시각각 다른 결로 보여준다. 절제된 빛이 흰 선으로 이어지고 쌓여 공간의 율동을 만든다. 비좁고 어둡고 간헐적인 바람의 파장. 어둠과 침묵이 만들어 내는 창조의 시간. 빛은 어둠을 쫓고 어둠은 빛을 쫓는다. 그림자놀이의 시작이다.

인생에는 마디마디의 맺음이 필요한 순간이 타의든 자의든 찾아온다. 군중 속의 고독처럼 감정의 흔들림 없이 나만의 규칙으로 온전히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대나무 숲에서 잠시 길을 잃는다. 완전한 어둠으로 가기 위한 정신의 소멸, 평정심을 배우고 또 비운다.

대나무에게 수평의 삶은 죽음을 의미한다. 죽어도 상실할게 없는 외형의 든든함을 유지한 채 자연으로 서서히 흡수되는 대나무를 본다. 융통성 없는 올곧음은 대나무가 갖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이자 정체성이다. 한곳에 서 있기를 약속하고 중력을 거스리며 하늘을 향해 높이 튀어 올라 그 누구보다 하늘 가까이 고개를 숙이고 평생을 묵묵히 살아가는 대나무는 올봄에도 또 다른 죽순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시간이 역행하는 곳. 대 숲에는 최소의 빛으로 빚어내는 신의 소리, 내면의 울림이 있다. 근원적인 생명력에 대한 경외심이 존재하는 대나무 숲의 이끌림은 언제나 강렬하다. 계곡을 따라 상승하는 기류에 일렁이며 백만 촉광의 빛을 발산하던 그 대나무의 찬란함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저자

원춘호

저자:원춘호
파인아트와다큐멘터리를병행하고있는사진가로그의시그니처라할수있는기와를20여년넘게 담고있다.기와와대나무는지금도계속진행하고있는평생작업이다.서울의5대궁궐을비롯해 사찰,서원등기와가있는곳이면전국을다니며전통을아름다움을현재적으로해석한<천년와(瓦)> 시리즈와기와의해체와수리복원등을다큐멘터리작업으로구분해서기록하고있다.<굴레방연가>,<천년와(瓦)>,<마디마디흰그림자>를비롯하여21회개인전과6권의작품집을발행했다. 케냐나이로비국립박물관,ROTC중앙회,K&L뮤지엄,우란문화재단등에작품이소장되어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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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흔들리는,곧은,마디마디‘흰그림자’

최재목(영남대철학과교수,시인)

흐름,흔들림속으로
바람의‘흐름’은사물의‘흔들림’을낳는다.보이지않는공기가공간속을이동하면서자신이그곳에‘있음’을,사물의움직임으로알려준다.그뒤에빛(=양)과그늘(=음)의따스하거나차가운손길이있다.이런온도의변화는무언가를고요히혹은시끄럽게흔들어준다.어떤움직임은‘시간’의흐름이며,공간의드러남이다.
사물은시간과공간을수직으로또는수평으로초월하는듯하나,끝내그형식내에서떨리고,휘고,떨어지고,휘날리면서,끊임없이드러나고숨는다.드러나는것은‘흰’것이고,숨는것은그‘그림자-그늘’이다.이둘은어떤하나의‘보이면서보이지않는것’이다.하나가드러나면하나는숨는다.흰것은드러나면서어둠으로자신을숨긴다.아니자신을잘드러내기위해서그림자를배경으로놔둔다.
‘흰’것은곧그만큼의강한‘그림자’가있어야한다.스스로가살기위해서는,살아있음을드러내기위해서는,자신을애써지우고감추어야만한다.그강도에따라,한편으로는그만큼살아나고한편으로는또그만큼죽을수있다.‘흰’것은‘그림자’에살고죽는다.‘그림자’는‘흰’것에서살고죽는다.흰것은그림자를통해,그림자는흰것을통해자신을입체화하여존재감을드러낸다.그곳이바로존재가생존,소멸하는‘집’이다.그집에서흰것은그림자로,그림자는흰것으로초월하고또생멸한다.
이처럼예술가는‘보이는것들의보이지않는것’을,‘보이지않는것들의보이는것’을짚어낼운명에처한다.원춘호작가가짊어진사명도이런것이다.작가는대나무를스스로의삶으로끌고들어와,‘흔들리는,곧은,마디마디흰그림자’의은유로표현하고자한다.

흔들리는,곧은,‘흰그림자’
빛과어둠을살리는‘흰그림자’의입체적기법은사실우리문화에숨어있는특별한미학이다.빛과그늘,우리전통의역동적음양론이다.원춘호작가는이런오래된미학에신선한시선으로다가선다.
예컨대시인정지용은‘비’(1941)라는시에서“여울지어/수척한흰물살”이라며,‘여울지어,수척한’그림자를‘흰’것으로생생히살려낸바있다.그냥물살이아닌,바람에밀려여울이진물살을‘수척하다’며어두운듯배경을깔고서,거기에빛이비친‘흰’장면을멋스럽게살려낸다.시인윤동주도‘흰그림자’(1942)라는시에서,“거리모퉁이어둠속으로/소리없이사라지는흰그림자//흰그림자들/연연히사랑하든흰그림자들”이라했다.어둠에몸을감추는어두운듯한그림자를,‘흰’이라는한글자를붙여생명력을부여한다.
‘흰(수척한)물살’,‘흰그림자’는원춘호작가의사진작품속에서도여실히드러나는기법이다.어두움속에흩날리는눈발,그리고빛에비친대나무잎은우리문화의고층(古層)에숨은빛과그늘,그음양의미학을건드린다.
어둠은빛의생명력이다.빛은어둠의소멸이다.빛은어둠으로,어둠은빛으로망명하고초월한다.그러나이둘은끝내서로의시공간을벗어날수없다.상의상존(相依相存)하며,찰나찰나생멸한다.그사이에존재들은희노애락애오욕이란미(美)의집을짓고산다.
어둠이강렬할수록빛도강렬하다.대나무는빛을받아,흔들리는-곧은-마디마디흰그림자를거느리며,생명의문법을살린다.그것은휘고,뒤틀리고,굽고,일어서고,엎치락뒤치락바람에흔들리며차디찬겨울을견딘다.
속이텅빈대나무.마디가없었다면곧부러졌을존재.마디마디로스스로를끊고연결하며,다시연결하며스스로를잘끊는법을알면서생명을얻게되었다.
그텅빈것,마디마디아픈것을바람이흔들고,흔들리는몸이대나무스스로를다시흔들어댈때,바람은시끄럽게침묵한다.그때대나무는대신몸을열어생명의의미를서사한다.

마디마디,이어지고,끊는,생명력
대나무숲은자아를잃어버린무욕의몸놀림이다.그냥그렇게있으면세월이가고바람이멎고멎었던바람이다시분다.그자체로울음이고웃음이며하나의온전한삶의서사이다.원춘호작가는이곳에서대나무로살아가고있다.마디마디,이어지고끊는생명력을안고,흔들리면서무언가를흔들고있다.그렇다.작가는스스로바람에흔들리면서,스스로의흔들림으로관객과세상을흔들고싶은것이다.
기와에주목한작가가시선을대나무로옮긴것은단절이아니라연속이다.기와도마디마디이어져서지붕을만들고,또한붙들어올린땅을담보로하늘을맞이하며세월을견딘다.
대나무또한마디마디이어져,뿌리에서길어올린네모난땅을둥근관으로허공에다,하늘에다다바칠줄안다.이파리도꽃이고,눈보라도꽃이라면이승의온갖무명풍(無明風)도다꽃이다.대나무는그자리에서득도하고,그자리가천국,극락임을증명할듯하다.아마도작가는작품을통해이런이야기를토해내고있으리라.
어둠과빛,그속에서흔들리는,곧은,‘흰그림자’를바라보고있노라면작가의번뇌와고통은슬프면서참아름답다.강렬하게차가운어둠을,절제된흔들림-선-점으로집요하게집중시킨다.그래서바라보는자의시선을후끈달궈준다.그러다가결국관람자자신의내면,그긴통로를따라가서스스로대나무처럼한번살아보라한다.
흔들리는것이어디대나무뿐이랴.온갖생명들이마디마디흔들리며살아가고있지않은가.그삶의어둠이빛이고,빛이곧어둠인허공속을또얼마나잘견디고있는지,작가는우리를시험해보고싶은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