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코리안3세사회학자가쓴
고모,고모부,큰아버지의이야기
이책에서는제주도를떠나일본에서삶의터전을일군네명의생애가소개된다.일제강점기에교사였다가해방후남로당원으로활동했으며4·3사건직전살아남기위해일본으로밀항한둘째고모부이연규,일본으로밀항하다붙잡혀오무라수용소에서생활하던시절을‘재미있었다’고회상하는둘째고모박정희,어린시절목격한4·3사건을똑똑히기억하지만제일괴로웠던일은일본에서식구들이허구한날치고받고다투던일이라고말하는셋째큰아버지박성규,문맹의괴로움때문에아이를낳은뒤야간중학교에다니며공부한뒤,진작에글을알았더라면무조건이혼했을거라말하는넷째고모박준자가그들이다.
4·3생존자이자이방인의어떤인생들
역사는다양한주인공들이나름의방식으로자신의이야기를써나가형성된중층적공간이다.이책에등장하는네명의인물이그려내는4·3사건과일본에서의삶이그러하듯말이다.
일제강점기에제주도에서교사였다가해방후남로당원으로활동하던이연규고모부.1947년3월말에체포되어형무소에있다가4·3사건직전에풀려난다.제주도의좌익들은끝까지투쟁하기위해산(한라산)으로올라갔지만,이연규는“절대로이길리없다고”생각하고살기위해일본행을택한다.50엔남짓의돈과일본에가져가면돈이될만한설탕같은것만조금챙겨서밀항선에오른다.일본에서는암시장에서쌀을팔다경찰에잡혔으나“일본인경찰이가장받아들이기쉬우면서도양심의가책을받을만한서사를지어”내위기에서벗어나는대담한청년이었다.교사시절에“일본제일의교사”를꿈꿨던그는,비록꿈을이루지는못했지만일본으로와서“해방된기분”을누리고있다.(2장)
4·3사건당시13세로제주도에서지내던박정희고모.그녀는당시의비극적사건을단편적으로기억할뿐그일들을‘4·3사건’으로묶어내지는못하고제주도생활을좋았다고만기억한다.일본으로밀항할때도몇번붙잡혀오무라수용소에서지내기도했는데,다다미에앉아서놀고밥도배불리먹을수있어서“퍽재미있고얼마나좋은곳이었는지모른다”고회상한다.하지만오무라수용소는“나치강제수용소의‘동양판’으로서온갖비인간적인억압과학대행위를자행했다”고평가받는곳이다.성인이되어서는옷공장,불고기식당,다방등을운영하며“다른사람보다세배는더일했을거”라고자신의삶을평가한다.(3장)
인터뷰날,스누피자수가박힌옷을입고나온박성규큰아버지는1938년생이다.사람들을줄세워놓고창으로푹푹찌르고총을쏘던장면으로4·3사건을기억하지만,죽는다는게무엇인지도,무섭다는것도잘몰랐다고말한다.마을에남으면죽임당한다는말에어른들과함께산으로들어가이틀밤을지낸뒤집으로돌아온기억도있다.몸집이크고운동을좋아한그는학창시절에사회운동에참여하는등활발히지냈지만돈이없이학업을중단한다.이후는재일코리안1세의전형적인삶을살았다.생계를유지하기위해“금속공장·파친코가게·다방·마작오락실·금융업·산업폐기물처리공장등등재일코리안에게익숙한직종을섭렵했다.(중략)자신이경영하는공장에동생과조카들을고용하고,형으로서막냇동생을보살피고대학에보냈”으며,“셋째였지만장남대신제사를물려받”은집안의중심인물이다.(4장)
1944년일본에서태어난박준자고모는제주도의큰언니집에서어린시절을보냈는데,언니를때리던형부가무서웠다.“발길로콱차고,얼굴을철썩때려.그러면코피가흐르잖아.난울었어.(중략)얼마나무서웠는지,지금도잊을수가없어.”일본으로밀항해서어머니를만났지만다섯살에헤어져6년쯤떨어져지낸탓에얼굴을알아보지못한다.일본인남성과사귀어결혼했다가집안반대로금세헤어지고,“일본에온지10년만에얼굴도모르는남성과”다시결혼한다.일도힘들었지만글자를모르는고통이가장컸다.너무괴로워서죽기위해철로에오른적이있을정도로.결국야간중학교에등록해낮에는일하고밤에공부하며글을배운다.진작에글을알았더라면무조건이혼했을거라고솔직한심정을밝힌다.(5장)
재일코리안3세,여성,사회학자,가족이교차하는자리
저자의이름은‘박사라’다.민족운동을하는재일코리안2세아버지와시민운동을하는일본인어머니사이에서태어났다.초등학교에들어가자마자부모님에게“난어느나라사람이야?”하고물었고,어릴때부터공부를잘했지만“조선인은장관이될수없”으며“계집애라참안됐”다는소리를들으며자랐다.그래서장관은될수없지만“박사라면얼마든지될수있다”고생각하며공부했다.
그녀는왜가족의역사를쓰기로마음먹었을까?처음엔가슴속질문을풀기위해서였다.‘나는왜이곳에서,이런이름으로,이런삶을살아가고있을까?’자신의현재를알기위해가족의과거로들어가야했던것이다.여기에실재에다가가고자하는학문적동기─기억에의해서술이가능해지는역사가있다는믿음─와곧세상을떠날친척들의기억을계승할수없다는안타까움이더해졌다.
저자는“이야기하는것과이야기하지않는것,과거를이해하는방식과과거를떠올리는방식,‘이면’이존재하는이야기와존재하지않는이야기,‘입밖으로꺼낼수없는것’이나‘말할수없는것’”이라는구술의한계를문헌조사와적절한해석으로보충한뒤,이책을여타의생활사와구별되게만드는특별한한가지를더했다.
바로재일코리안3세,여성,사회학자가교차하는독특한자리에서자신의체험을녹여내어가족의역사를썼다는점이다.덕분에사적이면서객관적이고,오직가족구성원만이끄집어낼수있는디테일과정서가담겨있고,학문적이면서도시종일관사랑이흐르는글이탄생할수있었다.완성까지10년이란세월이걸린이책은역사학에속하면서사회학에속하고,동시에자기고백적인에세이의요소도품고있다.
개인의인생이역사가되었을때드러나는진실
“역사속에는내가모르는숱한공백들이있을것이다.패전후오늘날까지로시간을한정하면,식민지에서귀환한일본인이나장애인,피차별부락출신자가살아온전후의세계나지금의세계는내게공백이다.그세계는나의세계와전혀다른세계,즉애당초존재한다는생각조차하지못한세계다.당연하게그세계에서도사람들은살아왔다.그들의과거와현재를살아가고있다.기억속에서과거의다양한경험은서로녹아들어하나가되었고,그들은그경험과더불어살아가고있다.”-286쪽
개인의인생으로쓴역사,다시말해생활사는우리가‘삶의총체성’에다가설수있도록안내한다.하나로묶이지않으며서로모순되는듯보이는인생이야기도,생활사에서는역사의공백들을훌륭하게메워주는오롯한역사이다.
예를들어이책에서투쟁을선택하고산으로들어간이들의눈에이연규는혼자만살자고도망친나약하고이기적인인물로보일테지만,다른시각에서그는자신의삶을명민하게선택하여개척한도전적인인물로도볼수있다.그리고역사적으로굵직한사건중심시각으로보면박정희와박준자는역사의식이없는무지한사람이겠지만,이둘은여성의자리에서더잘포착되는또다른역사를이야기하고있다.이처럼생활사는큰목소리에눌려잘드러나지않는역사적실재를드러나게하여역사를더욱풍부하고완전하게만든다.
왼쪽에선사람과오른쪽에선사람,부자와가난한사람,주류와비주류,남성과여성,다수자와소수자등우리가사는현실에는다양한부류가있다.그리고이모든사람이함께역사를형성해간다.생활사연구를통해이각자가살아내는삶의개연성들이교차하고중첩되면서인간에관한진실이드러날수있다.『가족의역사를씁니다』에서박사라가자신만의매력적인언어로해낸작업이바로그것이다.이책을주춧돌삼아더욱더다양한삶의이야기,더욱더풍부한생활사가써내려지기를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