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북방 디아스포라와 교감하는 서정의 아방가르드”
이방(異邦)과 교감하는 디아스포라의 시인 정철훈의 신작 시집 〈릴리와 들장미〉(도서출판 b)가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중국 동북 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등 북방 국경지대를 떠도는 이민자들의 애환을 심화시키는 동시에 혼혈의 사촌누이 릴리가 살고 있는 중앙아시아의 이국적 풍경을 우리 시로 주체화하려는 고투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의 시선과 성정이 북방의 디아스포라 지역을 택했을 때 특유의 현실 투시와 미학적 갱신이라는 스스로의 요구가 결합된다. 일찍이 아방가르드를 야만 사회에 대한 ‘고통의 미메시스’로 규정했던 아도르노의 규정을 따른다면, 정철훈의 시야말로 ‘서정의 아방가르드’라고 비유해도 무방할 것이다(유성호 평론가). 타자들의 고통에 자발적으로 연루됨으로써 그는 그러한 고통의 미메시스를 구현해내는 실천적 안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정철훈은 우리 시대의 깊은 심저에 있는 북방 디아스포라 공간에서 ‘고통의 미메시스’를 완성해가는 둘도 없는 시인이다.
“너는 나홋카에서 왔다고 했다//눈이 많이 내리고 북해의 파도가 온종일 밀려드는/해안가 통조림 공장에서 일한다고/휴가를 내고 친구를 만나러 왔다고/금이 갈 것 같은 너의 말//너의 말을 주워 들고 입김을 불어줄 때/너는 졸린 듯 하품을 하고//오래전 모국을 떠난 말이/우수리스크 청년회관 앞에서/외국어가 되어 떠돌고 있었다”(「떠도는 말」 일부)
시인은 북방에서 만난 「떠도는 말」과 「세상에 없는 꽃」 등의 시편을 통해 그것이 새로운 고통의 미메시스이자 언어의 기억술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때 그의 언어적 기억술은 자신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상을 바탕으로 하지만, 특별히 가족사와 그 궤적을 같이 하고 있는 우리 민족사의 흐름에 대한 빛이자 빚으로 끝없이 확장되어간다.
무엇보다도 “해방 공간에 비애를 남긴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보다 더한 고독이 감히 정철훈에게 있다.”(고형렬 시인)라고 지적한 추천사에서도 알 수 있듯 이번 시집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세계의 폭력을 절감하고 변방을 못 잊어 찾는 시적 진실에 있다. 백석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나타샤를 호명했다면 정철훈은 릴리를 호명한다. 다만 백석이 현실 도피적인 나타샤를 호명한 것과는 달리 정철훈은 이산가족 상봉으로 처음 만난 이래 3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릴리와 끊임없이 교감하고 소통하면서 구체화한 혈연의 현재진행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풀을 헤치고 묘역 안으로 들어섰을 때 묘비에 새겨진/릴리의 외조부와 외조모의 이름을 처음 보았다/그들에게는 육십 년 전 남한 출신의 망명자에게/시집간 딸을 흙에 묻힌 채 돌려받은 것이었다/(중략)/나는 릴리에게 장미 한 송이 주지 못했지만/그 자리에 들어가 묻히고 싶었다”(「릴리와 들장미」 일부 )
우리는 이번 시집이 디아스포라 흔적이 숨 쉬는 북방에 대한 경험을 반영하는 데 본질이 있음을 말해야 한다. 그 점에서 그의 시는 파인, 백석, 용악 같은, 가장 근원적인 민족사적 기원을 상상했던 선행 시인과 적극적으로 연루된다. 또한 우리는 어떤 정신적 성소(聖所)를 사유하는 정철훈의 시편에 이르러 속악한 평면적 시편을 입체적으로 넘어서는 경험을 한다. 실존적 한계를 돌파하려는 열망, 존재와 역사의 시원을 찾아가는 기억, 이역의 타자를 향한 고통의 연대 등은 정철훈 시가 거둔 득의의 영역일 것이다.
그의 시선과 성정이 북방의 디아스포라 지역을 택했을 때 특유의 현실 투시와 미학적 갱신이라는 스스로의 요구가 결합된다. 일찍이 아방가르드를 야만 사회에 대한 ‘고통의 미메시스’로 규정했던 아도르노의 규정을 따른다면, 정철훈의 시야말로 ‘서정의 아방가르드’라고 비유해도 무방할 것이다(유성호 평론가). 타자들의 고통에 자발적으로 연루됨으로써 그는 그러한 고통의 미메시스를 구현해내는 실천적 안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정철훈은 우리 시대의 깊은 심저에 있는 북방 디아스포라 공간에서 ‘고통의 미메시스’를 완성해가는 둘도 없는 시인이다.
“너는 나홋카에서 왔다고 했다//눈이 많이 내리고 북해의 파도가 온종일 밀려드는/해안가 통조림 공장에서 일한다고/휴가를 내고 친구를 만나러 왔다고/금이 갈 것 같은 너의 말//너의 말을 주워 들고 입김을 불어줄 때/너는 졸린 듯 하품을 하고//오래전 모국을 떠난 말이/우수리스크 청년회관 앞에서/외국어가 되어 떠돌고 있었다”(「떠도는 말」 일부)
시인은 북방에서 만난 「떠도는 말」과 「세상에 없는 꽃」 등의 시편을 통해 그것이 새로운 고통의 미메시스이자 언어의 기억술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때 그의 언어적 기억술은 자신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상을 바탕으로 하지만, 특별히 가족사와 그 궤적을 같이 하고 있는 우리 민족사의 흐름에 대한 빛이자 빚으로 끝없이 확장되어간다.
무엇보다도 “해방 공간에 비애를 남긴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보다 더한 고독이 감히 정철훈에게 있다.”(고형렬 시인)라고 지적한 추천사에서도 알 수 있듯 이번 시집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세계의 폭력을 절감하고 변방을 못 잊어 찾는 시적 진실에 있다. 백석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나타샤를 호명했다면 정철훈은 릴리를 호명한다. 다만 백석이 현실 도피적인 나타샤를 호명한 것과는 달리 정철훈은 이산가족 상봉으로 처음 만난 이래 3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릴리와 끊임없이 교감하고 소통하면서 구체화한 혈연의 현재진행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풀을 헤치고 묘역 안으로 들어섰을 때 묘비에 새겨진/릴리의 외조부와 외조모의 이름을 처음 보았다/그들에게는 육십 년 전 남한 출신의 망명자에게/시집간 딸을 흙에 묻힌 채 돌려받은 것이었다/(중략)/나는 릴리에게 장미 한 송이 주지 못했지만/그 자리에 들어가 묻히고 싶었다”(「릴리와 들장미」 일부 )
우리는 이번 시집이 디아스포라 흔적이 숨 쉬는 북방에 대한 경험을 반영하는 데 본질이 있음을 말해야 한다. 그 점에서 그의 시는 파인, 백석, 용악 같은, 가장 근원적인 민족사적 기원을 상상했던 선행 시인과 적극적으로 연루된다. 또한 우리는 어떤 정신적 성소(聖所)를 사유하는 정철훈의 시편에 이르러 속악한 평면적 시편을 입체적으로 넘어서는 경험을 한다. 실존적 한계를 돌파하려는 열망, 존재와 역사의 시원을 찾아가는 기억, 이역의 타자를 향한 고통의 연대 등은 정철훈 시가 거둔 득의의 영역일 것이다.
릴리와 들장미 - b판시선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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