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와 들장미 - b판시선 66

릴리와 들장미 - b판시선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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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북방 디아스포라와 교감하는 서정의 아방가르드”
이방(異邦)과 교감하는 디아스포라의 시인 정철훈의 신작 시집 〈릴리와 들장미〉(도서출판 b)가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은 중국 동북 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등 북방 국경지대를 떠도는 이민자들의 애환을 심화시키는 동시에 혼혈의 사촌누이 릴리가 살고 있는 중앙아시아의 이국적 풍경을 우리 시로 주체화하려는 고투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의 시선과 성정이 북방의 디아스포라 지역을 택했을 때 특유의 현실 투시와 미학적 갱신이라는 스스로의 요구가 결합된다. 일찍이 아방가르드를 야만 사회에 대한 ‘고통의 미메시스’로 규정했던 아도르노의 규정을 따른다면, 정철훈의 시야말로 ‘서정의 아방가르드’라고 비유해도 무방할 것이다(유성호 평론가). 타자들의 고통에 자발적으로 연루됨으로써 그는 그러한 고통의 미메시스를 구현해내는 실천적 안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정철훈은 우리 시대의 깊은 심저에 있는 북방 디아스포라 공간에서 ‘고통의 미메시스’를 완성해가는 둘도 없는 시인이다.

“너는 나홋카에서 왔다고 했다//눈이 많이 내리고 북해의 파도가 온종일 밀려드는/해안가 통조림 공장에서 일한다고/휴가를 내고 친구를 만나러 왔다고/금이 갈 것 같은 너의 말//너의 말을 주워 들고 입김을 불어줄 때/너는 졸린 듯 하품을 하고//오래전 모국을 떠난 말이/우수리스크 청년회관 앞에서/외국어가 되어 떠돌고 있었다”(「떠도는 말」 일부)

시인은 북방에서 만난 「떠도는 말」과 「세상에 없는 꽃」 등의 시편을 통해 그것이 새로운 고통의 미메시스이자 언어의 기억술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때 그의 언어적 기억술은 자신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상을 바탕으로 하지만, 특별히 가족사와 그 궤적을 같이 하고 있는 우리 민족사의 흐름에 대한 빛이자 빚으로 끝없이 확장되어간다.
무엇보다도 “해방 공간에 비애를 남긴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보다 더한 고독이 감히 정철훈에게 있다.”(고형렬 시인)라고 지적한 추천사에서도 알 수 있듯 이번 시집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세계의 폭력을 절감하고 변방을 못 잊어 찾는 시적 진실에 있다. 백석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나타샤를 호명했다면 정철훈은 릴리를 호명한다. 다만 백석이 현실 도피적인 나타샤를 호명한 것과는 달리 정철훈은 이산가족 상봉으로 처음 만난 이래 3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릴리와 끊임없이 교감하고 소통하면서 구체화한 혈연의 현재진행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풀을 헤치고 묘역 안으로 들어섰을 때 묘비에 새겨진/릴리의 외조부와 외조모의 이름을 처음 보았다/그들에게는 육십 년 전 남한 출신의 망명자에게/시집간 딸을 흙에 묻힌 채 돌려받은 것이었다/(중략)/나는 릴리에게 장미 한 송이 주지 못했지만/그 자리에 들어가 묻히고 싶었다”(「릴리와 들장미」 일부 )

우리는 이번 시집이 디아스포라 흔적이 숨 쉬는 북방에 대한 경험을 반영하는 데 본질이 있음을 말해야 한다. 그 점에서 그의 시는 파인, 백석, 용악 같은, 가장 근원적인 민족사적 기원을 상상했던 선행 시인과 적극적으로 연루된다. 또한 우리는 어떤 정신적 성소(聖所)를 사유하는 정철훈의 시편에 이르러 속악한 평면적 시편을 입체적으로 넘어서는 경험을 한다. 실존적 한계를 돌파하려는 열망, 존재와 역사의 시원을 찾아가는 기억, 이역의 타자를 향한 고통의 연대 등은 정철훈 시가 거둔 득의의 영역일 것이다.
저자

정철훈

저자:정철훈

시인.러시아외무성외교아카데미역사학박사.1997년<창작과비평>에<백야>외5편의시를발표하며작품활동시작.시집<살고싶은아침><내졸음에도사랑은떠도느냐><개같은신념><뻬쩨르부르그로가는마지막열차><빛나는단도><만주만리><가만히깨어나혼자><어떤말이공기에스미면>,장편소설<인간의악보><카인의정원><소설김알렉산드라><모든복은소년에게>,산문집<소련은살아있다><옐찐과21세기러시아><뒤집어져야문학이다><감각의연금술><문학아,밖에나가서다시얼어오렴아>,전기<김알렉산드라평전><내가만난손창섭><오빠이상누이옥희><백석을찾아서><알렉산드라페트로브나김><북한영화의대부정준채평전>등이있다.

목차

ㅣ시인의말ㅣ5

제1부떠도는말
떠도는말13
우수리스크역에서16
몰락의환희18
재와화염20
수족관앞에서21
유년의집22
흐느낌의방위24
식당칸에서25
신문열람실26
불완전한신28
콧잔등을씰룩30
고드름의질문32
물과수증기로만들어진사람33

제2부실개천은잠시빛나는얼굴을보여주고
하얀김이피어오르는집37
실개천은잠시빛나는얼굴을보여주고38
저만치이사벨라버드비숍의기척이40
왜왔냐고묻는다면42
폐허의꽃44
손가락을자른마을에와서46
하산풍경47
태양의그림자48
노인과지팡이49
부서진육체50
밥보다신발52
변신54
고장난시계55
밀사의심정이되어56
차창에기대어안부를58

제3부이민자의생선국
나목은알고있다63
이민자의생선국64
집시여인의보따리와속물들66
싸구려여관에서68
막막함의획득70
시베리아이민사를듣는밤72
욕조의노래74
아무르강검은눈동자76
몸속의돌78
사진과병사80
빈호주머니의사랑노래83

제4부릴리와들장미
피오네르의집87
릴리와들장미88
휘파람새의노래90
아홉개의피가섞인시92
시간의뼈를찍는뢴트겐94
알마티의아이들96
바지주름을잡으며98
태양의독경100
초원의길102
횡단에대하여104
파란눈의매제알레그106
건널목지기베리크씨108
무슬림마을아쉽사이를지나며111
내말좀들어봐요112
화단에쪼그리고앉아114
릴리의사랑117
가방을꾸리며118
너덜거리는말의망토를걸치고119

ㅣ해설ㅣ유성호121

출판사 서평

“너는나홋카에서왔다고했다//눈이많이내리고북해의파도가온종일밀려드는/해안가통조림공장에서일한다고/휴가를내고친구를만나러왔다고/금이갈것같은너의말//너의말을주워들고입김을불어줄때/너는졸린듯하품을하고//오래전모국을떠난말이/우수리스크청년회관앞에서/외국어가되어떠돌고있었다”(「떠도는말」일부)

시인은북방에서만난「떠도는말」과「세상에없는꽃」등의시편을통해그것이새로운고통의미메시스이자언어의기억술이라는점을우리에게선명하게보여준다.이때그의언어적기억술은자신이살아온날들에대한회상을바탕으로하지만,특별히가족사와그궤적을같이하고있는우리민족사의흐름에대한빛이자빚으로끝없이확장되어간다.
무엇보다도“해방공간에비애를남긴백석의「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보다더한고독이감히정철훈에게있다.”(고형렬시인)라고지적한추천사에서도알수있듯이번시집의궁극적인지향점은세계의폭력을절감하고변방을못잊어찾는시적진실에있다.백석이「나와나타샤와흰당나귀」에서나타샤를호명했다면정철훈은릴리를호명한다.다만백석이현실도피적인나타샤를호명한것과는달리정철훈은이산가족상봉으로처음만난이래30여년이라는긴세월동안릴리와끊임없이교감하고소통하면서구체화한혈연의현재진행형을생생하게보여준다.

“풀을헤치고묘역안으로들어섰을때묘비에새겨진/릴리의외조부와외조모의이름을처음보았다/그들에게는육십년전남한출신의망명자에게/시집간딸을흙에묻힌채돌려받은것이었다/(중략)/나는릴리에게장미한송이주지못했지만/그자리에들어가묻히고싶었다”(「릴리와들장미」일부)

우리는이번시집이디아스포라흔적이숨쉬는북방에대한경험을반영하는데본질이있음을말해야한다.그점에서그의시는파인,백석,용악같은,가장근원적인민족사적기원을상상했던선행시인과적극적으로연루된다.또한우리는어떤정신적성소(聖所)를사유하는정철훈의시편에이르러속악한평면적시편을입체적으로넘어서는경험을한다.실존적한계를돌파하려는열망,존재와역사의시원을찾아가는기억,이역의타자를향한고통의연대등은정철훈시가거둔득의의영역일것이다.

작가의말

나는이민자는아니지만어쩌다가심정적이민자가되었다.비록한나라에붙박여살고있지만,이시대에조국이나모국,혹은모국어에대한개념은매우느슨하다.차라리어느후미진선술집,성에낀유리창의낙서들이더조국처럼느껴진다.여기묶인시편들은그유리창에쓴순간적인감흥에가깝다.쓰자마자눈물처럼흘러내리는문자의환희혹은존재들의혼절.
결말이불확실한긴여정끝에카자흐스탄알마티에살고있는혼혈의사촌누이릴리의손을쥐었을때의감동은잊을수없다.릴리를처음만난것은1989년3월싱가포르창이공항입국장이었다.그때는소연방이었던카자흐스탄과국교수립이전이어서제3국에서이산가족상봉을해야했다.나는아버지를모시고싱가포르에도착했고이튿날창이공항으로마중을나갔다.전광판에소련국적아에로플로트의도착을알리는불이깜박였고처음보는중부仲父가아버지에게다가와얼굴을만지며부둥켜안았다.
피부를통해서라도서로의살아있음을확인하고싶은접촉의마법뒤에혼혈의처녀가파란눈을말똥거리며서있었다.그로부터30여년의세월이흘렀고나는여러차례알마티를방문했으며그때마다내곁엔릴리가있었다.나는릴리를통해혼혈과이주,망명과불귀의삶에대해알게되었다.이시집을릴리와릴리를닮은혼혈의후손들에게바친다.

책속에서

〈실개천은잠시빛나는얼굴을보여주고〉

한인최초의이주민촌락지신허로들어가는뚝방길
중국어로계심하鷄心河로쓰고티진헤로읽는곳
사설경비실이들어서있고목줄에매인개가날뛰며짖었다
개짖는소리를듣고경비실에서나온
더벅머리러시아인이사냥총을만지작거리며말했다

여긴개인소유의땅이니어서돌아가시오
언제부터그리됐습니까?
일년정도됐소
가끔관광객들이찾아오지않소?
오긴오지요마는땅주인이절대출입시키지말라했시다

더벅머리는손사래를치고
하천에서물을길어다먹는지플라스틱물통에
바가지가떠있었다
개짖는소리에묻히는한인이주사
이젠지신허도밟지못하는땅이되었다

경비실너머억새밭아래실개천
그물을먹고자라난나무와풀꽃하나하나에
신이깃들어있는데더는가지못하는지신허들판에서
잠시빛나는얼굴을보여준실개천에게
작별인사를하고돌아서며
정처없는발길을돌릴때
개짖는소리가등짝에붙어떨어지지않았다

〈이민자의생선국〉

날은저물고진눈깨비가털모자에
쌀알처럼떨어지는날은
어서폴란드이민자의민박으로가자
가서폴란드식생선국을마시자

주인집노파의눈동자에전쟁때죽은
아들의사진이비치고페치카장작이액자의유리에서불탈때
아들이좋아했다는생선국은뼈가녹아서하나도없다
아들이녹아있는생선국

아무도기다리지않은밤은오고
노파는아들의전사통지서를보여주며
내가죽은아들을닮았다고했다
나는한그릇을더청해먹으며밤새
노파의아들이되어주었다
생선국을세그릇이나비우며트림을하면서

죽음은어디에나있고
그렇게되지않았어야할일들은
반드시그렇게되고

〈릴리와들장미〉

알마티시립공동묘지입구에서
조화를사들고오솔길을걸어갔다
그방향이내가사는세상에서가장먼곳이었다
울타리에둘러싸인묘지에나무십자가가세워져있었다
“어머니는여기가족묘지에묻혔어”
릴리는무덤주위에들장미를심었다
국경너머에들장미가핀다면
그게모두릴리가심은들장미같았다
풀을헤치고묘역안으로들어섰을때묘비에새겨진
릴리의외조부와외조모의이름을처음보았다
그들에게는육십년전남한출신의망명자에게
시집간딸을흙에묻힌채돌려받은것이었다
릴리는어머니에대한모든것을떠올리려는듯
걸레에물에적셔묵묵히묘비를닦았다
들장미는아직꽃을피우지않았지만
딸이흙으로돌아온것만으로도꽃을피운것같았다
한사람이더들어갈수있는가장자리에도
들장미가심겨있었다
나는릴리에게장미한송이주지못했지만
그자리에들어가묻히고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