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이이어지는동안국가는사람들에게이렇게명령했다.“자택에머무십시오.”
이명령에는적어도두가지사실이전제되어있다.하나는모두에게자택이,즉격리가능한공간이있다는것,다른하나는모두에게가족이,즉자가격리를하더라도돌봐줄누군가가있다는것이다(자택은누구의공간인가?바로가족의공간이다).이런명령에가족구성원들이전업주부처럼집안에머물지않는다는사실은고려되지않았다.가족이돌봄은커녕폭력을휘두를수있다는사실도.그렇다면가족이없는이들은?그들은정책에존재하지도않는유령이다.그리하여봉쇄의시대에많은이들이끔찍한가족과같이지내는것보다더나쁜운명을맞닥뜨렸으니,자신을돌봐줄사람이없어식료품,약,생필품등을전부배달주문하고,그것이여의치않은환경에있는이들(배달비를낼여력이없을수도,소도시에거주할수도,홈리스일수도있다)은홀로앓았다.팬데믹은사회가돌봄을사적책임으로밀어넣은결과를,즉돌봄이부재하다시피취약해진모습을비참할정도로선명하게보여주었다.
그런데,그렇다고해서가족을폐지하자고?
이말은어떤반응을끌어내기도전에사고를정지시킬지모른다.가족은마치우리가숨쉬는공기처럼자연스럽게존재하(는것처럼보이)며,주택정책·의료·교육·유서·법원·연금등가족제도를유지시키는기술이어디에나포진해있다.가족은(온갖재난서사가보여주듯이)다른모든게무너져내렸을때우리가기댈수있는유일한안식처라는꿈에둘러싸여있는장소다.한편으로그곳에서는은밀한학대와성폭력과갈취가가해지며,로맨틱한(물론이성애규범적인)환상이아직그늘을드리우고있는장소이자,공공연한계급결합이이루어지는장소다.이다층적인의미만큼이나가족을둘러싼담론은걷어차일만큼많고(그만큼)단단하다.이런상황에서가족이폐지할수있는무언가라고는생각하기어렵고,폐지될수있는것인지조차의심스럽게만든다.
분명‘가족을폐지하라’는말이어떤부분에서는,가령혈연공동체가중요한역할을했던(할수밖에없었던)유색인종의역사에서,혹은가족구성권을요구하는퀴어공동체에게,혹은시리아나예멘,아프가니스탄에있는혈육과생이별을하고서난민캠프에서지내는이들에게는기상천외한헛소리로들릴지도모른다.어떤이들은가족폐지보다는확대가족이나대안가족을요구하는게더나을거라고말할것이다.가족을아예폐지하자는주장은너무위험하고,전략적이지도못하고,(부정적인의미에서)유토피아적일뿐이라고지적하면서.
여기서《가족을폐지하라》는‘우리가폐지하기를주장하는가족은백인-부르주아-핵가족이라고!’같은식으로구구절절설명하는쪽을택하지않는다.규범적인텍스트에서훌쩍떨어져서있는이책은,수많은반론들에다시수많은반론들로맞서지도않는다.백인지배계급과흑인프롤레타리아의가족관계가어떻게다른지파고들면서(2장),또유토피아적사회주의자들에서부터21세기트랜스마르크스주의자들에이르기까지가족폐지론의역사를빠르게조망하면서(3장)‘가족’이부르주아경제의축소판임을,그것이근본적으로우리사회가돌봄을사적인문제로치부한다는것을내포한단어임을날카롭게지적한다.그리고이렇게질문을되돌린다.가족을폐지하지않을이유가있는지.
누군가는이렇게물을것이다.그럼가족말고다른어떤대안이있느냐고.우리모두알다시피,의료노동자들과돌봄노동자들은기진맥진한채나가떨어지지않았느냐고.이는사실상질문이아니라대안따위는존재하지않는다는단언이다.돌봄시설이문을닫을때,오갈데없는노인들은어디로가야하는가?아이들은?환자들은?가족이없으면누가,(혹은)무엇이이들의삶을책임지겠는가?아무도,아무것도없다.따라서이런식의질문은나쁜질문이다.우리는비인간동물이동물원밖에서지내는게더낫다고말하는데주저함이없다.아무리대안적인서식지가희소해지고,심지어동물들이동물원의잔혹한환경에익숙해졌다해도말이다.마찬가지로가족에서벗어나,가족이아닌다른대안을세우는건결코쉬운일이아니다.하지만가족이유일한해결책인세상에서살아가는것,아니,가족이유일한해결책으로서의역할도잃은세상에서살아가는것역시고통스러운일이다.우리는좀더나은삶이어떻게세워져야하는지질문할수있고,상상할수있(어야한)다.
그리고그좀더나은삶이“확장된”,“확대된”,“혈연과무관한”온갖대안적인가족이있는자리가아니라가족이없는자리,그것이아예무너진자리에있을거라고상상해볼수는없을까.가족이빠져나간자리에놓을다른무언가를상상하는대신에,아무것도없음을상상해볼수는없을까?《가족을폐지하라》는바로그런사고실험이자,혁명적제안이며,선언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