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벼랑’을 짊어진 시인이 걸어온 길
김종해 시인의 새 시집 『서로 사랑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죽음과 죽음의 임박과 죽은 이들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일견 평이해 보이는 듯한 언술들로 구성된, 일상의 평범한 일들을 시에 끌어들이는 듯한, 무신경을 가장한 시들이,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기운을 내장하고 있다. 이 시집에서는, 죽은 이들, 그것도 그냥 일가 사람들, 지인들은 아니고, 문학사 속에서 이름을 접할 수 있는 시인들의 이름들이 발견된다. 김광림(「외출」), 최하림(「섬에서 최하림 시인을 만났다」), 이어령(「봄이여 무심하구나─이어령 선생님을 그리며」, 「알람을 껐다」), 박목월(「따뜻한 지폐」), 조지훈, 박남수(「한 마리의 새, 이민을 가다」) 등이다. 이런 인연은 시인의 성장이나 성숙, 그리고 문제의식 벼리기에 더없이 중요한 것이다. 의미 있는 문학인을 직접 만나는 것, 인간을 느끼고 대화 나누는 것, 문학적 질문의 심층에 도달하는 것, 이런 것들을 체험적으로 터득한 것이다.
김종해 시인은 이전의 작품에서 서울의 질병적 상태에 대한 화자의 ‘경악’에 가까운 환멸을 표현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적 충격을 딛고 구원에 다다르고자 하는 완강한 의지 또한 표현한 적 있다. 김종해 시인이 어둡고 추운 ‘서울’의 현실에서 길을 찾아 뜨겁게 살아가던 시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서울의 봄날’은 아직도 ‘캄캄하다.’(「서울이 캄캄하다」) 하지만 객관적인 현실 그 자체란 없으며 그것은 언제나 그것을 대하는 사람에 의해 해석되고 이해된 어떤 것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집을 통해서 보는 김종해 시인의 현실은 이제 연행되는 지식인, 학생과 검열로 얼룩진 그런 것은 아니다. ‘서민 대중’의 삶은 그의 심중 깊은 곳에 아직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겠지만, 그는 이제 그런 것을 고통스러워하며 대담과 논쟁과 질문의 주제로 올리는 대신 그런 어둠, 고통을 내장한 세계에 자신이 찾아왔고 이제는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응시하고자 한다.
삶에 대한 원숙한 통찰, 따스하고 아름다운 서정의 함축미
“서로 사랑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서로 사랑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깨달음,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느낌, 삶의 일상에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 간단없이 찾아오는 떠난 이들의 기억, 노쇠해 가면서 외롭게 되는 것, 피붙이들이 주는 작은 기쁨들, 이런 것들 속에서 김종해 시인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나’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무엇을 생각하고 노래해야 하는가를, 편안해지고 순치된 것 같은 포즈 아래 여전히 예민함을 잃지 않는 감각, 느낌으로 묻고자 한다.
나이 팔순을 지나가니까
풀이 문득 보인다
풀이 보이니까 바람마저 보인다
풀 앞에 서면 나도 말을 버린다
말을 잊고 사는 것은 풀만이 아니다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풀은 일생을 살아간다
풀의 말을 해석하지 못하므로
나는 외롭다
말을 버린 풀처럼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나는 필생畢生으로 온몸을 편다
풀이 흔들린다
─「풀 앞에 서서」 전문
이 시를 쓰면서 그가 김수영 시인의 「풀」을 의식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김수영의 「풀」을 생각하며, 시인이 이 「풀」과의 거리를 어떻게 의식하며 자신의 ‘풀’을 노래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김수영의 ‘풀’은 민중적인, 서민적인 전통적인 의미를 내장하면서도 그보다는 훨씬 더 바람과 풀의 존재론적인 호응과 존재론적 삶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김종해 시인의 ‘풀’이라고 할 「풀 앞에 서서」에서 화자는 자기 자신이, ‘나’ 자신이 ‘풀’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나’ 자신 또한 ‘풀’처럼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필생畢生으로 온몸을’ 펴는, ‘풀’과 같은 존재, 바로 그것이다. ‘필생’을 ‘서울’의, “현실”의 어둠에 맞서 거세게 헤쳐나오며, ‘항해’를 하며 살아온 그였건만, ‘나이 팔순’에 다다라 보니 이제 ‘풀’이 보이고 ‘풀’을 나부끼게 하는 ‘바람’이 보인다. ‘말’을 버린 ‘풀’의 ‘일생’이 보인다. 침묵 속에서 ‘흔들리는’ ‘풀’처럼 ‘나’ 또한 ‘말’을 잊고 하나의 존재로서의 자신의 삶을 생각하며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김종해 시인은 또 다른 곳에서 ‘풀’을 이렇게도 노래한다.
풀잎끼리도 말을 한다
풀잎끼리 서로 지껄이는 조그만 귀엣말
내가 풀잎이 되어야
겨우 알아듣게 되는 저 풀잎의 말
서로 사랑하는 모든 존재는 흔들린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살아 있는 것은
서로 사랑하니까 흔들린다
풀잎의 옷을 비껴 입고
제 몸의 가녀린 무게를 실은 뒤
바람에 몸을 맡기는
저 작은 생명의 귀엣말을
나는 풀잎이 되어 엿듣는다
─「풀잎끼리도 사랑하니까 흔들린다」 전문
이 시에서도 ‘나’는 이제 ‘풀잎’이 되어 있다. 여기서 ‘풀잎’은 하나하나의 생명적 존재를 가리키는 ‘대명사’ 또는 ‘집합명사’가 되어 있다. 이 존재들로 하여금 서로 호응하게 하고 의지하게 해주는 것, 그것의 동인動因은 바로 ‘사랑’이다. “내가 풀잎이 되어야 / 겨우 알아듣게 되는 저 풀잎의 말”,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모든 존재는 흔들린다”는 ‘진리’다. 모든 문학적 질문의 정답, 해답은 ‘사랑’에 있는 것을, 김종해 시인의 시적 화자는 ‘팔순’ 즈음에 다다라 이제 명료하게 인식한다. ‘서울’의 영원한 타향인으로 어둠 속 ‘현실’을 필사적인 항해의 거스름으로 헤쳐나온 그는 이제 죽음이 보이는 삶의 국면에 다다라 있음을 느끼며, ‘사랑’이라는 삶의 기적, 모든 문학적 질문의 정답, 해답을 찾아낸다. 이렇게 되면 이제 투쟁하는 아우성의 현장과는 다른 삶의 국면이라 해도 그 삶의 ‘일상’들은 단순한 ‘일상’이 아니다.
아침에 잠을 깨니
유리창에 빗방울이 가득 맺혀 있다
밤사이 하늘이 써서 보낸 기별을
나는 놓쳤다
하늘은 아직 어둡고
바람은 유리창에 제 모습을 적어 놓지 않았다
사람 살아가는 일 다 그렇지
단순하지
비가 오니까
오늘 아침 나는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설 것이다
일상 속에서 일상의 바람에 부대끼며
오늘 내린 빗방울에
조금은 옷자락이 젖을 것이다
젖는 일마저
나는 편안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오늘은 비」 전문
이 시에 등장하는 ‘비’는 단순한 비가 아니라 저 앞의 시들에서 ‘풀’로서, ‘풀잎’으로서 자신을 의식하는 ‘나’의 ‘옷자락’을 적시는 ‘비’인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존재’의 ‘일상’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비’, 바로 그것이다. 오랜 시간을 위태로울 만큼 뜨거운 내부를 끌어안고 ‘걸어온’ 시인은 죽음이 어른거리는 삶의 국면을 의식한다. 삶은 이제 죽음에 가까워졌고, 그 얇아진 경계만큼 삶의 ‘현실’은 이제 ‘사회’의 그것보다 ‘자연’으로서의 그것 자체가 된다. “절벽을 마주 서 본 사람의 결기”(「길 위에서」)를 접는다. “눈송이를 이고 하늘로 오”르는 ‘바람’을 ‘보며’ “각을 세운 세상”과는 다른 쪽으로 가던 「눈송이는 나의 각角을 지운다」(『눈송이는 나의 각을 지운다』, 문학세계사, 2013, 36쪽)의 ‘나’를 거쳐, 이제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가 된다. “오늘 내린 빗방울에” “조금은 옷자락이 젖을 것”이고, ‘나’는 바로 ‘풀’이고 ‘풀잎’이기 때문에 ‘젖는 일마저’ “편안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자연적 존재 바로 그것으로써 하루하루를 살고, 서귀포든, 신안이든, 블라디보스톡이든 떠나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홀로, 차오르는 죽음의 기운을, 그리하여 오늘 살아 있는 삶의 의미를 받아들일 것이다.
김종해 시인의 새 시집 『서로 사랑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죽음과 죽음의 임박과 죽은 이들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일견 평이해 보이는 듯한 언술들로 구성된, 일상의 평범한 일들을 시에 끌어들이는 듯한, 무신경을 가장한 시들이,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기운을 내장하고 있다. 이 시집에서는, 죽은 이들, 그것도 그냥 일가 사람들, 지인들은 아니고, 문학사 속에서 이름을 접할 수 있는 시인들의 이름들이 발견된다. 김광림(「외출」), 최하림(「섬에서 최하림 시인을 만났다」), 이어령(「봄이여 무심하구나─이어령 선생님을 그리며」, 「알람을 껐다」), 박목월(「따뜻한 지폐」), 조지훈, 박남수(「한 마리의 새, 이민을 가다」) 등이다. 이런 인연은 시인의 성장이나 성숙, 그리고 문제의식 벼리기에 더없이 중요한 것이다. 의미 있는 문학인을 직접 만나는 것, 인간을 느끼고 대화 나누는 것, 문학적 질문의 심층에 도달하는 것, 이런 것들을 체험적으로 터득한 것이다.
김종해 시인은 이전의 작품에서 서울의 질병적 상태에 대한 화자의 ‘경악’에 가까운 환멸을 표현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적 충격을 딛고 구원에 다다르고자 하는 완강한 의지 또한 표현한 적 있다. 김종해 시인이 어둡고 추운 ‘서울’의 현실에서 길을 찾아 뜨겁게 살아가던 시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서울의 봄날’은 아직도 ‘캄캄하다.’(「서울이 캄캄하다」) 하지만 객관적인 현실 그 자체란 없으며 그것은 언제나 그것을 대하는 사람에 의해 해석되고 이해된 어떤 것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집을 통해서 보는 김종해 시인의 현실은 이제 연행되는 지식인, 학생과 검열로 얼룩진 그런 것은 아니다. ‘서민 대중’의 삶은 그의 심중 깊은 곳에 아직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겠지만, 그는 이제 그런 것을 고통스러워하며 대담과 논쟁과 질문의 주제로 올리는 대신 그런 어둠, 고통을 내장한 세계에 자신이 찾아왔고 이제는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응시하고자 한다.
삶에 대한 원숙한 통찰, 따스하고 아름다운 서정의 함축미
“서로 사랑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서로 사랑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깨달음,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느낌, 삶의 일상에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 간단없이 찾아오는 떠난 이들의 기억, 노쇠해 가면서 외롭게 되는 것, 피붙이들이 주는 작은 기쁨들, 이런 것들 속에서 김종해 시인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나’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무엇을 생각하고 노래해야 하는가를, 편안해지고 순치된 것 같은 포즈 아래 여전히 예민함을 잃지 않는 감각, 느낌으로 묻고자 한다.
나이 팔순을 지나가니까
풀이 문득 보인다
풀이 보이니까 바람마저 보인다
풀 앞에 서면 나도 말을 버린다
말을 잊고 사는 것은 풀만이 아니다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풀은 일생을 살아간다
풀의 말을 해석하지 못하므로
나는 외롭다
말을 버린 풀처럼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나는 필생畢生으로 온몸을 편다
풀이 흔들린다
─「풀 앞에 서서」 전문
이 시를 쓰면서 그가 김수영 시인의 「풀」을 의식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김수영의 「풀」을 생각하며, 시인이 이 「풀」과의 거리를 어떻게 의식하며 자신의 ‘풀’을 노래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김수영의 ‘풀’은 민중적인, 서민적인 전통적인 의미를 내장하면서도 그보다는 훨씬 더 바람과 풀의 존재론적인 호응과 존재론적 삶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김종해 시인의 ‘풀’이라고 할 「풀 앞에 서서」에서 화자는 자기 자신이, ‘나’ 자신이 ‘풀’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나’ 자신 또한 ‘풀’처럼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필생畢生으로 온몸을’ 펴는, ‘풀’과 같은 존재, 바로 그것이다. ‘필생’을 ‘서울’의, “현실”의 어둠에 맞서 거세게 헤쳐나오며, ‘항해’를 하며 살아온 그였건만, ‘나이 팔순’에 다다라 보니 이제 ‘풀’이 보이고 ‘풀’을 나부끼게 하는 ‘바람’이 보인다. ‘말’을 버린 ‘풀’의 ‘일생’이 보인다. 침묵 속에서 ‘흔들리는’ ‘풀’처럼 ‘나’ 또한 ‘말’을 잊고 하나의 존재로서의 자신의 삶을 생각하며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김종해 시인은 또 다른 곳에서 ‘풀’을 이렇게도 노래한다.
풀잎끼리도 말을 한다
풀잎끼리 서로 지껄이는 조그만 귀엣말
내가 풀잎이 되어야
겨우 알아듣게 되는 저 풀잎의 말
서로 사랑하는 모든 존재는 흔들린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살아 있는 것은
서로 사랑하니까 흔들린다
풀잎의 옷을 비껴 입고
제 몸의 가녀린 무게를 실은 뒤
바람에 몸을 맡기는
저 작은 생명의 귀엣말을
나는 풀잎이 되어 엿듣는다
─「풀잎끼리도 사랑하니까 흔들린다」 전문
이 시에서도 ‘나’는 이제 ‘풀잎’이 되어 있다. 여기서 ‘풀잎’은 하나하나의 생명적 존재를 가리키는 ‘대명사’ 또는 ‘집합명사’가 되어 있다. 이 존재들로 하여금 서로 호응하게 하고 의지하게 해주는 것, 그것의 동인動因은 바로 ‘사랑’이다. “내가 풀잎이 되어야 / 겨우 알아듣게 되는 저 풀잎의 말”,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모든 존재는 흔들린다”는 ‘진리’다. 모든 문학적 질문의 정답, 해답은 ‘사랑’에 있는 것을, 김종해 시인의 시적 화자는 ‘팔순’ 즈음에 다다라 이제 명료하게 인식한다. ‘서울’의 영원한 타향인으로 어둠 속 ‘현실’을 필사적인 항해의 거스름으로 헤쳐나온 그는 이제 죽음이 보이는 삶의 국면에 다다라 있음을 느끼며, ‘사랑’이라는 삶의 기적, 모든 문학적 질문의 정답, 해답을 찾아낸다. 이렇게 되면 이제 투쟁하는 아우성의 현장과는 다른 삶의 국면이라 해도 그 삶의 ‘일상’들은 단순한 ‘일상’이 아니다.
아침에 잠을 깨니
유리창에 빗방울이 가득 맺혀 있다
밤사이 하늘이 써서 보낸 기별을
나는 놓쳤다
하늘은 아직 어둡고
바람은 유리창에 제 모습을 적어 놓지 않았다
사람 살아가는 일 다 그렇지
단순하지
비가 오니까
오늘 아침 나는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설 것이다
일상 속에서 일상의 바람에 부대끼며
오늘 내린 빗방울에
조금은 옷자락이 젖을 것이다
젖는 일마저
나는 편안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오늘은 비」 전문
이 시에 등장하는 ‘비’는 단순한 비가 아니라 저 앞의 시들에서 ‘풀’로서, ‘풀잎’으로서 자신을 의식하는 ‘나’의 ‘옷자락’을 적시는 ‘비’인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존재’의 ‘일상’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비’, 바로 그것이다. 오랜 시간을 위태로울 만큼 뜨거운 내부를 끌어안고 ‘걸어온’ 시인은 죽음이 어른거리는 삶의 국면을 의식한다. 삶은 이제 죽음에 가까워졌고, 그 얇아진 경계만큼 삶의 ‘현실’은 이제 ‘사회’의 그것보다 ‘자연’으로서의 그것 자체가 된다. “절벽을 마주 서 본 사람의 결기”(「길 위에서」)를 접는다. “눈송이를 이고 하늘로 오”르는 ‘바람’을 ‘보며’ “각을 세운 세상”과는 다른 쪽으로 가던 「눈송이는 나의 각角을 지운다」(『눈송이는 나의 각을 지운다』, 문학세계사, 2013, 36쪽)의 ‘나’를 거쳐, 이제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가 된다. “오늘 내린 빗방울에” “조금은 옷자락이 젖을 것”이고, ‘나’는 바로 ‘풀’이고 ‘풀잎’이기 때문에 ‘젖는 일마저’ “편안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자연적 존재 바로 그것으로써 하루하루를 살고, 서귀포든, 신안이든, 블라디보스톡이든 떠나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홀로, 차오르는 죽음의 기운을, 그리하여 오늘 살아 있는 삶의 의미를 받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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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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