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누고? - 문학세계 현대시인선 220

니, 누고? - 문학세계 현대시인선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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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서사적 서정과 서정적 서사
시집 『니, 누고?』에서 복합적인 ‘마음의 그림’을 그려 보이는 안윤하 시인은 삶의 파토스Pathos들을 다양한 빛깔과 무늬로 변주한다. 서정적抒情的 자아가 내면으로 향할 때는 자기 성찰로 귀결되는 서사적敍事的 서정에 무게가 실리지만, 그 시선이 외부로 열릴 때는 대조적으로 시인의 감정이 이입되고 투사되는 메시지들이 다채롭게 떠오르는 서정적 서사로 무게중심이 옮겨진다.
신선한 발상과 상상력, 첨예한 사유思惟의 결들이 두드러지는 자기 성찰의 시편들에는 소외감과 고독, 이루어질 수 없는 꿈들이 맞물리는 비애의 정서가 곡진하게 번져 흐른다. 하지만 비가시적인 이미지의 가시화와 은유隱喩의 복합성 때문에 이 같은 분위기와 반대로 길항拮抗하는 정서들이 갈등하거나 어우러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반면 시인의 관심이 외부로 확산되거나 전이轉移된 일련의 시편은 서정적인 정조나 섬세한 묘사보다는 해학諧謔과 걸쭉한 입담이 끼어들기도 하는 서사적인 진술로 기우는 양상을 띤다. 서정적 자아가 작동하면서도 직정적이거나 직설적인 표현이 빈발하는 이들 시편에는 그늘지고 소외된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연민憐憫과 질박한 휴머니티Humanity가 끼얹어지고 포개지기도 한다.

저자

안윤하

저자:안윤하
대구에서출생,경북대학교생물학과를졸업하고동대학원이학석사,경영학석사학위를받았다.1998년《시와시학》신인상으로등단,시집『모마에서게걸음걷다』를냈으며,대구예술상을수상했다.김천한일여중고교사,상지전문대·경북실업전문대강사,대구시인협회사무국장,대구문인협회부회장을지냈다.현재대구예총《대구예술》편집위원,대구문학디지털화추진위원장으로활동하고있다.

목차

1지워진거울

눈길______12
눈물______13
지워진거울______14
겨울바다______16
서쪽으로가는노을______18
공중꽃밭______20
석양______21
선물을받다______22
열려라,명자꽃______23
목련______24
달집태우기______26
집으로가는길1______27
집으로가는길2______28
집으로가는길3______29
노을______30
칵테일______31

2지금은햇살교를지나고있어요

골목과옛날식연인______34
한여름의건강검진______35
항복______36
꽃길일줄알았다______38
커피로본인간학개론______40
반도체와시______42
유용한빗금______43
지금은햇살교를지나고있어요1______44
지금은햇살교를지나고있어요2______45
눈싸움으로______46
달빛,그리고태백산맥______48
군함도말년______50
손길,쓰담쓰담______52
주름깊은손______54
몸에가둔말,술은______56
종족보존방법______57

3먼길

남해낮달______60
변명혹은독선______61
검은손______62
깜깜한손______64
폭설______65
가방과명화사이______66
부리의생김새에따른생존방식______68
하목정의붉은구슬______70
무지외반증______72
2020오월,번데기일기______74
먼길______76
화사花死______77
별이빛나는밤______78
증거인멸되다,남산동______80
삼월유리창______82
쿵,쾅______84
동무______85

4매달려있는낙엽

국수와꼼치가있는저녁풍경1______88
국수와꼼치가있는저녁풍경2______90
아버지의눈______91
대청마루풍경______92
작은언니의잠꼬대______94
불붙은재봉틀______96
해방되면______97
승냥이와검은고양이의시간통과하기______98
별______100
순이랭면______102
졸업______104
매달려있는낙엽______106
다시해방되면______107
미용실의추리소설1______108
미용실의추리소설2______109
애증의갈림길______110
자살혹은자연사______112
확률제로______113

┃해설┃이태수
서사적서정과서정적서사______115

출판사 서평

이시집맨앞자리에실린시「눈길」은눈내릴때의길道과눈雪과눈目의유기적함수관계를떠올려보인다.내리는눈이야기惹起하는정신적(심리적)혼돈과시인이지향하는길의막막함이서정적인언어들로묘사되고있다.특히백색이덮고지우고뿌옇게보이게하며,길을흐려지게하고까마득하게보이게하는비가시적인현상들까지도신선한발상과감각으로가시화하는것같아돋보이기도한다.

눈이길을
하얗게덮는다

익숙했던길에도
소리없이백내장이내려
뿌옇게길이지워진다

낯선길로바라보는
눈길이
부옇게흐려진다

외기러기의눈길이
까마득하다
─「눈길」전문


외부상황과마주치더라도궁극적으로는고독과짙은소외감을반추하게하는자기성찰로귀결되는앞의시들과는달리길위에서마주치는사물이나풍경,사람들에대해관심을기울이는일련의시에는시인의생각과느낌(감정)들이이입된메시지들에무게가실리고있다.이때문에이일련의시는서정적인정조情調나섬세한묘사보다는서사적인진술로기울고,세상을향한다소비판적인시각의해학과특유의거침없는입담이두드러지는양상도보인다.

깎깎우짖던직박구리와눈마주쳤다
짝을불러들여,둘이합심해서
나를향해꺄'­꺄'­고함지른다

(중략)

보증금을내라거나월세를내라거나집을뜯으라는것도아니고,이사하라는것도아닌데웬난리냐적반하장도유분수지,눈에띄기만하면쫓아내지못해안달하는모습에나커튼도못열고,햇빛도못보고,창문도못열고,청소도못하는이게뭐야
─「항복」부분

집앞의나무에둥지를틀고사는직박구리들을마치이웃사람들을대하듯공동체삶의불편한점과그시비를부각시키는듯한이시는눈앞에얼씬도못하게할정도로경계심이강한직박구리의속성을희화적戱畵的으로그린다.

또,시인은연작시「여자의삶은소설책열두권이다」등을통해일제강점기의중국만주이주시절과그이후에도힘겹게살았던가족사의일단一端들을질박한연민과향토적정서로감싸떠올린다.전해듣거나잊히지않는기억들을진솔한서술체문장으로보여주는이서사敍事들에는애틋한정한이서려있으며,가족의갖가지애환들을그리면서도우리민족사의그늘진단면들도떠올린다.

어린시절의가족이야기를담고있는「국수와꼼치가있는저녁풍경」두편은어둡고무거운흐름의「여자의삶은소설책열두권이다」와는대조적으로가난해도따스했던기억들을그리움으로승화해반추하는작품들이다.

냄비에하얀물거품이끓어오르고찬물에풍덩국수들이뛰어들면튕겨나가던물방울이작은무지개를만들기도했다.연탄불위에서는멸치물이끓는다.손으로일인분씩휘감아채반에동글동글하게얹혀물이빠질때동생의시선은국수에꽂힌채걸레질시늉만한다.
─「국수와꼼치가있는저녁풍경1」부분

“꼼치!”오빠가긴장을뚫고입총을쏘았다.

여섯의입들이쩍쩍노란입을벌리며국수를몰아삼켰다.국물이노란부리속으로꿀떡꿀떡넘어갔다.꼼빼이가되지않으려고열심히국수를삼키고마셨다.꼴찌는언제나엄마였다.그래서둥근자리치우는설거지담당도늘엄마였다.

국수라도있어서배불렀던저녁의은어‘꼼치’가그리운건지,국수를먹고싶다.매일저녁국수를먹고형제들은모두대궁이실한밀처럼쑥쑥키가자랐다.
─「국수와꼼치가있는저녁풍경2」부분

‘꼴찌’의토속어(사투리)인‘꼼빼이’와‘치우기’의두성약자인‘꼼치’,저녁끼니로자주먹던‘국수’를화두로헐벗어도화목和睦했던가족이야기를다소해학적인어조로재미있게풀어내고있다.끼니를밥으로만해결하기어려웠던그시절엔국수나죽이자주저녁상에오르곤했지만,이들시에는국수를먹던추억이그리움으로따스하고정겹게떠올라있다.
「국수와꼼치가있는저녁풍경1」에는,다른장면은다차치且置하더라도,“동생의시선은국수에꽂힌채걸레질시늉만한다”는구절과「국수와꼼치가있는저녁풍경2」에서의“국수라도있어서”라든가“매일저녁국수를먹고형제들(남매들)은모두대궁이실한밀처럼쑥쑥키가자랐다”는구절만보아도그렇다.

시쓰기는더나은삶을향한꿈꾸기이며,그꿈꾸기는시의뼈대와살을만들어주게마련이다.꿈은삭막한현실적삶너머의더욱고양된삶을올려다보게하며,좌절감이나절망감을넘어거기에오르게하는추동력推動力이되어주기도한다.하지만더나은삶을지향하는초월에의꿈꾸기는철저한자기성찰이선행되고담보돼야한다.겸허하게자신을낮추고비워야만새롭게채워질수도있다.
시인은또다른일련의시에서반성적인성찰로지나온길과는다른새길을지향하려는결의를완강하게내비친다.이자세낮추기로써의자성은“오래전누워서뱉은침이/지금내얼굴에떨어진다//나름정의로워외친직설일지라도/메아리로돌아와/귓가에왕왕거린다”(「꽃길일줄알았다」)는고해성사告解聖事와도같은고백을대동하고있다.

고흐,그는
어둠을헤쳐오는별들과
시퍼런눈물을쏟는인생과
검붉은유혹에헤매는젊음들이
제자리를맴맴맴맴돌고있을때도
북극성네거리에서
어깨웅크린채서성이고있었다

나도
해뜨지않는창가일지라도
머리를들어하늘을쳐다본다
캄캄할수록또렷한염소의눈으로
별을보고있다
─「별이빛나는밤」부분

고흐의〈별이빛나는밤〉(뉴욕메트로폴리탄미술관소장)은실제대상을보며그린게아니라그가정신병원에입원해있을때지난날‘마음눈’으로보았던밤하늘을떠올리며그린작품이다.그의대표작중의하나인이그림은내면적인소란騷亂과고통으로가득찬내면까지묘사했다는점에서시인이자신의거울로삼으려한것일까.
어두운주변환경과유난히밝은별들이불러일으키는분위기가호소력을증폭시키는이그림은당시고흐가겪었던정신적어려움과고통,고독과절망의한가운데서도앞날의삶에대한아름다운희망을시사하고있다는점에서시인도북극성北極星네거리로따라나서고싶었을것이라는유추도해보게한다.시인이느끼고있는현실도“해뜨지않는창가”일지라도그창가에서“캄캄할수록또렷한염소의눈”으로밤하늘의별(어쩌면고흐의희망)을쳐다보고있기때문이기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