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릿 시냇가 (한정옥 시집)

그릿 시냇가 (한정옥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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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한정옥韓貞玉의 시집 『그릿 시냇가』(문학세계사, 2023)는 정갈하고 단정한, 그러나 내면으로는 활력의 언어를 깊이 내장한 실존적이고 예술적인 고백록이다. 시인은 신성한 빛을 향한 수직적 상승 의지와 스스로를 반성하고 낮추는 겸양의 마음을 결속하고 교차하면서 자신의 실존적 역동성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자연스럽게 시인의 상상력은 삶의 모순과 맞서 긴장하고 싸워가는 존재론적 균형감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정신이야말로 한정옥의 시로 하여금 때로는 신앙적 다짐으로, 때로는 인생론적 지혜로 나아가게끔 해준다. 시인은 그 활력과 침묵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형상화함으로써 탐닉과 혐오를 동시에 넘어서면서 자연스럽게 겸허한 성찰을 불러오고 있다. 우주에 가득한 신성의 질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만의 미학적 차원을 견고하게 획득해 가면서 한결같이 어떤 영적 경험과 유니크한 예술적 세계를 마련해 간다. 이번 시집은 이러한 한정옥 시인만의 사유와 감각을 새겨 넣은 유의미한 세계로서 그 깊이와 너비를 선명하게 입증하고 있다. 그 안에는 건강한 반성적 사유와 심미적인 궁극적 관심이 빚어낸 고백의 양상들이 깊이 무르녹아 있다 할 것이다. 이제 그 세계 안으로 한 걸음씩 천천히 들어가 또렷하고도 풍요로운 그의 전언에 귀 기울여보도록 하자.
저자

한정옥

1985년《현대문학》30주년기념백일장시부문차상(김춘수심사),1988년《문학정신》신인상당선으로등단했으며(박재삼,정진규심사)시집『섬으로가는길』(나남출판사),『저녁이되며아침이되니』(문학세계사),『내몸에가시』(문학세계사)를출간했다.

목차

1도등挑燈,맑고수려한
청와헌에서______10
위에서보면원______11
그릿시냇가______12
도배하는날______13
흰꽃______14
샤려니숲______15
나의나된것은______16
다메섹에서묻다______17
인자가무엇이기에______18
그늘이고저______19
내생각은너희생각과달라______20
내길은너희의길보다높으며______21
사흘길광야에서______22
근신______23
생각이많았습니다______24
여호와의산에올라______25
입술을티끌에대다______26
사랑할시간밖에는______27
응답______28
우거______29

2부족한자에게존귀를
감히고백하건대______32
험곡에가도______33
부르시는그날까지______34
고통이유익______36
고라자손의시詩______37
새벽무릎______38
해아래새것이없나니______39
두손들다______40
쑥과담즙______41
그가네길을______42
고요한밤______43
흰길______44
일탈______45
노을,신비해요______46
노을,처음인듯______47
참아름다워라______48
하농연습______49
핀초언덕______50
하고초______51
호사비오리______52
시수詩瘦______53

3뭇별
섬1______56
섬2______57
섬3______59
섬4______60
섬5______61
섬6______62
섬7______63
섬8______64
섬9______65
섬10______66
섬11______67
섬12______68
섬13______69
섬14______70
섬15______71

4신을벗다
침묵을우려내다1______74
침묵을우려내다2______76
침묵을우려내다3______77
침묵을우려내다4______78
침묵을우려내다5______79
침묵을우려내다6______80
침묵을우려내다7______81
침묵을우려내다8______82
침묵을우려내다9______83
침묵을우려내다10______84
침묵을우려내다11______85
침묵을우려내다12______86
침묵을우려내다13______87
침묵을우려내다14______88
침묵을우려내다15______90

┃해설┃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학교국문과교수)
은은하게내면을울리는‘무릎’과‘침묵’의시______91

출판사 서평

척박한세속의문양을넘어서는종교적상상력

한정옥시인은성서적인유引喩나신앙적고백을담은언어를시집곳곳에전면화함으로써종교적상상력의한범례를충실하게보여준다.이점이그의독특한특성이되고도남음이있다.현대인의영혼에짙게드리운내면진공상태를치유하려는대안적사유방식으로써그가구축하는종교적상상력은우뚝하게다가온다.또한그가노래하는종교적경험이란 우리의마음을원초적으로구성하는궁극적실재에대한반응으로써,지정의知情意를통합한인격으로나타나고있다.그점에서신성을배제한가운데이루어진근대의이성중심주의는시인에게깃들일여지가전혀없다.이러한사유방식을바탕으로한정옥시인은그특유의상상력을펼쳐간다.

사람이있는풍경의아름다움

한정옥의시는상실과부재의흔적으로가득한시간들을넘어새로운생성과도약의순간을구축해가는명품이다.온몸으로견뎌야만했던순간을훌쩍넘어서면서,그시간들로하여금세계내적원리를긍정과소망으로바꾸어가게끔한다.우리시대가기쁨과평화보다는우울과불모성을드러내는정도가강해져갈때,한정옥의시는삶의역설을통한종교적긍정으로훤칠하게나아간다.이러한그만의시세계는구체적이고선명한기억에토대를두면서도,시인이그것에대해매우긍정적인태도를보여준다는점에서대체불가능한유일성을견지한다.그긍정의밑바닥에바로‘무릎’이라는핵심이미지가가로놓인다.

참으로많은변화가한꺼번에일어났습니다
여러날뒤척이던생각으로도
출렁거리는시간잡지못하고
좋은시절다지나가는줄몰랐습니다
무거운생각들로엎어져있었습니다
소설小雪지나묵은솔방울떨어지고
새이름풀이름불러오던일접자
사람이찾아오네요
사람이있는풍경
입이열렸습니다
-「새벽무릎」전문

‘새벽무릎’은아마도오랜기도의시간을은유하는것일터이다.이렇게새벽제단을쌓아온그에게그동안많은변화가한꺼번에일어났다.그는뒤척이던생각으로도시간을잡지못하고무거운생각들에늘짓눌려있었지만,새벽무릎의공력으로“소설小雪지나묵은솔방울떨어지고/새이름풀이름불러오던일”을마치자“사람이있는풍경”을맞은것이다.그시간을생각해보면“내몸에가시/무한은혜”(「부르시는그날까지」)였으며“몇발자국뒤로/마음에서물러나자/비로소가난해지는마음”(「그가네길을─칼더를생각하며」)을통해“마음잘풀어가는사람들”(「감히고백하건대」)을만나게된과정이었다.사람살이의가능성이새벽처럼환하게열린것이다.

한정옥시인은무릎으로가닿는세상의아름다움을통해우리로하여금가장신성하고근원적인차원을상상하게끔해준다.모든근대적징후들이절정이자황혼을맞고있는이때,시인은종교적사유와실천을통해고통을치유하고예술로승화해가는도정을이처럼아름답게보여준다.그것은초월적이고추상적인차원에대한찬탄에서나온것이아니라사람이있는풍경의아름다움에대한구체적외경과긍정에서가능했던것일터이다.

계시의순간을가져다주는침묵의의미

나아가한정옥의시는무심하게흘러가는시간과그안에서힘겨운실존을구성하는자신에대한격정의노래이기도하다.그래서그의시에는,세계내적존재로서의운명에대한응시와성찰이함께녹아들어있다.시의표면에는그의몸속깊이새겨져있을상처의흔적이빈번하게나타나고있지만,그이면에는그것을다스리며치유해가려는주체의의지가지속적으로관류하고있다.그렇게그는오랜시간속에서자신이겪은실존적경험들을끊임없이바라보면서그속에서파동치는시간의깊이를쓰는시인이다.그지속적이고역동적인시쓰기의결실이어떤‘계시啓示’로다가오는순간을시인은이렇게노래한다.

잎지자시냇물서둘러내려가고골짝더욱깊어졌습니다.적적함을품어안으니모든것이한갓집니다.적적하고말고할것도없는데긴바람골짝까지내려갔다올라오면소식이한묶음입니다.
이들이들한사철잎쇠어져싯푸른데,아직눈도뜨지못한것들이더뻣뻣합니다.싸리울타리없다면바람한발물러서겠습니까.에둘리면각지지않습니다.
산에들어서로위한다는말하도지극해서아래위가장자리중심따로없으니돌올한아름다움만은은합니다.두런거리다보면금세새벽달지니바람사나워도입동산立冬山을탑니다.산간의접빈다례接賓茶禮,산에선만나는이가누구든마음에환한창하나뜨지않을까요.
-「침묵을우려내다4」전문

침묵을오래도록우려내면서시인은스스로깊어지고고요해진다.잎이지고난후의깊어진골짜기에는‘적적함’과‘한갓짐’이이미하나다.시인은소식한묶음을안고다시올라오면산에들어서로위한다는지극한말을침묵속에서듣는다.중심과가장자리가따로없는침묵을품어안고산간은아름다운돌올함으로은은하기만하다.그고요한산간에서손님을맞고차를나누는것은“만나는이가누구든마음에환한창하나”뜨게하는순간이었을것이다.그렇게“말씀의뼈마디마디/흰가시로빛날”(「침묵을우려내다1」)조건은누구도범접할수없는침묵의차원이었을것이다.어느새침묵이계시와존재론적으로등가가되는순간이다.

형이상학적열망을이어가려는소중한의지

지금까지우리가읽어온것처럼,한정옥의시는깊은인생론적사색과신앙적자아의내면적고백이어우러진결실이었다.특별히이성과신앙이충돌하고의식과무의식이끝없이교차하면서그의서정적주체는표층과심층,빛과어둠,현상과본질,문면文面과행간을함께읽어가는역동성을양도하지않는다.그래서우리는그의시에서절망뒤에피어나는은혜의심연을느끼게되고,비극성너머있는초월의지를놓치지않으려는독법讀法을놓치지않은것이다.이러한긴장된이중독법을그의시에서완성해내는것또한독자들이수행해가야할작업일것이다.
이처럼한정옥의작품안에는다양한정서적,인지적형질이자연스럽게얽혀있다.이때그의시에나타나는비극성은희망반대편에있는것이아니라현실의이치를투시함으로써그현실과친화하려는열망으로나타난다.
마찬가지로그의낭만적의지또한도피의산물이아니라그나름으로지상의삶을견디고감당하고극복하려는상상적고투인셈이다.초월적지위에서모든텍스트의권위를보장하던‘성스러운말씀Word’의권위가부정되고모든것이속화되어가는우리시대에,이처럼종교적상상력을통한형이상학적열망을이어가는한정옥시인의의지는매우귀하고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