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망과 파프리카 (이희명 시집)

피망과 파프리카 (이희명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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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희명 시인은 사랑을 받들고 갈망하며 기다리는 사람이면서, 사랑이 곧 사람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존재의 언어’ 탐구자다. 삶의 오랜 연륜이 쌓인 뒤 ‘존재의 집’(시詩) 짓기에 들어섰지만, 마음자리를 조신하게 낮추면서도 사랑으로 귀결되는 삶을 치열하게 지향하는 시편들은 감성과 언어 감각이 예민하고 섬세한 서정抒情의 옷을 입은 그 도정道程의 음영들이 교차하는 서사敍事를 다채롭게 떠올린다.
하지만 이 풍진세상을 살아야 하는 여성으로서는 아픔과 상실감에서 자유롭지 않고 받들며 참고 기다리는 사랑의 길 위에서 때로는 길항拮抗하는 마음과도 마주치지만 순응과 비애의 긍정적 변용, 겸허한 내려놓기의 자성自省으로 나아가는 결기를 내비치기도 한다.
언어의 흐름이 활달하고 유장하면서도 미세한 기미들까지 첨예한 감각으로 포착하면서 특유의 발랄한 발상과 감성적 사유로 감싸 떠올리는 은유隱喩의 결과 무늬들이 매력적이다. 또한 우주와 거시적인 자연 현상을 내면으로 끌어들여 미시적 심상心象 풍경으로 변용하는 감정이입과 투사 기법도 시적 개성을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저자

이희명

경북선산출생,2018년《대구문학》신인상으로등단했으며2021년매일신문시니어문학상을수상했다.2023년대구문화예술창작지원금수혜를받았고대구문인협회회원이며‘다락헌’동인으로활동하고있다.

목차


눈부신비애______10
관전자______11
돌배나무엔꽃구름하얗게피어나고______12
명랑한계란찜______14
낙화______16
귀소歸巢______18
압화______20
발리를끄다______22
나지막한봄날______24
말들의세계______26
한낮의농담______28
재채기변주곡______30
골목풍경______32
발화______34
어린왕자에게______36
피망과파프리카를잘구별하지못해요______38




별후______42
어미의땅______44
민들레를그리다______46
기억의먼지______48
돈,돈______50
오독______52
허공______54
그밤의귀소______56
한로______58
지붕______60
따뜻한조문______62
환절기______64
참싸리꽃______66
처서무렵______67
노인보호구역______68



퍼즐맞추기______72
모놀로그______74
장마를건너는방법______76
죽은사람은모두착하다______78
환생______80
어머니의분홍신______82
슬픔의빛깔______84
기름짜러가는여자______86
그릇이야기______88
이름을버리다______90
암전______92
불로不老______94
어치의꿈______96
수묵水墨______98
보물찾기______100
황태______102
허기______104



스톡홀름증후군______108
야간산행______110
가출______112
스케치______114
열두폭치마그러안고______116
돌아오지않는강______118
우리들의보석상자______120
을숙도유감______122
백내장______123
리본찾기______124
붉은잠______126
소리가외출한날______128
마이삭______130
설산을오르다______132
붉은망주석______134
흐린날펼쳐보는낡은수첩하나______136

┃해설┃이태수(시인)
사랑인사람의길걷기______139

출판사 서평

눈이밝아지면모든사물이그이전보다더또렷하게보이는건당연하다.그러나더욱선명하게보인다고순기능順機能만증폭시켜주지는않는다.눈이흐려서제대로보지못하던것들역시환하게보이므로그렇지않은기능도강화되게마련이다.시인은시각적(감각적)인눈으로만사물이나현상을바라보는데그치지않고그차원을넘어선사유와‘마음눈’으로그이면까지깊이들여다보기때문에더욱그럴수있다.

눈동자를바꿨다

오,눈부신세상

노랑나비날개끝에얹힌하얀비애
세상이환해져작은얼룩도또렷이보인다

타박타박,맨발로저문강둑을걷는사람아

어젯밤엔
꿈길까지환해져
한때흐릿하던
그대뒷모습도또렷하게보였다
─「눈부신비애」전문

역설적逆說的인뉘앙스의제목을달고있는이시에서화자는눈수술을하고나니세상이환하게보여감탄할정도로눈부시지만,비애와얼룩등그눈부심의또다른이면이마음눈에환히보인다는사실을극대화해떠올린다.밝아진마음눈은움직이는노란빛에얹힌하얀비애,환하므로또렷하게보이는작은얼룩,그근원을시사示唆하는상실의비애까지선명하게되살려반추하게한다.
게다가눈이밝아진뒤에는꿈길까지환해져서“맨발로저문강둑을걷는사람”(헤어진사람)의한때흐릿하던“뒷모습도또렷하게보였다”는대목이말해주듯이,잊혀가던상실의비애가꿈길에서조차또렷하게보인다는사실을환기喚起한다.밝아진눈은세상을눈부시게바라보게하면서도그이면의뒷모습까지보이는비애를되살아나게함으로써‘눈부신세상=눈부신비애’라는등식도낳게한다.
하지만시인은「피망과파프리카를잘구별하지못해요」라는시에서자신의마음눈이밝지않다고자성하고있어그까닭을들여다보게한다.이역시다분히역설적이지만,진정성을담보로언어유희를하는것같으면서도내밀한심중心中을내비치면서시적묘미를증폭시킨다.

나이들어도모르는게많아요홍옥홍로부사이름을잘몰라서그냥사과라고불러요좀더다정하게불러주면좋을것을요설탕과소금도헛갈려서말썽이지요이해와오해도자주혼동해요사람인줄알았는데사랑이라고하네요

사람과사랑,같은말아닌가요?저기사랑이걸어오고있어요사랑이쌓여서사람이되었어요사랑이없었다면어찌제가슴이이리아프겠어요눈물이나네요붉어진가을입술을씻어내리는저빗소리굴러내리며뒹굴며저도우나봐요대낮에가슴을후벼파더라고요

나이들어모르는게많아서행복해요사람인지사랑인지좀모르면어때요피망도맛있기만한걸요당신이좋은사람인지나쁜사람인지오래생각했어요

이젠생강할래요꿀한스푼넣으니알싸하고이리개운한걸요
사람해요!당신
─「피망과파프리카를잘구별하지못해요」전문

이시의첫연에서시인은경험이오래쌓였음에도‘사과’의종류를구분하지못해구체적인이름을다정하게불러주지못하고,겉모양이비슷한‘설탕’과‘소금’,뜻이정반대인‘이해’와‘오해’,발음과본질이비슷한‘사람’과‘사랑’이라는말이헛갈리거나혼동하게하며잘못알고있는경우도있다고한다.자신이잘모른다는사실을잘알고있다고말하는셈이다.
하지만둘째연에서는‘사람’과‘사랑’에만무게중심을두면서그함수관계에천착穿鑿한다.‘사람=사랑’이라는등식으로‘사랑’이쌓인‘사람’인화자가‘사랑’때문에가슴아프고눈물이나며울게되고대낮에가슴후벼파이게도된다고토로하기에이른다.첫연에서의‘모름’이‘앎’으로환치換置되는건비애에대한‘마음눈’의밝음때문이기도하고,‘사랑’에대한절절함의소산이기도할것이다.
이어서셋째연에서는소크라테스가적시摘示한‘절대지’보다는인간의차원으로돌아와‘무지’에오히려행복(위안)을느끼게된다는반전反轉을통해오래생각했으면서도판단유보로회귀해보기도한다.“나이들어모르는게많아서행복해요”라는고백은아는것을모르는척살고싶다는역설로도보인다.

이희명의시는대체로서사적서정의빛깔을띠고있으며,언어의흐름이유장하고활달하기도하지만,다른한편으로는시각적이미지와청각적이미지가교차하거나서로포개지는묘미를거느리고,미세한기미들까지도첨예한감각으로포착하면서은유의옷을입히는감성적인사유가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