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여로
이태수
저자:이태수
1974년‘현대문학’으로등단했으며,시집‘그림자의그늘’,‘우울한비상의꿈’,‘물속의푸른방’,‘안보이는너의손바닥위에’,‘꿈속의사닥다리’,‘그의집은둥글다’,‘안동시편’,‘내마음의풍란’,‘이슬방울또는얼음꽃’,‘회화나무그늘’,‘침묵의푸른이랑’,‘침묵의결’,‘따뜻한적막’,‘거울이나를본다’,‘내가나에게’,‘유리창이쪽’,‘꿈꾸는나라로’,‘담박하게정갈하게’,‘나를찾아가다’,‘유리벽안팎’,시선집‘먼불빛’,‘잠깐꾸는꿈같이’,육필시집‘유등연지’,시론집‘대구현대시의지형도』’,‘여성시의표정’,‘성찰과동경’,‘응시와관조’,‘현실과초월’,‘예지와관용’등을냈다.대구시문화상(문학),동서문학상,한국가톨릭문학상,천상병시문학상,대구예술대상,상화시인상,한국시인협회상등을수상했으며,대구매일신문논설주간,대구한의대겸임교수,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부회장등을지냈다.
Ⅰ
홍방울새를기다리며_12/꿈속의홍방울새_14/윤슬에붙들리다_15/어떤풍경_16/홍가시나무산울타리_18/꽁지마을_19/꽁지마을,새봄_20/꽁지마을,여름점경_21/꽁지마을,단풍나무_22/꽁지마을,낮술_24/꽁지마을,남천南天_26/꽁지마을,솟대_27/꽁지마을,첫눈_28/소요유逍遙遊_30/미로迷路_31/낙엽_32/외딴마을황혼_33/빈의자_34/먼그대_35
Ⅱ
산길_38/암자풍경風磬_39/풍경風磬물고기_40/나무물고기_41/어떤나툼_42/동행_43/잉어등_44/동자꽃_46/동고비둥지_48/여름변주_50/폭염,반란_51/포쇄曝_52/노을,전언傳言_53/달빛소나타_54/겨울남천南天_56/크리스마스캐럴_57/갈등葛藤1_58/갈등葛藤2_59/초승달_60
Ⅲ
면벽面壁_64/업보業報_65/길과나4_66/길과나5_67/길과나6_68/길과나7_70/물의길_72/소요逍遙,못가에서_74/나와나_75/나는나와논다_76/짧은꿈_78/비내리는날_80/우두커니_81/참회懺悔_82/염장鹽藏_83/잠_84/예초刈草_85/유리―악령惡靈_86/포모증후군_88/눈길_90
Ⅳ
보랏빛꿈_94/고향냇가_95/옛사람들_96/시간여행_98/처가고택_100/잘츠카머구트호숫가에서_102/선잠속두자락의꿈_104/부다페스트야경_106/먼나리여행길에서_107로텐부르크의눈_108/귀국길_109/어느날의귀가_110/그밥집_111/자전自轉―봉변_112/사시나무_114/그여자_116/술친구_117/별난성미_118/영원한안식의나라로_120
|해설|이숭원(문학평론가)/쓸쓸하고외롭고아름다운여로_124
과거와미래를통합하여현재로내재화
먼곳의길찾기명상과꿈의매트릭스
이태수의시는먼곳에대한명상으로가득차있다.그는먼곳을향하여길을걷는시인이고목적지가보이지않아도진행을멈추지않는시인이다.그는절대포기하지않으며,멀더라도가야만하고,갈수없으면기다리는시인이다.이것은어제오늘의이야기가아니다.지금까지그의시작업이이런방향으로줄기차게진행되어온것을그의이력이증명하고있다.보이지않는먼곳을향해가겠다는시인의육성은그만큼간절하다.그음성은고상한기품을유지하고있어서,울림은크지않으나소박하고그윽한음률이깊은감동을준다.가고자하는원심적운동은순수의자세를유지하겠다는구심적의지와긴밀하게연결된다.가고싶은욕망,기다림의정동,환각의창조는시의내면에서순환구조를이룬다.기다림이환각을창조하고환각은다시기다림을촉구한다.그런의미에서꿈의매트릭스가이태수시의중심을이룬다고말해도좋다.환각의창조는이태수시의동력으로작용한다.
홍방울새들이언제돌아오려나
구름이흘러가는먼하늘,
마음은구름따라흐르고
나뭇잎들이우수수지고있다
창가에앉아비발디의플루트협주곡
‘홍방울새’를듣고있으면
무리지어파도처럼날아오는홍방울새들이
간밤꿈속이듯날고있다
날아들면서일제히D장조로지저귄다
한곳에머물지못하고떠도는마음은
흐르는강물같아서일까
멀리떠났다가눈내릴무렵에야되돌아오는
홍방울새떼를기다리는
마음의빈뜨락에도첫눈이내리려나
예이츠의홍방울새들날갯짓도
다가오듯보이지않지만
창가에우두커니앉아서
돌아올홍방울새들을기다린다
―<홍방울새를기다리며>전문
시<홍방울새를기다리며>는‘먼여로’로표상되는이태수시의정신적흐름을잘보여준다.‘홍방울새’는예이츠의유명한시<호수섬이니스프리(TheLakeIsleofInnisfree)>에등장하는새다.이태수시인은이새를비발디의플루트협주곡3번<홍방울새>와연결하여회상의강도를높였다.시와음악으로조성된회상의정조는그의마음속에자리잡은어떤이상의경지를소환한다.그리움과기다림이환각을창조한것이다.이환각은다시기다림을촉진한다.
이시의연속편인<꿈속의홍방울새>에서도홍방울새떼의지저귀는장면을묘사한후“눈을뜨고나니꿈이었어요”라고고백하면서“예이츠와비발디가불러준환상이/이다지도홍방울새를기다리게하는지요”라고자신의마음을토로하고있다.
그는<짧은꿈>에서그가몽상에잠기는순간을시로표현했다.한낮에의자에앉아잠깐조는사이에새가되어하늘로나는꿈을꾼것이다.새가되어날개를펴고세상을한눈에내려다보며커다란날개를힘차게퍼덕였다고했다.참으로장엄한장면이다.이장면을통해그가가고싶어하는이상적공간의모습을조금드러냈다.세상이거꾸로돌기에미지의아름다움을꿈꾸며이상의공간으로가기를희구한다.“마차가말을끌던”비정상적인시절은지나갔지만,아직도마차가삐걱거리는온전치못한상태에있음을안타까워하며세상의바른이치가회복되기를바란것이다.
그가그리움의대상을비교적명확히드러내는경우는고향과혈육의모습을그리워할때이다.옛사람들의모습을떠올리며그들에대한정겨운친숙감과그리움을유감없이드러낸다.<시간여행>은고향마을로의시간여행을소재로했다.이것은몽상이아니라실제의사실이고그래서눈길과마음으로직접접촉한내용이다.고향의정경을통해과거의시간이현재의상황으로육박해온것이다.
<옛사람들>은현실공간에바탕을둔그리움이아니라몽상의영역에서이루어진그리움의전개다.희유한조우를통해시인은환각의중요성을새롭게부각했다.옛사람이옛모습을그대로지닌것은“옛날로돌아가고싶은이마음때문”이라는사실이중요하다.
시인은몽상속에서자신을스쳐간모든인연들을떠올리며그만남의의미를반추하고자한다.좋은인연이든그렇지못한인연이든그사람들을다그리워하고자기정신의울타리안에포용하려고한다.여기그의진심이나타난다.참으로아름다운회감懷感이다.시인은영원한현재라는서정의시간속에과거의추억을불러들이고그들과하나가되어이대로머물고싶은것이다.과거와미래의시간을통합하여현재로내재화하려는욕망.이것이이태수시인이기획하는꿈꾸기의본질이다.
그의시는길의모티프로가득차있다.보이는길이아니라보이지않는길,일종의미로를걷고있다.미지의세계가여전히자신의마음을잡아끄니걸음을멈출수없다.갈수없다는안타까움이그의마음을더자극하고,가고싶어하는간절한마음에미지의세계는더아득하게느껴진다.시인은여전히미로를걷고또걸을뿐이다.
시인은이러한미로를걷는것이일종의업보業報라고생각한다.날이저물면걷던길이저만큼물러나고날이밝으면또길이펼쳐진다.해진다음의시간은명상과자성의시간이다.아무리자기를찾아도“나는여전히먼데있나봅니다”라고했다.자신의실체를찾아사방을헤매어도본모습을만나지못하고되돌아올수밖에없는것이운명이다.미로의앞길이보이지않을때는“없는길을만들며가기도”(길과나4)한다.길을찾으려는그의노력은세상의순리를새롭게확인하는단계에이른다.
간밤에눈이내려은빛세상입니다
잠시라도붙들어앉히고싶습니다
길들이지워져안보이지만
바라보며이대로머물고싶습니다
길들도다눌러앉히면좋겠습니다
간밤꿈에는지나온길도
가고있던길도거둬들이고있었습니다
길이남김없이지워지고
나는우두커니서있는소나무였습니다
제자리에서있었습니다
햇빛이다시맨발로뛰어내립니다
가면을벗듯세상은느리지않게
민얼굴을드러내고있지만
나는은빛세상을붙들어앉히며
그안에서갈길을찾고싶습니다
―<길과나5>전문
눈이내리면그나마보이던길도보이지않게된다.<길과나5>는그러한백지상태의새길찾기를주제로내세웠다.들판을바라보며이대로머물고싶다고도했고길들도다눌러앉히면좋겠다고했다.길찾기와길위를걷기는그에게주어진숙명적업보다.그는길을걸어야하는필연의존재자다.시인은길이지워진자리에서있는소나무로자신을비유했다.여기서시인은다음장면을보여주며길찾기의의지를조심스럽게드러낸다.
햇빛이비치면눈이녹고서서히세상은제모습을드러낸다.그러니눈으로덮인세상의환한모습은실상이아니라순간의가상이다.환한은빛세상은지속성이약한가상의공간일뿐이다.은빛세상이유지되든어떻든그가하고자하는일은길찾기뿐이다.어떻든그는길을걸어원하는미지의세계에가야그의소명이완성된다.<장자>의‘소요유’에나오는무한허공으로의무한도약,무한비상이그의지향이고꿈이다.
<물의길>은나무를통해순리의발견에이르는마음의행로를보여준다.시인은강가에서서내려갈길을떠올리다계단앞에이르러선오르는길을찾는다.계단에올라강물을내려다보니아래로흐르는물의길이보인다.하늘을향해팔뻗고서있는강둑의나무들도물의길을들여다보고있다.나무는하늘을우러러살고있지만강물은끝없이내려가는모습만보여준다.세상에는끝없이내려가는길의모습이있다는것을,세상에는그런순리가있다는사실을강물이일깨워준다.그러니하늘만바라볼것이아니라강물을보고끝없이내려가는길의움직임도배워야한다.나무는하늘과강을종합한중요한가르침을시인에게전한다.“변함없이제자리를지키고있으면서/하늘우러러물길을따르는게도리”라는가르침을나무가나직이들려준다.시인은나무를통해새로운길찾기의자세를배운것이다.
그는<눈길>에서자신의마음을다시분명히세워서눈위에새길을찾아걷겠다는뜻을밝혔다.눈길을걸으면발자국들이따라오다지워진다.뒤돌아보면지나온길이지워지고가려는길도지워져보이지않는다.모든길이사라졌지만,시인은여전히“새길을걷고싶게하는”충동을일으킨다.시인의태도는매우담백하다.“눈이그치고나서지워진길을나서면/발자국들이새길을내면서따라옵니다”라고했다.그에게지워진길은없다.사라진길위로새로걸으면새길이저절로생기기때문이다.끝없는길찾음과길걸음의순환적반복,그것을위한환각의창조.이것이그의최근시쓰기의동력이다.
눈길의표상과강물의표상이시인에게지혜의문을열어주었듯이시인은암자의풍경風磬과나무물고기모형을통해지혜의탐색을벌인다.암자의고요함은시인의마음을끌기에적합하다.고요의깊이가고향같은아늑함을안겨주고미지의세계로가는길을열어주기때문이다.‘꽁지마을’이고향의정경을떠오르게해서친근하게다가오듯이암자의모습도고향과같은친숙감을일으킨다.늦여름오후,더위가한물간솔숲그늘에멧새들노랫소리가들린다.그소리에인근암자풍경소리가포개져들린다.시인은그소리에귀를기울인다.멧새의울음소리보다풍경소리를통해무언가얻기를원하기때문이다.시인은귀를열고풍경소리를따라암자앞으로느릿느릿걸어간다.암자에이르러풍경을보고풍경끝에매달린물고기를본다.
풍경이울리고풍경추아래의
물고기가그소리따라유영합니다
풍경소리는면옥빛하늘아래
넘실거리는망망대해를흔들어깨우고
깨어있는물고기에게는
길을열어주고있습니다
절집의처마는바다의한가운데이면서
세상깨우는요람입니다
깨어서도잠을자면서도
눈뜨는물고기는깨우침의화신인듯
죽으면서도눈을감지않습니다
풍경소리에물고기가유영합니다
물고기는깨침의길을엽니다
―<풍경風磬물고기>전문
<풍경風磬물고기>에는바람이불어풍경이흔들리면그아래매달린물고기도헤엄치듯움직인다.여기서시인의상상이펼쳐진다.저물고기를보니먼망망대해에서왔을것같다.아니면먼망망대해로가고자하는지모른다.그런점에서물고기의지향은시인의꿈과겹친다.시인이풍경끝물고기에관심을가진것은물고기의가고자하는소망을상상했기때문이다.물고기를자신의분신으로상상한것이다.시인의상상속에서풍경소리는먼옥빛하늘아래넘실거리는망망대해를흔들어깨우며그곳으로가고자하는물고기에게길을열어주고있다.길이열리는것은시인도간절히바라는바다.암자추녀밑의풍경끝물고기가망망대해로이끈다면절집의처마가바다한가운데와통할수있다.그렇다면처마는세상을깨우는요람이될것이다.
풍경끝의물고기는하루종일눈을뜨고있다.잠을자면서도눈을뜨고있는물고기는깨달은존재의표상같다.어떻게하면구도의자세가잠까지이어져자면서도눈을감지않는가.그러한불변의항구적내력을시인도본받고싶다.풍경소리를통해풍경끝물고기가바다와통한다면,풍경소리가울릴때마다물고기가헤엄치는처마아래이곳이바로망망대해가된다.물고기는망망대해를유유히유영하며깨침의길을열고있다.그렇게보면물고기는참으로깊은선지식이요자비보살의거룩한형상이다.시인은그행로를본받고싶은것이다.<나무물고기>역시유사한주제를드러냈다.이시는풍경끝의물고기가아니라절집의목어木魚를대상으로했다.<나무물고기>역시유사한주제를드러냈다.이시는풍경끝의물고기가아니라절집의목어木魚를대상으로했다.
나무물고기는절집에삽니다
바다가아니라허공에매달려삽니다
나무물고기에게는허공이바다입니다
허공처럼텅빈뱃속을
나무막대로두들겨맞으며나아갑니다
맞아야내는그소리가
퍼져나가면서무명을흔들어깨웁니다
한결같이눈을뜬채로
언제나깨어있으라고나무물고기는
세상을배울림으로일깨워줍니다
허공을환히밝히고있습니다
―<나무물고기>전문
이시의요체역시허공바다를헤엄치는나무물고기에있다.허공을헤엄치는나무물고기가신비로운것이아니라허공에서도유영하며자신의길을가고있다는사실이부럽다.목어는저절로움직이는일이없고두들겨야소리가난다.그래서시인은“허공처럼텅빈뱃속을/나무막대로두들겨맞으며나아갑니다”라고썼다.두들겨맞으면서도자신의길을간다는사실이부럽고그것을본받고싶다.
세속의중생을깨우는목어역시늘눈을뜨고있다.시인의관심사는늘깨어있다는점,세상의무명을깨우는일을멈추지않는다는점,자기몸을때려서내는소리로세상의허공을환히밝힌다는점이다.시인도이처럼자신의길을계속걸어세상을위해무언가를하고싶은것이다.여기에길찾기와길걸음의의미가있다.그의미를명확히제시하지않는것은시인의겸허함때문이기도하고길의의미를분명히깨우치지못했기때문이기도하다.어떠한경우든시인도목어처럼자신을울려세상을밝히는일을하고싶다.풍경물고기도그렇고나무물고기도그렇고이두사물의의미는시인의길찾기와밀접히연결되어있다.
이러한염원의지향은돌탑을소재로한<어떤나툼>으로전환표현된다.시인은돌탑의돌에자신의염원,보이지않던길,목마르게찾아헤매던그무엇이나타난다고조심스럽게암시한다.이조심스러움은시인의겸허함에서온다.그래서자신을한껏낮추어“꿈결이듯헛보이듯이나투어지고있다”라고했다.그는하심下心의수련을거친시인이다.
마음의변화를포착한다는점에서<포쇄曝>는깊이음미해야할작품이다.장마가끝나면서고에있던책을밖으로옮겨습기를없애는작업을한다.시인은책을포쇄하듯이“응달에그대로뒀던마음을햇살에넌다”라고했다.이것은참으로유용한일이다.응달에축축하게젖었던마음을맑은햇살에말리면마음의올과결이얼마나부드러워지겠는가?따스한햇볕,눈부신햇빛,몇자락비단결같은바람이다가와마음의살결을쓰다듬는장면은상상만으로도아름답다.
이렇게마음을햇살에말릴때베란다화분에핀빨간샐비어도바람에말릴수있다.그장면을두고시인은“햇빛과햇볕과햇살에생기를포개고있다”라고썼다.햇빛,햇볕,햇살의차이를감지하고그차이에따라꽃송이가씻기는장면,바람이마음의결을쓰다듬는장면을상상한것이다.햇빛이비치고햇볕에쏘이고햇살이비추는각각의장면에따라붉은꽃봉오리의색감이변하고마음의질감도변할것이다.이것은시인이마음의탐구에섬세하게임한다는사실을알려준다.이제시인은육체의발걸음을좇는길찾기가아니라마음의행로를따르는내면의길찾기를행할태세를갖춘것이다.그래서그의마음이남천처럼붉어지기도하고단풍처럼변하기도하면서꿈속의미로를걷게된다.
그보행의과정은순탄하지않다.덧없는면벽의나날을보내는것같은막막함이시인의마음을어둡게한다.하루몇번씩마음을고쳐먹어도“마음강산의속절없는이허방”에서오는허전함은가시지않는다.“벽을마주하던나도그만벽이”돼버린듯한폐쇄감을느끼기도한다.속절없는면벽의세월에서오는허전함,허망함,막막함은시인에게고통을준다.흘러가는세월을붙들어염장鹽藏하고싶지만,염장되는것은세월이아니라허당뿐이다.순간을붙들어염장하고싶지만그렇게마음먹는사이그순간은지나가버린다.다시마음을바로잡으면다른순간이다가온다.끝없이사라지는순간들,마음의끝없이이어지는형상들.
<비내리는날>에서비는빗소리를안고내리고물은빗소리를업고흐른다.비와물은흐름을멈추지않는다.마음도비따라내려가고물따라흘러간다.안내려가려해도내려가고안흐르려고해도흘러간다.내려가고흘러가는비와강물에잡다한세상사를모두맡기려는자세도취해본다.이제시인은어디로가야하는가?그러나어느순간에도구원은있다.묘하게도구원은가을의충만한달밤의정경에서온다.<달빛소나타>의음률을따라시인의걸음이율동감있게옮겨진다.
늦가을이른저녁달빛따라걷는다
풀벌레소리가따라오고
발치에는우수수나뭇잎들이떨어진다
별들이내려와뜨고있는호수를지나
달빛이밝혀주는길로걸어간다
(쓸쓸하면서도왠지따스해진다)
산모롱이를돌아한참가다보면
달빛이내려가는길을더환히비춘다
발길을돌려다시달빛을따라걷는다
풀벌레소리가따라오고
가까워지는마을에도달빛이환하다
―<달빛소나타>전문
<달빛소나타>에서시인은늦가을이른저녁달빛따라걷는다고했다.풀벌레소리가따라오고발치에는나뭇잎들이우수수떨어진다.쓸쓸하지만아름다운가을의정경이다.별들이내려와떠있는호수를지나달빛이밝혀주는길로들어선다.이러한행로에대해시인은스스로“쓸쓸하면서도왠지따스해진다”라고썼다.쓸쓸하면서도아름답고쓸쓸하면서도따스한이감도야말로시인을허방의염장에서구원해주는정겨운손길이다.산모롱이를돌아한참가다보니“달빛이내려가는길을더환히비춘다”고했다.이제그는막막한면벽의세월에서벗어날수있을것이다.달빛소나타의아름다운음률을좇아그가원하는먼곳,홍방울새날갯소리울리는그이상의공간으로갈수있을것이다.발길을돌려다시걸으니풀벌레소리가따라오고가까워지는마을에달빛이환하다고했다.서광이비친다.여기구원의길이있다.
그가한번이아름다운길의광채에접했으니설사또다시허방의궁지에부딪는다해도쓸쓸하면서도따스한촉감의기억이본능의힘을이끌어달빛소나타의길로다시돌아오게할것이라고믿는다.77세를한자漢字모양을응용하여희수喜壽라고하는데희수에는기쁠희喜자가들어간다.희수를맞는이태수시인의앞길에달빛소나타의은은한광채가널리퍼지기를소망한다.그환한빛은그의시의앞길을비추는것만이아니고한국시의길을비추는것이기도하다.그가펼쳐온시력詩歷50년,21권시집의온축은한국시의역사이기도하다.50년창작의공력을발판으로그의시가또다른경작의길로힘차게나아가기를소망한다.이발원은나의소망이자시인의소망이고한국시단의소망이기도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