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게 묻다 (김희진 소설집 | 반양장)

오후에게 묻다 (김희진 소설집 | 반양장)

$18.00
Description
영문도 모른 채 남의 집 문에 수갑과 함께 묶여버린 청년,
십 년간의 은둔을 끝내고 집 밖으로 나서는 남자,
일요일마다 빈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찾는 빈곤한 배달원…
부조리와 불가항력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려는 용기에 대하여!

표제작이자 단편집의 첫 번째 수록작인 「오후에게 묻다」는 영문도 모른 채 범인으로 오인돼 남의 집 자바라 문에 수갑이 채워진 청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갇혀버린 그는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온갖 궁리를 하고 우연히 마주치는 모든 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그 얼토당토않은 상황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다하며 몸부림을 친다.
그동안 주로 장편소설을 집필해온 김희진 작가가 첫 소설집 『욕조』 이후 13년 만에 내놓은 소설집 『오후에게 묻다』에 수록된 8편의 단편소설 속에는 납득할 수도, 화해할 수도 없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한 발을 내딛으려는 인물들의 안간힘과 몸짓들로 가득하다. 도처에 만연한 불평등, 저마다의 가난과 고독, 근원적인 고민과 아픔 속에서 허덕이는 소설 속 인물들은, 그럼에도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려 애쓴다. 그들 중 몇은 그 부조리한 세계에 잠식당하기도 하지만, 또 몇몇은 끝내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한 걸음의 나아감에 성공하고야 만다. 그런 노력의 성패 여부와 상관없이 작가는 무력감과 절박함, 그리고 부조리를 체득하면서도 거기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인물들의 용기를 따뜻하게 감싸고 응원한다.
수록된 8편의 단편은 각각, 어느 날 느닷없이 남의 집 자바라 문에 수갑이 채워져 옴짝달싹 못 하는 청년(「오후에게 묻다」), 인공지능으로 만남, 연애, 결혼, 이혼의 과정을 체험해보는 여자(「헤어지는 중」), 십 년간의 은둔을 끝내고 집 밖으로 나서는 은둔형 외톨이(「어떤 외출」),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 남의 집 신발을 훔치는 남자(「거슬림」), 일요일마다 빈 캐리어를 끌고 공항에 가는 빈곤한 배달원(「같은 일요일」), 여름방학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성소수자 남자 대학생(「그들의 고전주의」), 부모와 태중 여동생의 죽음을 겪게 된 여섯 살 남자아이(「늙은 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한 나머지 광기와 기행을 일삼는 이중인격의 남자(「방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떤 뜻하지 않은 사건 사고와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그 상황을 극복해가는 과정은 매우 이채롭고 다양하다. 어떤 인물은 그 상황에 순응하는가 하면, 어떤 인물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조금씩 해법을 찾아 나간다. 어떤 인물은 폭력에 더 큰 폭력으로 맞서는 등 극한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이 8편의 독립된 단편소설을 통해 부조리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다양한 몸짓을 보여주며, 타인의 무관심과 외면과 방관이 불러일으키는 폭력성(「오후에게 묻다」), 매일 집 밖을 나가는 평범한 일상의 가치와, 가족과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감내해야 하는 고통의 과정(「어떤 외출」), 누군가를 흠모하는 마음의 위험성과 욕망 안에 잠재된 분노와 광기 그리고 불안(「거슬림」), 빈곤한 삶으로 인해 좌절하면서도 끝내는 붙들 수밖에 없는 희망(「같은 일요일」), 여전히 만연한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경멸을 통해 보는 사회계급의 씁쓸한 민낯(「그들만의 고전주의」) 등의 다양한 주제를 드러낸다.
『오후에게 묻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부조리를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이면을 선명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그런 세계 속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처절한 사투와 나름의 안간힘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는 아름답고 깊이 있는 단편들로 채워져 있다.
저자

김희진

저자:김희진
2007년세계일보신춘문예에단편소설「혀」가당선되어작품활동을시작했다.장편소설『고양이호텔』,『옷의시간들』,『양파의습관』,『두방문객』,『얼마나이상하든』,『다른여름』과소설집『욕조』등이있다.

목차


오후에게묻다
헤어지는중
어떤외출
거슬림
같은일요일
그들의고전주의
늙은밤
방은모든것을기억한다

해설_이해할수없는힘에대하여|허희(문학평론가)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오른쪽손목을움켜쥔수갑은어느단독주택차고앞에채워져있었다.스테인리스로된,눈부시게반짝거리는자바라문이었다.아코디언의주름처럼접었다폈다할수있는,내허리높이의자바라문은현재쫙펴진상태로닫혀있었다.문너머차고안에주차된차는없었다.온가족이자가용을타고여름휴가를떠난듯,빨간벽돌집은드나드는사람하나없이조용하기만했다.팔월초입이었다.태양은뜨거웠고그태양을피해모두들휴가를떠나버렸는지거리도동네도온통조용하긴마찬가지였다.아니,동네는마치멸망직후에찾아오는폐허의고독처럼쓸쓸하다못해쌀쌀맞기까지했다.그냉정한분위기에동조라도하듯거리에는지나가는사람하나없었다.누구라도붙잡고도움을좀청해볼까했지만그마저도기회가생기지않아답답한상황이었다.도와달라고소리쳐봐도휴가를떠난집들은모두다묵묵부답이었다.남의집자바라문에묶인지벌써반의반나절.나는점점지쳐가고있었다.―10~11쪽(「오후에게묻다」)

그는어머니를생각한다.더정확하게는방안에서은둔하던동안의어머니를생각한다.한집에살면서도거의얼굴한번마주친적이없었기에어머니는오직그에게목소리로만존재했다.“이불빨때되지않았냐?내놔라.”“쌀쌀해져서그런지오늘은제법만두가팔렸지뭐냐.매일오늘만같으면좀좋아…….”“니동생,결혼한댄다.상견례하자는데같이는못나가겠지?”“트렁크팬티몇장사다놨다.색깔맘에안들면말해.다른거로바꿔다줄테니까.”“옆집할머니,돌아가셨다.평생외롭게사시더니갈때도외롭게간모양이더라…….”어머니는매일그의방문앞에서무슨얘긴가를건넸고,물었고,던졌다.그는전직대통령과유명한여자배우의자살소식을어머니의목소리로들었다.주소체계가지번에서도로명으로바뀌었고,지폐크기도아담하게바뀌었다고어머니는말했다.신사임당의초상화가들어간오만원권지폐의등장을알려온것도,독재자의딸이최초의여성대통령으로당선이되고,바다에서일어난사고와그사고로생겨난수백명의바다밑차가운죽음에관해알려온것도어머니의그목소리였다.“글쎄,대통령뒤에숨어있던늙은여자하나가온국민을우롱했다지뭐냐.화가난사람들이전국에서촛불을들고일어났어.”“…….”“전직대통령두명이탄핵과비리로감옥에들어갔단다.”“…….”하지만어머니의부지런한입놀림뒤에는어머니의목소리만이허허롭게남아조용히흩어졌다.그가방의인력을운운하고,사람이어떻게만두를빚다죽을수있느냐고되물었을때말고는어머니의대화는연극독백처럼쓸쓸했다.물론방안의그의침묵도고독하기는매한가지였다.―99~100쪽(「어떤외출」)

그는모자챙을아래로끌어내리며아이의뒤를밟기시작한다.움직이는방향으로봐서는곧장집으로가는것같지는않았다.모퉁이를돈아이가한적한골목길로들어선다.후미진곳이필요하던그에게는나쁘지않은경로다.그의머릿속에는아직도그때아이가했던말이떠나질않는다.“저봤어요.아저씨가신발훔치는거…….”“신발가게아줌마가시킨거예요?”순진한얼굴을하고있던아이는절대순진하지않았다.그것이그가내린결론이었고그가아이를미행하게된동기였다.그는이말은용서할수있었다.“저봤어요.아저씨가신발훔치는거…….”그러나이말은도저히용서할수없었다.“신발가게아줌마가시킨거예요?”이제겨우그녀의이름을알게된그에게저아이는께름칙한그무엇이었다.―177쪽(「거슬림」)

나는빈캐리어를끌고쫓겨나다시피자리를피했다.그러고는속으로생각했다.미국에서공부중인여자를아내로둔저남자의삶은나와얼마만큼다를까.어떤성장배경을지녔기에저남자는누군가의아버지가되려고결혼까지한걸까.왜나는이렇게밖에살아오지못했는데저남자는저렇게다르게살아온걸까.좀체떨쳐지지않는그생각들을데리고나는발길닿는대로천천히발걸음을옮겼다.에스컬레이터가나타나면무조건올라탔다.내려가는방향인지올라가는방향인지확인하지도않고계속해서에스컬레이터를갈아탔다.―202쪽(「같은일요일」)

나는기미투성이여자가말한대로사고가터질까봐이를악물고손을빠르게움직였다.빙과를집어들때마다살이찢어지는통증이느껴졌다.손톱이빠질듯한아픔이었다.아침에일어나면손이퉁퉁부어서아예주먹이쥐어지지않았다.억지로쥐어보려고하면손가락뼈마디들이우두둑소리를내며뻣뻣하게꺾였다.좀체나아질줄모르는손때문에나는며칠째숯불갈비집아르바이트마저못하고있었다.손해가이만저만이아니었다.
여덟명의손이척척,착착,쓰윽을이어나갔다.컨베이어벨트를타고떠밀려오는빙과들이아슬아슬하게겨우상자에담겼다.그런데그때였다.내오른쪽새끼손가락에서뭔가가결락된느낌이들었다.따끔한통증과함께목장갑밖으로피가배어나왔다.―243쪽(「그들의고전주의」)

이모의시선이텅빈방에머물렀다.그러는동안이모의머릿속에는저방에서커나갈은우의숱한내일들이떠올랐다.은우는저방에서초등학생이되고중학생이되겠지.무수히많은고민의밤과성장의밤을지나조금씩어른이되어가겠지.웃고우는밤도,수치의밤도,실패의밤도찾아올테지.그리고저방은은우가처음마시게될술에대한기억이되고,호기심으로피우게될첫담배에대한기억이되겠지.은우의첫몽정과첫수음과첫꾸중을지켜보게될방.하루가다르게노쇠해져가는할아버지와할머니를지켜보게될방.결국살아간다는건무언가를하나씩잃어간다는걸깨닫게될방.그혼자만의방…….―284~285쪽(「늙은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