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정리 : 엔트로피에 쓸려 가지 않기 위하여 - 아무튼 시리즈 56

아무튼, 정리 : 엔트로피에 쓸려 가지 않기 위하여 - 아무튼 시리즈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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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스스로 정리하는 삶에 이르기까지
타고나기를 정리 정돈에 매우 미숙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더구나 그는 성인 ADHD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 악조건 속에서 2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해오고 자녀도 둘 키우고 있다면, 그의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아무튼, 정리』는 지저분함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시신경과 몇 분에 한 번씩 안드로메다로 튀어 가는 산만함으로 한때 스스로를 ‘엔트로피 최대화 촉매제’라고 생각할 만큼 정리 정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저자가 확고한 ‘엔트로피 대항자’가 되기까지의 긴 기록과 정리 정돈을 강력히 거부함으로써 발생한 혼돈이 천천히 소멸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저자

주한나

데이터과학자.지저분함을잘인지하지못하는시신경과몇분에한번씩안드로메다로튀어가는산만함으로살아왔다.못하는것일수록노력하여잘해야한다는강박으로정리정돈생활을해왔지만정리에대해서글을썼다고하면주변인의99퍼센트는의아해할것이라생각한다.그렇기는해도코드와데이터를정리하여AI모델에게먹이고도출되는결과를정리하는일을업으로삼고있고,퇴근하면아이둘을둔20년차살림인으로여전히소질없는집안정리에힘쓴다.페이스북페이지에IT,사회,정치,문화등에걸쳐다양한글을써왔다.

목차

프롤로그

정리필터작동이수동이라는것은…
깨끗하고어수선한방
‘알아서정리하는사람’까지는되지못해서
청소빚갚기
내가존재하지않으면어질러질일도없지만
애자일방식으로두주를한스프린트로잡아서
정리로의도피
신경쓰이는것들,신경쓰이지않는것들
우울할때벽장을연다
청소판타지
정리를잘하던그는
살천도
나는그가누군지모른다
모드전환
단정함과통일성
정리해고
디지털호더
기억의수납장
어두운밤으로순순히먹혀들지마

출판사 서평

어차피다시꺼내볼책을왜가지런히책장에넣어두어야하는가

작가는늘뭔가를잘잃어버리고잊어버리는아이였다고한다.늘말이너무빠르고산만하다는지적을받았고특히주변정리를잘못해잔소리를많이들었다.성인이되어ADHD진단을받고서야많은것이설명되는느낌이었다.하지만이것만으로는해명되지않을만큼작가에게는정리정돈에대한강력한거부감이있었는데,여기에는그가지나온삶의이력이작용했다.

작가는40년남짓한인생동안세번의이민과마흔번의이사를겪었다.십대에온가족이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이민을갔고결혼후에는영국으로,이후에는지금살고있는미국으로이민을가게된다.남아공에서는낮은물가와값싼노동력의결과로집안의모든공간을널찍널찍하게쓰면서생존에꼭필요한가사노동을싼가격으로해결할수있었다.자연스럽게자기돌봄을위한정리가필요하지않은상황이었다.더구나일찌감치이공계성향의사고방식을지녔던터라세상의모든일을효율성기반알고리듬으로분석했다.매일반복되는정리와청소는비효율적으로느껴졌다.‘어차피다시꺼내볼책을왜가지런히책장에넣어두어야하지?’,‘내일들고나갈가방은그냥현관옆에두는게효율적이지않나?’여기에더해가사노동과돌봄을여성에게전가하면서여성을사회적성취와점점더멀어지게만드는사회구조에일찌감치눈을떠‘여성적’이라고생각되는모든행위를거부하게되면서‘스스로정리하는삶’과는점점더멀어지게되었다.

무질서로내달리는세계에서매일같이새로운‘나’를만들어가는일

아이를낳고부터정리와청소는생존의문제가되었다.영국의좁은생활공간에서는정리를하지않으면당장움직일공간이없었다.끊임없이정리,적재,수납의노동을해야하는동시에육아를위해그동안‘여성적’이라며낮춰보았던노동을항시적으로해야했다.그러던중작가는자신의공간을존중하는방법을배우게되면서정리에대한인식에대전환을맞는다.정리란내가존재하고싶은공간을정의하고,내가기억하고사랑할것들을재편성하는일이었다.나라는자신을매일같이새로만들어가는일이었다.

엔트로피에쓸려가지않기위하여…오늘도책상을정리한다

작가는데이터과학자로서코드와데이터를정리하여AI모델에게먹이고거기서도출되는결과를정리하는일을하고있다.그래선지물리적인행위로서의정리뿐아니라‘정리’라는사고과정으로수렴되는여러행위에대해서도나름의통찰을보여주는데,이에대해서작가는조금은복잡한감정을갖고있다.정리는“아침에일어나면침대정리부터하라”라는자기계발적명제와멀지않기때문이다.정리를인생의커다란성취를위한첫걸음으로만삼는다면‘5분만투자해서욕실수전을닦아라’와같은5분효율이라는칼날에끊임없이상처를입게될거라고그는말한다.호텔과같은상태의집을유지하고자하는노력에대해서도회의적이다.나와내가족이존재하는공간으로서의의미가지워질만큼의깔끔함이대체무슨소용이냐고그는되묻는다.

작가에게정리란시스템리부트와같은것이다.새롭게시작한다는의미와함께무질서로내달리는세계,내가어떻게할수없는것들로가득찬우주에서내작은공간을사수한다는의미이기도하다.작가는그것에의미를부여함으로써필멸성과잊혀짐에대항한다.작가에따르면너저분하게널려있는책몇권을정리하는것이야말로망치를들고때려부수는것보다훨씬더엔트로피에반항하는일이며,그렇기에오늘도책상부터정리하는것이옳다.“얌전히가진말자.반항하자.엔트로피에쓸려가지않기위하여.”

책속에서

단정하게빗어내린머리에우아하고세련된정장을차려입고흐트러짐하나없는자세로넓은유리창앞에서서멋진야경을내다보는여성의이미지.그녀의코트에는보푸라기가일지않을것이고,머리카락은뻗치지않을것이며,그녀의널찍한아파트어디에서도꽉찬쓰레기통이나아직개지못한빨래더미,머리카락이잔뜩엉킨빗따위는보이지않을것이다.(pp.9~10)

내가정리하지못하는이유는,뭔가를계획한대로끝내지않고다음일을벌이는버릇,그러면서도중도에포기했음은인정하기싫은데서비롯되는일이었다.여지를두는것이다.나는곧돌아올것이라고가짜약속을하는것이다.그러니누가대신정리하는것도질색한다.너저분하게늘어놓긴했지만나는‘아직작업중’인데방해를받는셈이라그렇다.그런현실부정이몇달째라도말이다.(pp.21-22)

주말에는써야할원고를마무리지으리라마음먹었다.그러므로주말아침나는진한에스프레소를좍들이켜고팔을걷어붙였다.그순간갑자기내안의‘정리필터’가작동하기시작했다.사방에치울거리가넘쳐났다.나의능력과시간부족을핑계로오랫동안혼돈구역으로내버려둔서랍안이거슬렸고,몇달간별생각없이잘써왔던그릇장도이제보니너무뒤죽박죽이라새로운분류체계가시급해보였다.식기건조기,전자레인지,오븐등의가전과스테인리스재질의주방기구에덮인얼룩도철퇴를내려야할대상에올랐다.(p.51)

삶의호흡이그렇게가빠질때면비어있는서랍을열곤한다.공간이넉넉한벽장을연다.괜히수납장을열었다닫았다한다.그리고아직빈공간이있음에마음의평안을얻는다.아직이번게임은끝나지않았다.빈공간이있다.나는작고좁은공간에갇혀서몸부림치고있지않다.임시저장소가바로여기있다.발뻗을곳도있고,무언가를잠깐놔둘공간도있다.정리할수있다.나는여유가있다.나는내공간을지배할여력이있다.(p.66)

먼옛날중국에는‘살천도(殺千刀)’라는고문법이있었다고한다.칼로천번을베어천천히죽이는고문이라는데,마르코폴로의중국여행기를바탕으로쓴소설에서처음알게된뒤로소설의다른내용은거의기억나지않고이고문이야기만또렷이남았다.그후로어쩐지‘5분효율’과관련된조언을들을때마다살천도이야기가떠오른다.여기에서5분,저기에서5분떼어빈틈없이쓰는일이근사한나를만들기보다는느슨하고평화로운나에게조금씩생채기를내는기분이다.(pp.79~80)

일관성,통일성,정연함.이런상태를전혀즐기지않는사람은거의없다.스포츠팀을응원할때같은색옷을맞춰입으면왠지더기운이난다.똑같은제복을차려입고한몸처럼절도있게움직이는퍼레이드를보면절로환호가터진다.정확하게각도를맞춰리듬을타는아이돌그룹의군무를보면어떤쾌감마저느껴진다.그렇지만미국에살면서집집마다잘가꾸어진정원을볼때면마음이복잡해진다.(p.97)

큰회사내에서조직변경은아주흔한일이다.잦을때는6개월에한번씩부서이름이바뀌고윗윗윗사람이바뀌며몇년마다한번은소속회사가바뀔때도있었다.이럴때저윗사람들의시선은내가집안정리할때의관점과비슷할까,문득궁금했다.‘이서랍에는이것을넣어두었지.하지만쉽게꺼내쓰지않게돼.저서랍은너무많이집어넣어서넘쳐나는군.좀꺼내서다른곳에넣고,이건아무래도안쓸듯하니그냥버리고,이상자는저방에두는게나을것같고….’(p.107)

우주안의모든것들이무질서로향한다.엔트로피는계속증가한다.아무것도하지않고무기력하게늘어져있는나는점점그것에쓸려간다.‘내마음대로’방치한다고믿고‘내의지대로’망친다고생각하지만나는그저자연적엔트로피에쓸려갈뿐이다.망치를들고때려부수는것보다,너저분하게널려있는책들이라도정리하는것이훨씬더엔트로피에반항적이다.(p.133)

어차피우리모두무(無)로돌아가는삶에서고작책상하나정리하는일이란아무의미없는파닥거림으로폄하될지몰라도나라는개체가있는시공간에서정리는절대적인변화를일으킨다.무질서로내달리는세계,내가어떻게할수없는것들로가득찬우주에서내작은공간은내가사수한다.그것에의미를부여함으로써잊혀짐에대항해싸운다.얌전히가진말자.꺼져가는빛에분노하자.반항하자.엔트로피에쓸려가지않기위하여.(p.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