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20.00
Description
모든 것을 표상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 공허
텍스트 위에 흩뿌려진 하얀 물감 얼룩, 번역, 그 흼에 대하여

클레어 키건, 조앤 디디온, 수전 손택의 번역가 홍한별 에세이집
제목이 암시하듯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번역에 대한 거대한 비유다. 허먼 멜빌이 거대한 흰 고래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모비 딕』의 화자 이슈메일의 입을 빌려 그토록 방대한 서사시를 써냈듯 홍한별 번역가는 이 책의 열네 장에 걸쳐 끝내 완성되지 않을 번역에 대한 글을 책장 위에 그린다. “번역이라는 실체 없는 행위를 말로 설명하려는 기도”이자 “불가능한 번역을 정의하려는 불가능한 몸짓”, 절대적인 사랑이 추동한 집요하고도 아름다운 글쓰기의 모험. 언어와 언어 사이 새하얀 진공에 다가가려는 도전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번역이라는 축에 의해 떠오르고 연결된다.

홍한별 번역가는 지난 20여 년간 100여 권의 책을 번역하며 평단과 독자의 아낌을 받아왔다. 애나 번스의 『밀크맨』으로 한 해 출간된 영문학 번역서 중 한 권의 번역가에게 수여하는 유영번역상을 수상했고, 2024년 서점가를 휩쓸며 다수의 언론과 독자가 최고의 책으로 호명한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번역했다. 가즈오 이시구로, 데버라 리비, 수전 손택, 시그리드 누네즈, 리베카 솔닛, 조앤 디디온, 버지니아 울프 등의 작품이 홍한별의 번역으로, 그가 쓴 우리말로 독자를 만났다. 무한에 가까운 단어들의 목록으로 사전의 세계를 섬세하게 어루만진 『아무튼, 사전』에 이어 두 번째로 출간되는 단독 저서인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텍스트의 이면을 꿰뚫어 그 너머의 침묵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 번역에 관한 에세이다.
저자

홍한별

저자:홍한별
글을읽고쓰고옮기면서산다.지은책으로『아무튼,사전』,『우리는아름답게어긋나지』(공저),『돌봄과작업』(공저)등이있으며,클레어키건,애나번스,가즈오이시구로,데버라리비,버지니아울프,수전손택,시그리드누네즈,앨리스오스월드,조앤디디온,리베카솔닛등의책을옮겼다.『밀크맨』으로제14회유영번역상을수상했다.

목차


흰고래의흼에대하여9
바벨23
배신자들39
나는내가의미하는걸말해59
자비를베푸시오,샤일록79
이광기에는번역을처방한다95
영국식퀼트만들기119
번역을말할때우리가이야기하는것137
그녀는내아기예요163
성경과옥수수빵179
틈새의여자들193
침묵과메아리207
기계번역시대의번역가223
다시흰고래243

주251
참고문헌263

출판사 서평

번역은몸을바꾸는일,변신이자,
고집스러운짐승이인물의자리에들어서는메타포다

언어의수많은가능성중하나를선택해한자리에고정하려는번역이언제나무언가를조금씩저버리고배신하는일이라면,글자를옮기는과정에서의손실이불가피하다면,번역가는언어의하얀진공을어떻게다루어야할까.『흰고래의흼에대하여』는번역을이론으로정리하거나번역의정의를규명하는데주안을둔책은아니다.이책은메타포라는강력한장치를사용해번역에우회적으로다가선다.일찍이리베카솔닛이일견관련없어보이는존재들을메타포로연결시키는인간고유의사고방식이“기계로수행될수없는인간적생각의본질”이라고말했듯,이론과우화,역사와문학에서번역의메타포를가져와조각보를짜내는이작업은섬밀하고정교한언어세계를향한믿음을가장‘인간적인’형식과유려한텍스트로보여주고있다.

번역의사례를들고,번역을해부하고,번역을설명하기위해이책이가져오는이론의조각과문학의메타포들은나열하기만해도흥미롭다.『모비딕』의이슈메일이집요하게좇은거대한흰고래에서시작해,벤야민이극강의직역을주장하며추구한‘순수언어’,언어와번역에관한가장오래된은유인바벨,나보코프가『예브네기오네긴』을번역하며쌓은주석의탑,이상한나라에서내가하는말이내가의미하는것인지혼동하는앨리스,『베니스의상인』의샤일록이필사적으로지키려한기표와기의의결속,세간의웃음거리가된횔덜린의‘미친’번역,앙토냉아르토가광기의치료제로처방받은「재버워키」번역,에드워드피츠제럴드가『루바이야트』를극도로길들이면서완성한진부함의결정체,국제적으로벌어진『채식주의자』번역의충실성논쟁,여성번역가가옮긴최초의영역본인에밀리윌슨의『오뒷세이아』,진스태퍼드의「러브스토리」를번역하는오기방번역가와홍한별번역가사이66년의시차….번역에관한이토록독특하고다채로운화제들을연결시켜직관적이면서도아름다운결속을이루어내는짜릿한지적여정은흔히‘직역대의역’논쟁으로수렴되는번역에관한이야기에지평을넓힐뿐아니라,탁월한에세이스트이자스토리텔러로서홍한별번역가의저력을보여준다.

절대적으로숭앙해야하는원문의권위라는것은없다
번역은원본이그자체로완결성과근원성을지닌다는신화를무너뜨린다

저자가「성경과옥수수빵」에서처음영어를읽고싶어했던때를떠올리며번역의충동과식민주의적맥락을연관짓는것은이책에서특히인상적인대목이다.식민지배를받는이들이지배자의책을베끼고해석하고오독하는과정에서절대적진리로서의책의권위가해체되는과정은,쓰인시점에서못박혀고정되어버린원본이번역을거쳐다시살아나는과정과닮았다.우리는번역을가리켜언어의한계에대한증거라고,번역은무언가를항상배신하는일이라고말하기도하지만역설적이게도번역의불가능성은언어의가능성에대한증거이기도하다.언어의빈틈,행간,침묵,여백을읽는수많은방식은원본을현재의요구에적응하며새로태어나게만든다.“온힘을다해꽉붙들고절대놓아주지않으면”텍스트이면에담긴진실을볼수있다는믿음을,홍한별번역가는이책을통해,그가지금껏옮겨온수많은책들을통해증명하고있다.

이쪽에도저쪽에도속하지않는틈새에있는번역은새로운의미를만들어낸다.지배서사에균열을만들어주변화된목소리가들리게한다.번역은원본이그자체로완결성과근원성을지닌다는신화를무너뜨린다.번역은,이종교배는,혼종은원본을변형하고,아버지를살해하고,혹은아버지를삼키고,거기에내모습을입히고,내것으로만들고,‘최초장면’의트라우마를길들인다.-본문190면

원본은,이미죽어있는원본은번역이없으면정전이되지못한다.원본은번역되면될수록정전으로서위치가굳어진다.드만은원본이번역을필요로하므로순수하게그자체로정전일수없고,또번역될수있으므로최종본이될수도없다고한다.번역은원본을정전화하고,잠정적으로동결하며,이전에는알아차리지못했던원본의유동성과불안정성을드러낸다.서양문학의시조인『오뒷세이아』도끊임없이번역되지않으면그지위를유지할수없다.그렇지만새로운번역본이나올때마다,다양한번역이여러목소리를낼때마다,고정되고절대적이고최종적인원본이라는신화는무너진다.번역을통해우리는원본을받아들이며영향을받아달라지지만,원본도늘번역을겪으며새로운생명을얻고다시복원되고변모한다.『오뒷세이아』4장에나오는해신(海神)프로테우스는사자,뱀,나무,물등어떤모습이라도될수있지만,온힘을다해꽉붙들고절대로놓아주지않으면변신하기를포기하고진실을들려준다.번역도때로는그렇게꽉붙드는일이다.무수히변하는(폴리트로폰)원본을고정하고틈새에스며있던의미까지꽉짜내어진실을듣기위해서.-본문204-20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