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묵주 (그러므로 나는 일기를, 일기는 나를 지킬 수 있다)

종이 묵주 (그러므로 나는 일기를, 일기는 나를 지킬 수 있다)

$16.00
Description
“타인의 시선과 감상이 따르지 않고,
저자와 독자가 대개 일치하며,
쓰는 동안 생기 있는 고독을 선사하는 일기는
일종의 종이 묵주, 종이로 만든 묵주일 수도 있지 않을까.”
소란스러운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날이 있다. 세상은 언제나 태연하게 내 하루를 박살낼 돌을 던지고, 어찌해볼 새 없이 돌에 맞은 날에는 무얼 읽고, 무얼 들어도 눈과 귀 언저리만 맴돈다. 그럴 때 일기를 써본 사람은 알 것이다. 맺힌 말을 술술 풀어내고 일기장을 덮으면, 마음속에 불시착한 돌이 어느새 일기장으로 옮겨가 있는 기분을.
SF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박문영은 그렇게 수천 번의 일기를 썼다. 세상에 홀로 떨어진 기분이 들 때마다 누구에게도 보여줄 필요 없는, 보여져선 안 될 그만의 빈 지면을 급히 찾아갔다. “산만해서, 관심사가 수시로 변해서, 한 우물을 진득하게 파지 못해서, 겁이 많아서, 말을 매끄럽게 할 수 없어서” 택한 것이 일기다. 네모난 일기장은 그에게 언제든 펼칠 수 있는 휴대용 돗자리, 안전한 직사각형의 방이 되어주었다.
‘그러므로 나는 일기를, 일기는 나를 지킬 수 있다’는 부제가 가리키듯 『종이 묵주』는 일기라는 매일의 글쓰기로 자기 자신을 단련해온 과정을 담았다. 과거의 일기 몇 편을 선별해 모은 책이 아니라 일기를 소재로 쓴 에세이들을 엮은 책이다. 일기를 쓰는 것은 혼란한 세상 한가운데 고요히 앉아 묵주를 한 알 한 알 매만지는 것과 같다. 스물여덟 개의 묵주알이 모여 한 달을 표현한 이 책의 표지처럼, 모두에게 일기를 쓸 수 있는 나날이 더 주어지기를, 그렇게 ‘일기인’이 되어 일기를 쓰며 더 안전하고 잠잠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펴낸 책이다.
저자

박문영

저자:박문영
소설과만화와일러스트레이션을다루며힘이닿는대로그림일기를남긴다.『3n의세계』,『방안의호랑이』,『사마귀의나라』,『지상의여자들』,『주마등임종연구소』,『세개의밤』,『허니비』,『컬러필드』,『레이디스,테이크유어타임』등의책이있다.

목차

들어가며일기장이방에있는이유

1부세상의속도에압도되지않는
버스맨뒷자리
가지치기

2부일기의속도
헬스장에서
겨울이별
겨울이별2

3부세상의클리셰를부수는
일기에쓰는것
금기
네모의꿈
행사와행사사이
저자사인본
종이묵주
도넛과탕수육

4부일기의클리셰
관망과자존
스몰토크
진짜와가짜
황조롱이가다녀온곳
원데이
미완의이미지

나가며기억하라,당신은하나다

출판사 서평

한낱종이묶음이었던일기장이어느날내게말을걸었다
“너는가고있다,하고있다,살고있다”

“돌아보면어떤곳에살든발밑이따뜻하거나평평했던적이드물었다.”박문영작가가그간소설에담아낸세상은자주냉기가감돌고,믿었던사람은위로와고통을번갈아주며,뜻밖의상처가일상을무너뜨린다.현실의박문영은그럴때일기장을펼치고숨을쉬었다.“나를역할정도로끊임없이기록했다.[…]손에펜이없다면다른걸들게될까봐겁이난걸까.”내가여기살아있다고발버둥친흔적은일기장군데군데좌표로남아마침내긴궤적을그렸다.
일기장은그런매순간을묵묵히지켜보고,“인격이없는주치의”가되어말을걸어왔다.어느날일기는오늘의인상적인사건을한가지라도알려달라고채근한다.어떤날일기는작가를홉떠보며아픈말을한다.또다른날일기는그런건좀걱정하지말라는듯하품을한다.그리고일기는담담히속삭인다.너는가고있고,하고있고,살고있다고.‘나’를주어에두고내면을파고드는일기,‘일기’를주어에놓고‘나’와의건강한거리감을회복하는에세이가서로를마주하는이책이어느덧왕성해진일기에세이시장에서특별한자리에놓이는이유다.

해가좋은날,일기는우쭐거리며머리통을쓰다듬는다.“할수있다고여겼는데더잘했다.할수없다고여겼는데해냈다.”먹구름이낀날,일기는팔짱을낀채나를홉떠본다.“너는세심하고주도면밀하다.꼼꼼하고음흉하다.상냥하고겉과속이다르다.”그리고아주많은날,일기는담담하게읊조린다.“너는가고있다.너는하고있다.너는살고있다.”그래.나는가고있다.나는하고있다.나는살고있다.도망친일벌처럼지낸다해도,일하지않는벌역시그저벌이듯이.

어떤감정은손으로적어낸뒤에야비로소지상에내려앉는다
일기,나의일부와둘레를돌보는시간

별것아닌것도한껏부풀려내보여야하는자기광고의시대,일기라는문학은독특한위치에있다.글과그림이생계수단인박문영작가에게일기는“출간될리없고,될수도없으며,그래선절대안되는”것이기에더간절했다.일기장에는어떤얘기든마구떠들어댈수있다.발이없어,어디에도가지못할테니.“그는세상누구도모를나의속도전을물끄러미지켜본다.트랙이비워지면비워지는대로,채워지면채워지는대로.나약한나와취약한일기.우리는서로에게뜨겁게무심하다.”
일기쓰기는오직일기장과나,둘사이에서은밀하게진행되는일이기에,때로는남의의심스런눈초리를받기도한다.도대체혼자뭘그렇게쓰는거야?데스노트라도만드나?완전히틀린말은아니다.일기는“‘나’라는임시적이며유한한렌즈가포착한굴절의풍경을빈지면에쌓는것”,어쩌면“편향과왜곡의기록”일수있다.그러나박문영작가는말한다.“하루를자잘하게닦다보면종종세상을감각하는창이같이닦일때가있다”고.아무리시시하고쪼잔하고위선적인이야기로채워진다해도일기는결국그런나를돌아보는거울이되고,바깥으로향한안테나를곧게바로잡아준다.
중요한건스스로에게말걸기를멈추지않는것.세상이아무리괴롭혀도차가워지지않는것.그래야이요란한땅에발을단단히디디고살수있지않을까.“매일읽고쓰고움직이는것만이내가삶을꾸려갈수있는최소한의실재적방식이라는사실을체감한다.이작은행위가나를방임하지않고나의일부와둘레를돌보는일이라추측한다.”

“우리는하나가아니더라도가까스로하나다”
나를지긋이바라보는일기장의시선을느끼며,그렇게일기는계속된다

‘일기(日記)’라는단어자체에서드러나듯,일기는하루단위로초기화되는과업이다.“살아있는동안일기를꾸릴기회가24시간단위로생성된다”는것은인생을신선하게해줄새로운바람처럼느껴지지만,한편으로는은근한부담이기도하다.새일기장을장만하려다문득쓰다만일기장이떠올라주저한기억,다들한번쯤은있지않을까?
“중세소작농이길드에감자를납품하듯”묵묵히일기를쓰는박문영작가도일기를멈춘날들이있다.그런날의빈페이지도나름의의미를가진다.“쓰이지않은일기는공백을통해뒤늦게말한다.이때의나는슬펐다.허약했다.어쩔줄을몰랐다.”그렇게촘촘하고도느슨하게이어진그의일기는이제막시작할소설의씨앗(「가지치기」)이되기도했고,반드시건네야했던고백을조금쯤수월히할디딤돌(「겨울이별」1,2)이되기도했다.
그러나창작의선행도구로서일기의유용함에서나아가작가가주목하는것은매일매일성실히쓰는행위자체다.“세상의큰말은언제나작은말로엮여있다”는것을잊지않고,일기쓰기에대한,그리고자기자신을향한다짐을책곳곳에심어두었다.그리고이험난한세상을살아가는모두에게권한다.일기를써보라고.쓰지못할이유는없다고.그때일기는,가장가까운곳에서나를지켜보는,꼭나를닮은서로의동맹관계가되어줄것이다.

“그저나만큼의나를담아낸기록,그러므로나에게서아주도약하지도비상하지도않은이야기.활자와나는서로를데면데면쳐다본다.지친우리는서로경쟁할생각이없다.공격할의지가없다.나는너의결점을안다.너도나의결점을안다.나는너의강점을안다.너도나의강점을안다.그런연유로우리는하나가아니더라도가까스로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