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기담 : 순한맛

여름기담 : 순한맛

$14.50
Description
읻다가 준비한 한여름 오마카세 소설
《여름기담 매운맛》, 《여름기담 순한맛》 전 2권 출시!
취급은 취향껏, 개봉 후 서늘한 응달에서 읽으세요
열대야와 장마의 계절 여름, 이름 모를 불안감과 지루함에 뒤척이는 당신을 위해 8인의 작가가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어 놓는다. 심연의 공포와 불안을 끄집어내는 《여름기담: 매운맛》 네 편, 겁이 많은 독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기기묘묘하고 엉뚱한 《여름기담: 순한맛》 네 편이 각각 읻다에서 출간되었다. 자극적인 요소를 넣지 않고도 작가의 상상력만으로 깊은 여운을 선사할, 부드럽지만 충분히 서늘한 ‘순한맛’ 소설 네 편을 소개한다.

저자

이주혜,정선임,범유진,전예진

번역가이자소설가.저자와독자사이에서,치우침없이공정한번역을하고자노력하고있다.서울대학교영어교육학과를졸업하고영어로된문학작품을아름다운우리말로옮기는데관심이많아아동작가로활동하면서,현재번역에이전시엔터스코리아에서출판기획및아동서및자녀교육서전문번역가로활동하고있다.역서로『왜요,엄마?』,『레이븐블랙』,『지금행복하라』,『거인나라의콩나무』,『고대이집...

목차

이주혜
초록비가내리는집‥‥19
얼굴‥‥43

정선임
아직은고양이‥‥49
‘아직도’입니까?‥‥86

범유진
우산이나타났다‥‥95
같이가자.같이.‥‥127

전예진
디워‥‥135
다른사람‥‥171

출판사 서평

“부디화분들만은죽이지말아주세요.”
〈초록비가내리는집〉

가끔속이상할때면그런상상을해봐.선생님을따라교장모임에나갔다가선생님의실체를죄폭로하는상상.우리선생님은배운분답게여편네에게꼬박꼬박존댓말을하시지만,내가어쩌다밥이라도태우면어린계집애다루듯회초리로제종아리를찰싹찰싹때린답니다!
─12쪽,〈초록비가내리는집〉중에서

『자두』에서『누의자리』까지가부장제속여성의자리를날카롭게파헤치고재구성해왔던이주혜작가는〈초록비가내리는집〉에서도그고민을이어나간다.시한부판정을받은주인공‘양순덕’이제일먼저하는일은다름아닌키우던화분을정리하는일이다.“그게부부생활이냐,종살이지”라는간편한요약이보여주듯손현자의삶은실상“손찌검만없었지얄미운말본새”와불임의원인을아내의탓으로돌린남편의이기심으로점철되어있다.여생을정리하며남편에게남긴단한문장“부디화분들만은죽이지말아주세요”는이같은상황을단적으로보여준다.그러나이소설을감싸고있는초록식물들을광휘아래라면,‘아내’인나는당신이죽였어도,그자리에놓인‘식물’만큼은당신이죽일수없을것이라고.밑동만남았을지라도그아래는뿌리로단단하게결속되어있는식물처럼모종의결속감이‘양순덕’의삶을든든하게떠받치고있다고해석해도좋을것이다.

마치무서운건귀신과같은미지의존재가아니라,너무나익숙해서그존재에대한의심을거두어버리는일이아니겠냐고,대신결락된그자리에식물의상상력을겹쳐둘것을제안하는이소설을통해‘공포’가주는익숙함을한겹벗긴채여름기담의문을열어본다.

“뭐로변했다고?”“고양이.”
〈아직은고양이〉

“저번에는〈동물농장〉을보다가내가다음생에는고양이로태어나야지했거든.고양이가편한것같아서,라고하니까뭐라고한줄알아?”내대답을기다리지않고수진은말을이어갔다.“은재가한숨을푹쉬더니고양이도사는거힘들어,라고하는거야.이상하지?자기가마치고양이로살아본것처럼.”
─55쪽,〈아직은고양이〉중에서

카프카의〈변신〉이어느날갑자기벌레로변해버린주인공과그에냉담한주변사람들을통해존재의의를잃어버린현대사회의모습을포착했다면,정선임작가의〈아직은고양이〉는고양이로변해버린남자친구를찾으러다니는‘수진’과그커플을목도하는‘나’의일상을통해고양이를태하는도시의세밀화를담담하게그려낸다.

목련나무앞에서책방을운영하는‘나’는우연히학창시절친구‘수진’과그의남자친구‘은재’를만난다.수진은은재가고양이라확신하며,어느날고양이가되어사라져버린은재를찾아줄것을‘나’에게부탁한다.고양이가된은재를찾으러다니는‘나’와수진은도시의가장낮은곳을살피며은근한혐오를마주한다.가령“고양이에게밥을주지마십시오”라고적힌팻말을보는일같은것들.은재를잡으러다니다우연히마주친타로마스터는이들에게뜻밖의묘수을제시하기도하는데,여기서알수있듯이소설의미덕은타인을위한낯선여정을따라가며익숙한도시의풍경을다채롭게감각하는것이다.‘나’가고양이먹이금지라는팻말을마주했을때그종이를가뿐하게무시하고은재를찾아나서는것처럼〈아직은고양이〉는무엇보다타인의자리를상상하고먼저가서닦아두는일을담박하게묘사한다.

“또다.또나타났다.”
〈우산이나타났다〉

7월초부터시작된장마는끈질기게비를흩뿌렸다.날이개어장마가끝났나싶으면다음날장대비가쏟아졌다.그리고망가진우산은,비가오는날에만유빈의현관앞에나타났다.누가가져다놓은것인지알수없는우산들.
─96쪽,〈우산이나타났다〉중에서

우리가비오는풍경을보고가장자주하는생각은‘우산안들고왔는데...’아닐까.그런데우리의의지와상관없이우산이나타나는것도꽤곤란하다.왜냐하면이소설속에서우산의등장은인생의희비극을점지하는순간에만나타나기때문에.장마가시작되던날,‘나’는홀린듯골목길에놓인짚우산을발견한다.물건을고치는상점에서일하는나는재능을발휘해짚에뚫린구멍을고치는데,그순간‘나’는딸‘콩’을돌보지못하고‘콩’은원인을알수없는병에걸리고만다.이후‘나’는자신이일하는상점에서우연히도롱이전설을듣게되고,아이의고통이자신에게서비롯된것아닌지의심한다.

많은기담들은비오는날을배경으로하곤한다.비는온도가내려간날의서늘함,칠흑같은어둠속에서누구도나를구해줄수없음을표기하는장치이기도하지만,언젠가비가그치고햇살이내리쬐는순간을더욱긍정할수있기때문이기도할테다.범유진작가가만든세계도마찬가지다.‘나’가일하는곳은추억‘수리’점이고,‘나’의딸역시우산의재등장과함께회복된다.소설을다읽고난후라면비온뒤에땅이굳듯,고통도추억도회복될수있다는소설의중핵을마주할수있다.

“자네는직장인의타임루프에빠졌다네”
〈디워〉

“에어컨이고장났을때보는영화는?”[...]“〈디워〉잖아요.”내가말했다.서늘한에어컨바람이피부에닿았다.“어제했나?”그가내표정을살피더니인중을긁적였다.“그날이그날같아서.”
─170쪽,〈디워〉중에서

직장생활은상사의반복되는농담에적당히반응하고,어제와별반다르지않는점심메뉴를고민하는일의총합일지도모른다.반복되는일상,나아지지도나아가지도않는삶에서‘나’는‘직장인의타임루프’에걸린다.일상적인과업을성실하게수행해온주인공이타임루프에걸렸다는사실은‘반성없는관성’을지적하는것같아,왠지뼈아프다.그러니타임루프를풀기위한자연스러운수순은“평소와다른행동”일수밖에없다.소설의말미에이르러“회사그만두겠습니다”라고말하는순간은이소설의가장극적인장면이다.내면의고요한열망을힘있게뱉어내는순간은,하고싶은말을하는대신반찬과함께삼키는우리에게커다란카타르시스를제공하기때문이다.

그럼에도이소설이공포소설이라고호명할수있는까닭은〈디워〉가주인공의‘속시원한퇴사기’가아니라,퇴사는“못들은걸로”하는,내일도오늘과같은구내식당에서점심을먹으리라는지리멸렬한실감이있기때문이다.그러나일상을일상적으로대했을때에서오는사건을통과한후“내알바아니었다”로마무리되는주인공의내면적전회를목도한후라면,어쩐지조금더단호한마음으로나를지킬수있을것만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