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주머니와 망각 주머니 (김태선 수필집 | 양장본 Hardcover)

기억 주머니와 망각 주머니 (김태선 수필집 |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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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창문 밖에 비가 내려도 내 눈에는 빗방울이 보이지 않을 만큼 일에 빠져 살았다. 하루 종일 폭우가 쏟아져 대잠못이 터지고 건물 아래 있던 차가 물에 잠기는 줄도 모르고 일했다. 오직 하나 시계가 ‘6시 땡!’ 하기 전에 입력시킨 자료를 본사로 송신시키는 게 내 업무였다. 여린 손으로 어떻게 영업을 하겠나, 덜렁대는 성격으로 계산이나 제대로 할까, 조직을 끌고 나가겠나, 많은 사람의 염려 속에 나는 그 업무를 해냈다.

학창시절 시를 읊고 만화, 소설을 끄적거리며 작가가 되겠다던 문학소녀가 30년 넘게 오직 보험영업에만 몰입했다. 퇴직 후 송충이가 소나무를 먹고 살아야지 하고 다들 지켜봤지만 180도 돌아서서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나는 다른 나무도 먹고 산다는 걸 보여주겠다며 돗자리를 들고 백일장에 따라다녔다.
휘날리는 깃발에 적힌 백일장 글제로 글을 쓰니 옛 선비가 되어 과거 보는 기분이었다. 자그마한 교자상으로 바꾸어 두 팔 얹고 앉으니 백마 탄 기분이었다. 그 순간은 내가 장원급제한 선비가 되었다. 행복했다. 숲 그늘에 앉으면 푸른 산 푸른 하늘이 내려와 원고지를 메꾸고 파란 바다도 원고지에 올라탔다.

환갑이 넘어서야 적성이 아니라 생계에 부딪히면 몸이 적응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30대부터 적응했는데 미처 모르고 살았다. 문학상을 받으며 깨우쳤다. 내가 문학으로 나선 첫길은 시청 시조교실이었다. 예쁘장한 선생님은 환호동에도 수필교실이 있는데 멀리 왔네 했다. 솔직히 정보가 어두워 가까이 있는 것을 몰랐지만 “저는 지방대보다는 서울대를 가고 싶어 멀리 왔습니다.” 했더니 교실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문학은 내 젊은 날 로망이었고, 제2의 인생에서는 크나큰 수확을 얻게 해주었다. 말을 하면 늘 두서가 없는데 글로는 차분히 남길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 대신 글을 선택했다.
저자

김태선

경북 포항 출생
계간 《수필세계》 신인상 등단(2023년)
포항문인협회, 형산수필문학회, 수필세계작가회 회원
형산수필 대상, KT&G 최우수상, 쇳물백일장 장원,
포항소재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 외 다수 수상
수필집 『기억 주머니와 망각 주머니』 발간

출판사 서평

김태선 수필의 건강성

수필은 나를 찾아 떠나는 순례의 길이다. 그 길 위에서 지나간 기억들을 불러와 내가 나에게 말을 걸고, 그 말을 내가 들어주는 것이 수필의 화법이다. 때로는 길모퉁이 찻집에 홀로 앉아 창밖 풍경을 내다보고, 때로는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스쳐간 흔적의 시간과 조우하면서 나를 어루만지며 다독이는 것이 수필이다. 더러는 기쁜 일도 있었을 것이고, 더러는 서러운 일도 있었을 것이다. 잊지 못할 것도 있을 것이고, 잊어버리고 싶은 것도 있을 것이며, 애써 붙잡아 두고 싶은 것도 있을 것이다. 마음속에 앙금으로 박제되었던 그것들을 풀어내어 나를 온전히 세상에 내던지고, 다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자아로의 회귀를 꿈꾸는 작업이 수필이다.
김태선의 수필은 단정하다. 수필의 요소인 주제와 구성, 문체가 합일되어 깔밋하게 잘 정돈되어 있다. 이는 10여 편에 이르는 그의 작품이 각종 공모전에 나가 입상을 거둔 이력으로 증명할 수 있다. 사실 그는 등단 3년 차의 신인에 속하지만 이미 십 년 전부터 문학 공부에 입문하여 온 열정으로 습작을 이어왔다. 문학아카데미를 찾아 낯선 교술을 거침없이 받아들이고, 스스로 자득의 지혜를 깨우쳐 그만의 문체를 탐색했다. 그 사이에 중간 점검을 게을리 하지 않고 공모전의 평가를 통해 탄탄하게 기초를 다졌다. (중략)

수필의 기능과 효용성은 글을 쓰고 그것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에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에 있는 도달점은 ‘깨우침’에 있다. 수필은 지나간 기억의 편린들을 오늘에 불러와 그때를 재해석하여 보관하고 수정하여 보다 나은 내일의 나를 만들어 가는 데 있다. 인간은 늘 부족한 존재이기에 후회와 반성을 되풀이 한다. 그러기에 작품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처럼 하루하루 다짐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중략)

김태선의 수필은 오랜 수련으로 형식과 내용이 단정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일상에서 받아 적은 소재들은 온기가 넘치며 건강하다. 또한 수필의 본질에 맞추어 깨우침과 다짐이라는 주제로 나아가고 있다. 그의 수필은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한 겹 한 겹 쌓여 하나의 인격체를 완성하며,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 - 홍억선(수필가, 한국수필문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