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칠의 시간 (이애란 수필집 | 양장본 Hardcover)

물칠의 시간 (이애란 수필집 | 양장본 Hardcover)

$15.00
Description
마침표가 찍힌 자리, 다시 쉼표를 찍으며

한라산 정상에서 정년퇴직이라는 나만의 사령장을 읽어 내려가던 날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치열했던 직장 생활의 완주完走를 알리는 마침표였습니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는 허탈함과 해냈다는 벅찬 감정이 교차하던 그 순간, 저는 알았습니다. 산 정상은 머무르는 곳이 아니라 다시 내려와야 하는 반환점이라는 사실을요.
산에서 내려와 붓을 들고, 흙을 만지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명함 속의 직함은 사라졌지만, 대신 ‘아내’, ‘가족’, ‘친구’ 그리고 ‘나 자신’이라는 더 본질적인 이름표를 달게 되었습니다.
40여 편의 글을 추려 묶는 동안 저는 제 삶의 숨겨진 흉터들을 다시 어루만졌습니다. 아버지의 화상 자국처럼 쓰라렸던 기억, 지도 교수의 붉은 펜 자국처럼 부끄러웠던 부족함, 이제 와 다시 보니 제 삶을 단단하게 지탱해 준 나이테였습니다. 벌레 먹은 도토리가 숲의 거름이 되듯 부족했던 지난날들이 자양분이 되어 지금의 평온한 저를 키워냈음을 고백합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곁을 지켜준 나의 영원한 오른팔이자 가장 든든한 독자인 남편, 하늘에 계신 그리운 부모님 그리고 가족께 깊은 사랑을 전합니다. 또한 까칠했던 저에게 기꺼이 물길을 내어준 문우와 지인분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인생의 1막이 속도전이었다면 2막은 지구전이라고 합니다. 이제 저는 서두르지 않고 저만의 호흡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려 합니다. 가끔은 숲길에서 멍하니 새를 바라볼 수도 있고 돌뿌리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넘어진 그 자리에서 네잎클로버를 찾는 행운을 만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저의 이 소박한 기록이 당신의 삶에도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는 ‘쉼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책장을 덮는 당신의 마음에 잔잔한 평화가 깃들기를 빕니다.
저자

이애란

경북고령출생
부산대학교문헌정보학박사
울산과학대학교정년퇴직
한국대학신문오피니언필진
칼럼집『오늘,통하다』출간(2022)
경상일보〈이애란의도서관산책〉연재중
월간《한국수필》신인상등단(2026)
대학에서도서관종사자를위한교육자로활동

목차

프롤로그

제1부밥상머리온도

무화과와웃음꽃
같은각도로눕다
오래된약속,한이부자리의거리
혈관의나이테
중장년의경계
밥상실랑이
노모의캐리어
흔적(1)
흔적(2)
눈빛
화상火傷

제2부타인의거리

물칠의궤적
자기검열의언어
타이밍의역설
마음의무게
벽은숨을쉰다
개새끼라는파열음
본능과예절
변화의파문
풍화의잔상
남남
나를짓는시간

제3부숲이건네는쉼표

숲길,쉼표
새멍
행운을키우는네잎클로버
피자두나무의묵언默言
까치밥
쓸모없음의가치
잉걸불
물등에탄잎새처럼
처절한발광
활공滑空
화담和談

제4부다시쓰는이력서

첫강의
삼분의벽
돌팔매질
수국꽃같은이력
붉은메모
무지의값
계영배의교훈
내몫의무게
반려살림
물지게를진초봉이와나
완주

에필로그
발문

출판사 서평

물칠,다가가기와스며들기

이애란의수필은정성을다해지어올린한채의집과같다.깊이땅을파서탄탄하게기초를다지고,나무와돌로써기둥과벽을세웠으며,멀리서보아도선명한푸른빛의지붕,저아름답고튼튼한집이이애란의수필이다.산과호수를배경으로뜰에는꽃과새가어우러지고,굴뚝을타고모락모락피어오르는집안의온기,드문드문사람의말소리가새어나오는한폭풍경이,주제와구성,문체를조화롭게합일해낸그의수필을닮았다.
이애란은올해문단에이름을올린신인수필가다.그런그가곧장수필집을낼수있는문학적에너지는어디에있을까.그는우선학자이다.문헌정보학박사이다.평생도서관과관련한업무에봉직한행정가로서연구와강의,저술활동을이어온이력의소유자이다.그는일간신문과공공기관지에십년넘게글을연재해오고있는칼럼니스트이기도하다.연전에는『오늘,통하다』라는칼럼집을출간한적이있으며,지금은오피니언동아리를이끌어가고있다.이렇듯평생글과책을품고살아온그에게문학역시멀리있는낯선존재는아니었을것이다.(중략)

이애란의수필집은,표제‘물칠의시간’에서부터그의언어적자산과활용의탁월함을증명해보인다.‘물칠’은그림의한기법이다.거칠고두꺼운화선지는바로물감을받아들이지못한다.색을올리기전,맑은물을붓에흠뻑머금게하여종이를충분히적시는작업이바로물칠이다.서로가서로에게스며들게하는이기법이어디그림에서만한정될까.
수필은세상사만물상을담아내는사람의문학이다.세상을살아가면서사람과사람사이의긴장과이완,그러니까기쁨과슬픔,그리움과기다림,아픔과안타까움의서사적구조에서내가나에게,내가너에게,우리에게길을이어주는역할을수필이한다.그러기에‘스며든다’로풀이되는‘물칠의시간’은단순히표제로서가아니라그의수필44편을관통하는주제어가되며,제각각의작품에깔려있는사유의바탕이된다.(중략)

수필가이애란은그의평생이력에힘입어많은장점을가진작가다.넉넉한언어적자산,잘습득한구성법,대상에대한온기의화소들이그의문학적성과를기대하게한다.인생2막을맞아새길에서게된그의문단입성을환영한다.용기를내어발간한첫수필집의노고에도응원과격려를보낸다.
-홍억선(수필가,한국수필문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