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 - 걷는사람 시인선 97

깜깜 - 걷는사람 시인선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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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걷는사람 시인선 97
안성덕 시집 『깜깜』 출간

“평생 짐 졌던 자는 안다
빈 지게가 더 무겁다는 것”

삶을 통찰하는 생명력의 언어
소실점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의 뒷모습을 노래하는 시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200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안성덕 시인의 시집 「깜깜」이 걷는사람 시인선 97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시집 『몸붓』 『달달한 쓴맛』을 내고 ‘작가의 눈 작품상’과 ‘리토피아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안성덕의 세 번째 시집이 마침내 우리에게로 다가온 것이다.
삶을 통찰하는 여행자의 손에는 어떤 풍경이 쥐어져 있을까. 시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축음기판 소리골에서/옛이야기”(「소년은 어디 갔나」)가 시작되듯 어렴풋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이를테면 그곳엔 닮은 듯 다른 얼굴을 가진 손녀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화자가 있다. 숨바꼭질을 위해 “꼭꼭 숨어든 네 살배기” 손녀가 어둠이 무서워 울음을 터뜨리자 “어둠이 두려운 지니야/더 무서운 건 환한 세상이라는 걸”(「깜깜」)이라고 달래는 목소리엔 순환하는 세계를 노련하게 관찰하는 시인의 관록이 담겨 있는 듯하다. 이렇듯 시인의 사유는 삶 전반을 내포함으로써 다층적인 의미를 가지며, “평생 짐 졌던 자는 안다/빈 지게가 더 무겁다는 것”(「포터 마하리」)이라는 상징적인 깨달음으로의 도달이 가능해진다.
그런가 하면 안성덕의 시는 작고 따뜻한 생명력에 담긴 생과 사의 비밀을 찬찬한 걸음으로 톺아본다. “시절도 사람도 나만 홀로 여기 두고 죄다/사라져 버렸다.”(시인의 말)라는 애틋한 시인의 고백은 “별이었다가 달이었다가 다시 티끌이 되어 버린/찰나 같은”(「지나간 사람」) 것들, 그러니까 지금 여기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곧 우리 삶의 총체를 구성한다는 낯선 깨달음으로 확장된다. 시인은 자연물이 가진 개별적 특성을 인식하며 각각의 고유성을 상기하는데, 가령 “가만 내려다보는 낮달”(「낮달이 있는 풍경」)이나 “하늘을 가르는 별똥별”(「75분의 1초」), “오뉴월 대추꽃”이나 “장마 통 맹꽁이”(「외딴집」) 같은 것들이 그렇다. 가까운 곳에 있으나 쉽게 지나쳐 버리고야 마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그들의 고유성을 존중하는 시인의 태도는 삶을 대해야 하는 우리의 마음가짐까지도 넌지시 일러 주는 듯하다.
그러니 개별적인 대상으로부터 시작된 사유를 모아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시의 소임이라고, 시인 안성덕은 말하는 듯하다. “생각도 말도 고면 골수록 쌉싸름하거든요 읽는 사람 맘에 좋고 뒷맛이 오래 남거든요 그게 바로 시예요”(「맛있는 오독(誤讀)」)라는 구절은 그의 작품관을 대변하는 듯 보인다. 우리의 모든 시절은 추억이 될 것이며 삶이라는 여행에도 마침표가 찍히겠지만, 이 세계에 결코 헛된 것은 없다는 것. 우리가 지나온 것들이 실은 우리 안에 천천히 쌓여 또 하나의 세계가 된다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다. 그리하여 생의 면면을 부드럽게 훑는 아름다운 언어와 이미지는 유려한 한 편의 세계로 완성된다.
김정빈 문학평론가는 안성덕의 시 세계가 함의하는 “지나간 시절”에 주목하며, ““평생”의 총량을 웬만큼 채운 사람의 특권은 지나간 사람들을 다시 굽어볼 수 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이는 “지나간 사람을 돌이켜 본다는 것은 그 시절의‘나’를 경유하여 결국 현재의‘나’로 돌아오는 일”을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추천사를 쓴 복효근 시인은 안성덕의 시가 “소실점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의 뒷모습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을 포착하는 동시에 “이것을 단순히 가 버린, 다시 오지 않을 청춘의 시간에 대한 탄식과 회한과 최루성 감상과 지향 없는 자기연민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기하며, “다시 올 수 없음을 이제 몸으로 알”게 만드는 안성덕의 행보에 찬사를 보낸다. 이 책은 우리의 삶에 깜깜한 순간이 도래할지라도 천천히 한 걸음을 떼어 볼 수 있도록 등을 떠밀어 준다.
저자

안성덕

전북정읍에서태어나2009년전북일보신춘문예에시가당선되어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몸붓』『달달한쓴맛』,디카에세이『손톱끝꽃달이지기전에』를냈으며,‘작가의눈작품상’과‘리토피아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1부더붉게물들자는약속
꽃불
깜깜
지나간사람
포터마하리
맛있는오독
엄마생각
입동
일없다
청춘고백
소년은어디갔나
허밍
눈썹처마아래쪼그려
춘포역
개나리꽃이미졌고요

2부걷고걸었으나
우물
영화수산
눈감아주다
수렵의습성
트랙위의사내
모래내시장
개밥바라기
지평선

쏠린다는말
찌그러진
동물의왕국
프리스비
낮달이있는풍경
외딴집

3부스스로종메가되었을터
햇살한통
75분의1초
그믐
등대
꽃이집니다
연분암
봉선화
6월7일,비
바람과풍경
너라는중독
여우불
가을소나타
기척
비갠아침

4부도란도란양철대문집

대사리수제비
돔방
깻잎조림
쑤꾹새
양철대문집

빈말빗말
됫박
섣달
새콤달콤
능금나무가있던집
안성문
겨울2악장
툇마루

해설
지나간시절과지금
―김정빈(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노글거리는바람따라앞산에갑니다

진달래꽃망울이영락없는성냥알이네요

사나흘봄볕에그어대면
확,온산을태우겠습니다
―「꽃불」전문

운다
숨바꼭질하던손녀가
꼭꼭숨어든네살배기가

눈물범벅콧물범벅
하얗게질려있다깜깜
지워진세상헤어나지못한다

고래배속같은
어둠이두려운지니야
더무서운건환한세상이라는걸
속속들이발가벗겨지는거라는걸
알지마라

네눈동자속까만머루알이
내눈엔없구나

못찾겠다꾀꼬리,
제알몸애써안보고싶은
벌거벗은임금님처럼지니야나는
눈을감는다
깜깜
―「깜깜」전문

빛을잃어갑니다그만몸을떨굽니다화무십일홍,영화가길지않다는말인줄만알았습니다꽃이짧다는말인줄까맣게몰랐습니다

꽃은향기가그윽해꽃일까요?빛깔이고와서,모양이예뻐서?그러게요,왜꽃인걸까요?꽃을보고우는사람없습니다

사람의재주가꽃보다더꽃같은꽃을사철피워내지요꽃을보면누구나큼큼코를대지요만져보고영원히시들지않을조화엔,절레절레고개를젓지요

꽃이란꽃죄다집니다담장위덩굴장미가졌고화단가접시꽃도집니다시들기위해피어난꽃,열흘을못넘고져야꽃입니다
―「꽃이집니다」전문

노을반아가예닐곱
나들이갑니다
앞서거니뒤서거니행여길놓칠세라

가슴팍에단콧수건도없이
기저귀에지린간밤처럼
애기똥풀노랗게번진둑길을갑니다
재활보호사선생님따라
병아리마냥
뿅뿅뿅앞만보고갑니다

은빛요양원언덕바지개나리꽃
이미졌고요
―「개나리꽃이미졌고요」전문

물수제비뜨는건너편반백의사내가
텀벙텀벙건넜을청춘처럼
하늘엔구름몇조각,
불러본다고다시노래가되랴
시절이다시오랴
―「허밍」부분

사람도시절도
바람처럼지나가버렸네
계절만오가고,끝내당신은오지않을
춘포역(春浦驛)플랫폼
소리없이기적이우네
―「춘포역」부분

늙은짐꾼은짐이될뿐
이미아무도짐을주지않는다

(중략)

평생짐졌던자는안다
빈지게가더무겁다는것
―「포터마하리」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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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말
사십리밖,
신태인역기적소리가자주들려오고

저물녘구불구불
따라나선소년은어디서내렸을까?
세월저편이었을까?
세상밖다른나라였을까?

아니,아니었다.
그저녁기차에올라탄건내가아니었다.
시절도사람도나만홀로여기두고죄다
사라져버렸다.
2023년가을
안성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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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시인은“바람처럼지나가”(「춘포역」)버린사람과시절에대해노래한다.피는꽃이아니라시든꽃에더자주눈길이간다.“별이었다가달이었다가다시티끌이되어”(「지나간사람」)소실점으로사라져가는것들의뒷모습을노래하고있다.그러나이것을단순히가버린,다시오지않을청춘의시간에대한탄식과회한과최루성감상과지향없는자기연민으로읽어서는안된다.시인은화무십일홍이란말을‘열흘넘기지못하고시들어야비로소꽃’(「꽃이집니다」)이라고재해석한다.‘늙어감’에따라얻은새로운눈뜸이며시야의확대라하겠다.그러니까시인은나이듦의숙명적체험속에서차고기울고다시차오르는우주의순환질서,원리와섭리를발견해내는것이다.그러면서도시편갈피갈피에묻어나는서정성은여전히분홍빛이다.촉촉하다.윤기가자르르하다.시인의촉수는더욱정밀하다.시안은웅숭깊다.돌절구에봉숭아꽃잎찧던그시절이떠올라봉숭아꽃보면가슴이위봉폭포소리보다더쿵쿵거린다.나이먹지않았더라면어찌그절절한서정의감각과언어를익힐수있었으랴.세내산책길에“행여밟힐세라집없는달팽이를풀숲에데려다”(「6월7일,비」)준다.과거를돌아보니역설적으로‘지금여기’가확고해진다.이제바라보는모든것이애잔하다.애절하다.간절하다.다시올수없음을이제몸으로알겠기때문이다.
복효근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