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꽃은 예언이다 - 걷는사람 시인선 98

모든 꽃은 예언이다 - 걷는사람 시인선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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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당신 지금 어디 있나요?
오늘 밤까지 당신께 이 시를 배달해야 해요”

우리 삶에 현현하는 슬픔의 궤적
경험하지 못한 눈물을 서정으로 체험하게 하는 시
1992년 《작가세계》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함기석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모든 꽃은 예언이다」가 걷는사람 시인선 98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과연 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지점에서 함기석의 시는 시작한다.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무고한 죽음을 필연적으로 목도하게 되는 일이다. 시인은 사회 구조 속에서 희생된 이들의 이름을 직접 호명하며, 자본주의 흐름 안에서 빠르게 대체되는 공석을 재조명한다. 시집에 현현하는 명명은 우리가 감히 체험해 보지 못한 삶의 궤적을 우리의 삶으로 성큼 끌어온다. 그러므로 그의 시편에서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겪은 이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이의 눈물이 드러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죽은 듯이 살아가는 이에게 시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무고한 희생이 반복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은 제도의 일이다. 그렇다면 시란 대체 무엇일까. 시는 왜 이리도 무용한 것일까. 그럼에도 왜 우리는 시를 쓰고, 읽는 것일까.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눈물로 점철된 삶을 보고 혹자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 말하겠지만, 화자는 “자기 안의 질긴 슬픔을 씹고 씹”는 사람을 보고 깨닫는다. “검정이 숯의 영혼이었음을”(「술병과 숯」). 우리 모두가 하나의 숯이고 그리하여 종국엔 재가 될 것이 자명한 인생이지만, 타오르는 것이 우리에게 점지된 미래라면, 얼마나 오래 타오를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자리에 시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시인에게 시라는 장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친 마음이 하루를 더 살아낼 수 있도록 그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다. 이러한 미미함일지라도. 그러나 그렇게 얻은 위안으로 우리가 기어코 내일을 믿어 본다면, “죽은 줄 알았던 복숭아나무 가지에/파릇파릇 움이 돋”(「사월」)는 순간도 오지 않을까. 때때로 잔인하게 느껴질 만큼 강인한 자연의 생명력 속에서 시인은 삶의 진리에 한 걸음 다가간다. 시인은 죽음을 경험한 누군가가 그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자신을 포기하지 않도록 일종에 언어의 배달원으로서 시를 쓴다. 숯이 재가 되지 않도록, 그 뜨거운 열기를 지닌 채 오래도록 숯일 수 있도록.
한편 시인의 시에는 소박한 행복에 대한 발견도 담겨 있다. 내가 “배고픈 무덤에 잘 들어가는지” 감시하는 “검시관”(「걷는 사람」)이 그림자처럼 뒤를 졸졸 따라오는 생애에도 기쁨과 즐거움은 도처에 널려 있다. 사람이 “오다 살다 가다”라는 “세 개의 동사로 요약된 시”(「사람은」)라면, 삶은 희로애락이라는 고사성어로 이루어진다. 끝없이 슬픈 와중에도 소소한 기쁨이 있다는 것, 기쁨 속에도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 아름답게 피는 순간 져 버리는 꽃의 숙명처럼, 우리는 죽음의 예언을 껴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시인은 말하는 듯하다. 꽃을 자라게 하는 것은 비와 바람뿐이 아니라고. 눈부실 만큼 찬란한 햇빛 역시 우리 삶에 존재한다고. 그의 발걸음에 맞춰 삶의 궤적을 한 바퀴 돈 뒤 다시 마주한 세상은 이전과는 다른 형상으로 우리 앞에 놓인다. 낯설고 슬프지만, 기이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무용하게 피어오른 한 편의 시로.
저자

함기석

1992년『작가세계』를통해등단했다.시집『국어선생은달팽이』『착란의돌』『뽈랑공원』『오렌지기하학』『힐베르트고양이제로』『디자인하우스센텐스』,동시집『숫자벌레』『아무래도수상해』『수능예언문제집』,시론집『고독한대화』,비평집『21세기한국시의지형도』등이있다.

목차

1부숯의영혼
나팔꽃
김치전
봄이와서
마이크로병원
술병과숯

감은눈
그늘무늬
해바라기
밤눈
무등이왓
고택에서
우리시대의시
DMZ
0416
현대사
국화꽃한송이올리다

2부서쪽에쓰는편지
오래
물오리
분꽃
처가에서
장모
아내의잠꼬대
산수유
무릎속의연못
자갈밭둥지
여수
봄날
오늘의강연
가을동화
배꼽무렵
만다라꽃
먼나라
사월
먼곳

3부발목만남은눈사람
떠난사람
가을밤
첫눈
그대떠나고
겨울밤
서쪽
빈집
가시나무
가정
사람은
망초
달팽이
캉캉
어두워지는거실
고비를건너는여자
빛이타고있다
지도에없는날
배롱나무

4부나는영원히시인이되지못할것이다
하루문답
한낮
걷는사람
나는
장미
눈을위한자장가
시인
패랭이꽃아래
눈속의발레
청석암가는길
명주잠자리
산속의배
시실리
시를찾아서
혹시나해서말인데
겨울화형식
동행

해설
절망과함께걷기
―남승원(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청주공단화학공장앞도로따라
노조플래카드들이어깨걸고
시위중이다

갓길걸으며풀들도꽃들도
푸른색노란색빨간색리본두르고
시위중이고

벚나무살구나무이팝나무
손마다하얀피켓들고구호외치며
시위중인데

나중일씨,독한화학약품냄새에절어
간장속의게처럼
오늘도찍소리한번못하고
―「봄이와서」전문

내가벌겋게익은살을씹는동안
누나는자기안의질긴슬픔을씹고씹었다

잠시후,그뜨겁던불판도서늘히식고
숯에서검정이다빠져나갔다

그때난알았다검정이숯의영혼이었음을
누난아직불붙은한덩이숯임을
―「술병과숯」부분

시청광장에서처형된사형수다
그녀의눈동자에고인12월의밤하늘이고
목에걸린인조목걸이다

육교계단에서추위에떠는고아들
녹슨빗속을최면상태로걸어가는부랑자들이고
젖은불빛이다

낫들이활보하는도시
거리엔웃음없는무녀의피가떠돌고,우리의얼굴은
죽음이화인(火印)으로남긴검은판화들

잠들면종이가자객처럼내눈을베는소리들리고
고열과오한사이에서나의펜은
눈물을앓는새
―「우리시대의시」전문

죽은줄알았던복숭아나무가지에
파릇파릇움이돋고

새소리물소리꿀벌소리
음의물결들,나이테그리며서녘하늘로번져가는

봄날어린샅근처
복사꽃시큼한입술밑에서나는
갓둥지떠난때까치새끼처럼오래울었다
―「사월」부분

첫눈이왔다죽음이흰날개를달고
굴뚝으로내려왔다

나는밤새밭은기침을했다
새벽에도뜨거운이마가가라앉지않았다

첫눈이왔다죽음은
세갈래발자국을찍으며뜰에내려왔다

할머니는내복바람으로부엌에서물을뜨다가
산머루빛깔죽음의눈동자와마주쳤다

첫눈이왔다밤새먼길을걸어
아침이따신물주전자들고대문으로들어섰다

그때식구들울음소리가들렸다
아궁이앞에할머니물사발이떨어져있었다

첫눈이왔다그을음으로덮인부엌흙벽가득
세갈래발자국을찍고죽음이

뒷문으로걸어나갔다어린내눈에는다보였다
할머니발자국도나란히찍혀있었다

첫눈이왔다첫울음이왔다
밤사이할머니가내열을먼들로가져갔다
―「첫눈」전문

세개의동사로요약된시다
오다살다가다

조금긴농담의시도있으니
오다살다울다싸다웃다가다

아그리운사람아
발목만남겨두고떠난눈사람아
―「사람은」전문

그림자가계속뒤를따라온다

내가일생을똑바로걸어가서

배고픈무덤에잘들어가는지

검안하라고빛이보낸검시관
―「걷는사람」전문

모든꽃은예언이다

불꽃들다지리라는

침묵이활짝꽃피자

모든말이시들었다
―「시인」전문

시인의말
비는계속되고나는또
언제돌아올지모르는먼길을나선다
2023년가을
함기석

추천사
이시집은형식과내용의일대갱신을보인다.한국시가가지뻗고자라오면서내장한여러성과와경계를공교한화법으로고개를넘는다.그의메타포는슬픔을경쾌한기억의금속성으로변형시킨다.비극이우울로만남을수없는“빛의문자들”(「DMZ」)로시가된다.“햇살이흙속유골을찾듯붓질하는”(「감은눈」)“동백꽃찢어진그늘”(「그늘무늬」)등은시간을앞지른감각의재현이다.그밑자락은“이번생을당신과함께해미안하다”(「밤눈」)고한다.시는눈송이사이로빠져나가면서도삶의정면을통해현대사라는‘그녀’와대면한다(「현대사」).그것은아주사적인언어인둥근“마침표./마침표./마침표.”(「분꽃」)의까만씨앗의약속이고믿음일것이다.또“옅은살구냄새가딸아이첫울음처럼올라와”(「처가에서」)그울음과이별을만나게할줄이야.역사와사적오브제가이렇게자유롭게소통할수있다니!그리하여두톱니바퀴로맞물려시는다른방향으로돌면서먼곳의슬픔을자아낸다.“여수밤바다아픈물숨소리”(「여수」)는“청주식물대학목련과재학중인/함박꽃”(「오늘의강연」)과함께하는우리시의한진경이다.죽음의이별에서터지는목소리는쓰라린언어로빛난다.죽음이이런의식의씨방을보여줄줄은몰랐다.“봄날어린샅근처”에“다시찾아오라던복숭아뼈하얀그여자”의「사월」은우리시의다른사월이다.삶이든죽음이든역사든사랑이든이모두가“어디로흘러가는아픈꿈일까”(「먼곳」).능선에걸린해의산그림자안으로들어선다.가고없는그녀의“밥물끓는소리”(「떠난사람」)가들린다.우리는“누구의아름다운서쪽일까”(「서쪽」),나는그누구의동쪽삶일까.“반짝,눈뜨는아기별”(「빈집」)과눈마주친다.“캉캉을추며캉캉눈이내리”(「캉캉」)는하늘을쳐다보고침묵을깨뜨린다.함기석시인의시가그립고아름답고외롭다!“내가일생을똑바로걸어가서//배고픈무덤에잘들어가는지//검안하라고빛이보낸검시관”(「걷는사람」)을마주하리.우리는끝에서자신의「겨울화형식」을마주하게될것인즉,빼어난시상이다.“탯줄달린시뻘건해가”보고싶다는열망을담아「시실리」로나도가겠다.소주한잔으로눈송이처럼헤어질터.다른계절하나가이곳에있다.
고형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