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 걷는사람 시인선 113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 걷는사람 시인선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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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걷는사람 시인선 113
이명윤 시집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출간

“그러니까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죽음이 슬픔을 우아하게 맞이하도록”

절망과 슬픔과 죽음을 넘어서는 생성의 힘
조용하고 따뜻하고 웅숭깊은 긍정의 세계
저자

이명윤

저자:이명윤

경남통영에서태어나2006년전태일문학상을받고,2007년계간지《시안》으로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수화기속의여자』『수제비먹으러가자는말』을냈다.

목차


1부우는사람옆에우는사람

고라니가우는저녁
사라진심장
옥수수밭의물고기
완벽한계절
목련
안녕하셉
억새들
오빠들이좋아산동입니다
독거노인이사는집
알람

당신이다시벚나무로태어나
꽁치통조림

2부데스매치
눈사람
불편
복지과가는길
나비
사랑
데스매치
개새끼한마리오천원
재래식무기
맛집옆집
묵념
그동네가로수길
반구대암각화
검게타버린생각들
곡소리

3부유리창에적힌글자
향토예비군의노래
수의
동백아가씨
김우순
무중력도시
좀비
신문
베트남쌀국수
그섬에는
문득정동진
두번째구두
한장의사진
흰죽

4부서러운마음은죽어도펄펄눈을뜨고있다
살구꽃이피었다구
꽃이핀다는것
멸치는힘이세다
신부의아버지
가오치
타이어아웃
폭염
우리나라만세
봄밤도서관
아내
저녁이온다
첫눈

해설
모든생성을긍정하는사유의진경
―김재홍(시인·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시인의말

어느시인처럼진심과반성을담은
시를쓰고싶었으나,
아직도감당할역량이되지않는다.

그속상함이하루하루시를쓰게한다.

그부끄러움이눈처럼쌓이더니,
어느날세번째시집을낳았다.
2024년봄
이명윤

책속에서

사람이죽어도얼마동안,귀는싱싱한이파리처럼살아있다고한다.심장도멎고팔다리도고무처럼축늘어졌는데듣고싶은것이무엇인지,눈도뜨지못하고입술은또거멓게변해가는데신기하게살아있다고한다.친구들발자국소리?엄마가부르는소리?무슨소리가귓바퀴를타고흘러들기를기다리는건지,대체뭐가그렇게궁금한것인지,모든불이꺼지고칠흑같은어둠만깃들어차갑게숨이식어가는빈집에서귀는끝내고집을부리며저홀로남아도둑고양이처럼세상을엿듣고있다고한다.
―「귀」전문

울음은먼곳까지잘들리는환한문장
지붕에부뚜막에창고에잠든
슬픔의정령이일제히깨어나는저녁
나는안다마당의개도목련도
뚝울음을그치고
달도구름뒤에숨는오늘같은날엔
귀먹은뒷집노인도
한쪽손으로울음을틀어막고
저녁을먹는다는것을
―「고라니가우는저녁」부분

그들은머리에총을쏘지만혁명은
심장에있다는것을알지못한다,
라는시를쓴미얀마의한시인이
무장군인에게끌려간다음날,

장기가모두적출되고심장이사라진채
가족의품으로돌아왔다

어느컴컴한건물에심장을남겨두고
정육점에걸린고깃덩어리처럼
거죽만헐렁헐렁남은몸이돌아왔다

심장이사라진몸을어떻게해석하고
이해할수있는지
뉴스에선말해주지않았다
―「사라진심장」부분

그날복지사가무심코내뱉은한마디에노인이느닷없는울음을터뜨렸을때조용히툇마루구석에엎드려있던고양이가슬그머니고개를들고단출한밥상위에내려놓은놋숟가락의눈빛이일순그렁해지는것을보았다.당황한복지사가아유할머니왜그러세요,하며자세를고쳐앉고뒤늦게수습에나섰지만흐느낌은오뉴월빗소리처럼그치지않았고휑하던집이어느순간갑자기어깨를들썩거리기시작했다.이게대체뭔일인가싶어주위를둘러보니,벽에걸린오래된사진과벽시계와웃옷한벌과난간에기대어있던호미와마당가비스듬히앉은장독과동백나무와파란양철대문의시선이일제히노인을향해모여들어펑펑,서럽게우는것이었다.
―「독거노인이사는집」전문

영화가끝나자사람들은
세상이다끝난것처럼한동안검고흰허공을보다가
빈팝콘박스를들고뿔뿔이흩어졌지만,나는

아이들어깨너머로천천히
얼굴과심장이흘러내리며비로소웃던
없는사람을생각합니다

없는사람이끝까지보고있던것이
사람이라는생각도
이어둡고쓸쓸한
영화관복도를지나면
곧마주칠햇살에금방녹아버릴테고

그렇게없는사람은
처음부터세상에없었던사람으로
눈부시게완성되는것이겠지요
―「눈사람」부분

긴줄을기다릴수없어간
옆집은한가하고
옆집은많은생각에잠기게한다
마음을고쳐먹고일어서려다마침
물병과메뉴판을들고나오던
주인여자와마주치고말았다
눈이마주칠때세상은수평이된다
우리는동시에앉았고
어른들이읽는동시처럼무척슬펐다
(중략)
누군가찾을때마다
수학문제정답처럼알려준
맛집의옆집에서
하루하루살아가는여자에게
숟가락을든채돌아보며나는
찌개가참얼큰하고맛있다고말하려다,
그만두었고대신눈이시리도록
차가운소주한병을주문했다
한번도맛집이되어본적없는
옆집의날들이있다

나도맛집옆집에산다
―「맛집옆집」부분

이것은농담에가깝습니다
나는나로부터멀리멀리걸어가야합니다
자꾸만삶을향해흔들리는나를잊으려
당신을따뜻하게안습니다

그러니까질문은받지않겠습니다
죽음이슬픔을우아하게맞이하도록,

태도는끝까지엄숙하게,
―「수의」부분

멸치로태어나멸치는서럽다
어이없이그물에떼로잡혀서럽고
눈앞에서서로의죽음을목도해서서럽다
선창가에서멸치가툭툭튈때
모두들정신없이공중으로떠오를때
아,멸치는비로소세상을배우지만
그다음이없어서럽다
삽으로퍽퍽떠서박스째차곡차곡
트럭에실리는멸치들
코를감싸쥘만큼비린내가심한것은
멸족의굴욕에치를떨기때문이다
―「멸치는힘이세다」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