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인 - 걷는사람 소설집 14

대리인 - 걷는사람 소설집 14

$15.00
Description
“연꽃도 진흙탕에서 피잖아요.”

지금 나의 통증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거대한 사회 담론 속 은폐된 진실을 찾아 묵묵히 나아가는 힘
경남 창원 마산에서 태어나 2019년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노현수 소설가의 첫 소설집 『대리인』이 걷는사람 소설 열네 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앤솔러지 소설집 『그녀들의 조선』을 통해 선보인 바 있듯, 일상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예리한 시선과 긴장감 넘치는 전개가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마침내 한 권의 소설집으로 묶였다. 여기 실린 7편의 소설은 각기 다른 주제와 문제의식을 다루고 있지만, 인간의 실존적 고뇌와 부조리한 사회에 관한 날카로운 통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독자들은 작가의 세계관에 입각한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의 자기 정체성과 진실을 재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표제작이자 작가의 등단작이기도 한 「대리인」에는 “인생은 결국 선택의 문제”라는 의미심장한 대사가 등장하며, 이는 노현수의 소설 세계를 아우르는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그는 탈세와 돈세탁을 목적으로 한 페이퍼 컴퍼니와 관련된 금융 범죄부터 복잡한 기업 내부의 구조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화자가 ‘대리인’으로서 타인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부정부패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독자들에게 깊은 사회적 통찰을 제공하는 이 작품은 사회 곳곳에 만연한 권력 남용, 비리, 그리고 불투명한 권력 구조를 구체적으로 묘파한다. 이렇듯 진흙탕에서 질척거리는 신세로 전락할 내부 고발자의 말로를 알면서도 부정의 거대 담합 청부 카르텔에 맞서는 이야기를 그리는 「대리인」에서부터, 죽음에 맞선 투병의 심리적 정황을 찬찬하고 세밀하게 그려내는 「중첩」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통해 고유한 세계관을 담아내며 탄탄한 서사와 필력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팝업창」은 거짓이 거짓을 낳는 상황 속에서 방황하는 개인의 고뇌를 그리며, 「기억의 침몰」은 지워진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고독 속에서의 방황을 이야기한다. 「상식적인, 너무나 상식적인」은 몰상식이 상식을 지배하고 잠식하는 세계를 담아내며, 「덕봉, 송종개」를 통해서는 동등하지 않은 사회적 규범에 대응하는 조선 여성의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마지막 작품 「딥페이크」는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세계에 속한 인물이 겪는 고통과 혼란을 묘사하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실제로 마주하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고찰하게 한다. 작가는 흡입력 있는 필체로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며, 현대 사회의 이면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해설을 쓴 한영인 평론가가 말한 것처럼 노현수는 “인간과 사회가 앓고 있는 병증의 진실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또, 추천사를 쓴 이성모 평론가가 이야기하듯 노현수는 악덕이 세상 사는 법이며 탐욕이 자본주의의 번영을 이끈다는 틈에 끼어 오가지 못하거나 잠식되는 인간, 그 아포리아의 세계를 천착하는 일에 능숙하다. 그렇기에 노현수의 소설이 ‘나 안의 지옥’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인간상과 미궁의 세계상을 그려내고 있음은 실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상살이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 그러니 해결하지 못한다고 해서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나 관점에서 새로이 탐구하는 출발점을 제시하는 아포리아의 정점에 노현수의 첫 소설집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설의 힘을 믿는”(작가의 말) 노현수의 소설은, 단순한 이야기를 넘어 인간의 실존적 문제와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부조리함의 실체를 냉정하게 직시하게 만드는 경험을 선사한다. 인간 군상의 복잡한 내면을 깊이 탐구하며 독자를 향해 힘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 책을 펼친다면, 우리 주변에 살아 숨 쉴 법한 인물들이 거대한 사회적 담론 속에서 자신만의 진실을 찾아 묵묵히 나아가는 과정을 발견하게 된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면 깊이 있는 성찰의 기회와 고요한 감동의 물결을 생생하게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노현수

저자:노현수
경남창원마산에서태어나2019년머니투데이경제신춘문예에소설이당선되어작품활동을시작했다.앤솔러지소설집『그녀들의조선』을냈다.

목차

대리인
팝업창
기억의침몰
상식적인,너무나상식적인
덕봉송종개
중첩
딥페이크

해설
통증의그림자
―한영인(문학평론가)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작가의말

첫소설집이다.처음이라는말안에는설렘이들어있다.습작을벗어난첫단편의제목이‘이카로스의날개’였다.그렇게두근거리는마음으로소설이라는미지의세계를보고느낀시간들을모아본다.
소설은항상내게무거운짐이었다.이것만내려놓으면편하게살것같은데,그래서몇년동안애써무시한적도있었다.하지만소설은날개를감추고내옆에웅크리고있었다.가슴한편에서가만히나를바라보고있었다.어둠을응시하는맹수의눈처럼섬뜩했다.외면하는순간,날카로운공격에만신창이가될것이었다.힘겹게다시날개를폈다.아직까지는무겁지만그래도견딜만은해서다행이다.소설의힘을믿는다.그힘으로가벼워진다면아주멀리,우주까지라도날아가고싶다.가서티끌같은지구를확인하고다시돌아와이지구에사는사람들을관찰하고싶다.그들의삶속으로들어가눈에보이지않는마음까지아주세세하게이야기할것이다.
늦었지만끝이없는처음처럼,추락이없는날개처럼묵묵히나아가겠다.

사람들의고마운마음들이내주위를감싸고있다는것을느낍니다.내삶의거대한버팀목으로든든하게자리를지켜주고계신어머니,아들로서존경합니다.어머니의무한한사랑에대한작은보답으로이책을바칩니다.항상지지해주고격려해주는아내와아들에게도감사의마음을보냅니다.기꺼이추천사를맡아주신이성모선생님,더좋은소설로선생님의은혜에보답하겠습니다.만나면항상즐거운‘쓸아그데’,그대들의진심어린조언으로많은도움을받았습니다.해설을맡아주신한영인평론가,애정으로읽고작업해준걷는사람편집부에도깊은고마움을전합니다.

2024년가을
노현수

책속에서

서류봉투를뜯었다.같은서류인데도목적이바뀌어있었다.적발하는것이아니라감추기위해서였다.눈은서류를보고있는데글자가눈에들어오지않았다.한글인데도읽히지가않았다.나는눈을감았다가다시떴다.글자가보였다.아니,정확하게는글자의그림자였다.글자에서그림자가떨어져나와안개처럼글자위에떠있었다.떠다니던그림자들이먹구름으로변했다.금방이라도그림자들이비로변해사무실바닥으로떨어질것같았다.
―「대리인」,14~15쪽

“다시생각해보십시오.이것은진흙탕에빠지는심청이와같습니다.아버지의눈처럼국민들의눈을뜨게하기위해사람들은몸을던집니다.하지만심청이는연꽃을타고세상에다시나오지만내부고발자는그냥진흙탕에서질척거려야합니다.”
공익신고센터관계자와통화한내용이었다.나는짐을챙겨호텔정문으로나왔다.예약된택시가내앞에서멈췄다.
‘연꽃도진흙탕에서피잖아요.’나는혼잣말을하면서택시문을열었다.갈라파고스로가서핀치를볼것이다.새로운종의기원이되었다는핀치가너무보고싶었다.
―「대리인」,37~38쪽

주기적으로머릿속의통증이나를괴롭혔다.생각이생각을만들고꼬리를물고이어졌다.생각에질식할것만같았다.하지만내내뾰족한해결책은찾을수없었다.대출금과대출이자에공금까지,일단급한불부터꺼야했지만내게는소화기조차없었다.휴학,개인회생,파산등의단어가어지럽게머릿속에떠돌아다녔다.
―「팝업창」,69쪽

정신이번쩍든다.잊지말자,나에게다짐하듯말한다.하늘을쳐다본다.별들사이로달이떠있다.주변이환하게달무리가생겼다.달아,너는알고있잖아,오늘처럼그렇게밝게,밝게진실을밝게비추어다오,손바닥을맞대어빌면서달에게연신고개를숙인다.달빛을받은세상이오늘따라유난히선명하게보인다.
―「기억의침몰」,100쪽

바람이얼굴을때리듯이지나갔다.바닥에나뭇잎이떨어졌다.무심코보니사람얼굴이었다.눈,코,입,웃고있었다.아,민우였다.망가지고찢긴민우가웃고있었다.놀라일어서려고나무를잡았다.어딜잡아?약점잡아서좋겠네.나무줄기가몸서리치며서교사의손을뿌리쳤다.
―「상식적인,너무나상식적인」,127쪽

그날도꿈속에서나비가되었다.담양본가에있는배나무에앉아있었다.하얀이화의꽃잎처럼날개가바람에하늘거렸다.달착지근한향기가이끄는곳으로날개를퍼덕였다.어느새죽녹원이었다.짙은녹색의대나무숲이끝없이펼쳐져있었다.가장높은가지에앉았다.살랑이며나뭇잎을흔드는바람의숨결이따사롭게느껴졌다.
―「덕봉송종개」,165쪽

누군가뇌를손으로잡고찢는것같다.감은눈에서번개가치듯빨간불이번쩍인다.통증이내몸곳곳을동시에두드리고찢고공중에서돌린다.차라리기절이라도하고싶다.깨어있는것이너무고통스럽다.주먹에서땀이흘러나온다.암세포가동시에미쳐날뛰는것같다.아,그러지마,내가죽으면너도죽잖아,말이입밖으로나오지않는다.
―「중첩」,199쪽

조용하다.세상이멈춘것같다.나는고개를든다.글자들이,소리들이나를가운데두고포진하고있다.명령만떨어지면일제히공격을시작할것같다.옥상이라는글자가조금움직인다.맹렬한속도로나에게달려들어팔에박힌다.따끔거린다.신호라도되는듯글자들이나에게일제히달려든다.팔을휘저어보지만소용이없다.
―「딥페이크」,2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