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

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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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걷는사람 시인선 120
정은기 시집 『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 출간

“우리는 서로에게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
조금 더 멀리까지 사랑하는 일은 달빛 아래에서만 가능한 일”

어둠 속 적막 관찰자의 시선으로−
홀로 서 있지만 ‘연속되는 혼자’라는 상상력 흩뿌려 보기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200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정은기의 첫 시집 『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가 걷는사람 시인선 120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무려 16년 만이다. 일찍이 등단작을 통해 “곁길로 샐 수 없는 것이 슬프다”(「차창 밖, 풍경의 빈곳」)라고 쓰며 삶의 고단함을 환유했던 정은기 시인. 그의 첫 시집은 그 세월만큼 꾹꾹 눌러쓴 고백으로 울울하다. “이쪽으로 가라고 외치기보단 가만히 서서 방향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당선 소감) 작품을 쓰겠다고 했던 바람처럼, 정은기의 시는 고백의 반복과 지속을 통해 결국 타인의 내면을 마주하는 윤리적 행위로까지 확장된다. 일상의 삶은 치열한 갈등과 욕망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시인’이라는 자각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은 내밀한 고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순정한 자기 싸움과 각오 끝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 조금 더 멀리까지 사랑하는 일은 달빛 아래에서만 가능한 일”(「삔이 그랬다」)이라는 씁쓸하고도 아름다운 문장이 탄생한다.
해설을 쓴 남승원 평론가는 “정은기에게는 끊임없이 고백이 이어지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며, 시 쓰기를 통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형식과 구조를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또한 “거듭되는 고백은, 그의 바람대로, 분리되어 왔던 화자와 청자의 오랜 장벽을 허물고, 타인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공유하는 지점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며 이 시집이 지닌 미덕을 강조한다. 이어 추천사를 쓴 박정대 시인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물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피는 ‘적막 관찰자’의 시선으로” 정은기의 시가 존재한다고 평하며 “드러냄을 통해 감추고 감춤을 통해 드러내는” 발성법을 통해 그만의 무늬를 펼쳐낸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러나 내려칠 목도 당신도 없구나/사랑은 더더욱 나의 것이 아니구나”(「낫」), “삶과 죽음을 넘어설 만한 상상력이/우리에게는 없다”(「사물의 방향」) 같은 구절은 어쩌면 변명이 될 수도, 처절한 고백이 될 수도 있다. 시가 될 수도 있고 반성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시인은 고백과 반성을 넘어서 상상한다. 세계 속 나는 비록 혼자이지만, 으깨지고 쪼개지면서도 결국엔 ‘연속되는 혼자’라는 인식을 보여 주는 시편이 바로 「혁명의 원리」이다.
“믹서기 속에서 토마토 하나가 분쇄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지는 어떤 사물에 대해 생각하다가 빠르게 회전하는 모터의 원리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중략) 우리는 나누어져 남남이 되었다 함께해도 남남, 남남남, 남남남남”(「혁명의 원리」).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지는 존재들이 혁명의 원리로 재탄생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 속에서 이 시집은 쓰여졌다. 정은기의 상상력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현실 변혁의 힘을 가진 채로 ‘이미 뒤섞여 있는(ready-mixed)’ 가능성의 존재들이라는 믿음으로 이 시집을 덮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정은기

충북괴산에서태어나,2008년한국일보신춘문예에시가당선되어작품활동을시작했다.

목차

1부있다없다있다없다
경각심
누구나다하는생각
캠핑
오전의아이는한밤중에문장이되고
최댓값
공중산책
기분탓

반짝반짝
비슷한말
불드쉬프
침대중심주의적생활
단한번,영원히

2부미간에잠깐나타나는난폭함
변명
녹는점
숲은간지러운걸어떻게참지
얼룩,얼굴
사물의방향
맹견과애완견
붉은,겨울,나무,눈동자,
혁명의원리
구체적인의자
전선들이엉켜있는방에서엉켜있는생각들을풀어가며쓴글
칫솔의자세
건너편
바이얼레이션

3부우울한구름색의얼굴
단지,분수만있었던오후
검은밤의운동성과물질성
오늘아침나는
한장씩넘기다보면끝내다넘어가는이야기
그런사이
높이치솟는위로
길위에서만난유령과아직죽지않은시체들의밤
꼭꼭,숨어라
감정과검정
현기증
생각보다쉬운이별
나의폐
쉽게깨지는물건
국어사전

4부깊이숨겨놓고가끔씩꺼내읽는파도
사유지
파란대문
인터뷰
갑자기찾아오는느낌
러시아소설같은밤
공정한마음
다행스러운결론
돌멩이
목련꽃이별처럼부서져내리는밤이었다
삔이그랬다
버섯수프를대접받고까닭없이기분이좋아진연출가의마지막무대
해파리
HelloWorld!!!

해설
겹쳐쓴고백
-남승원(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