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과 강

간과 강

$18.00
Description
“인어를 가지고 해부를 했는데, 몸 한가운데 뭐가 있는지 알아?
간. 빛나는 간. 크고 아름답고 육중한 간. 싱싱한 간.”

부드럽고 둔탁한 메스로 원을 그리듯 헤집어
아무런 공허도 아픔도 없이 잘려 나간 세상의 한 단면
도서출판 걷는사람의 희곡집 시리즈 여섯 번째 도서로 동이향의 『간과 강』이 출간됐다. 표제작이자 2024년 국립극단 제작으로 무대화된 「간과 강」은 한순간 세계가 멸망할지 모른다는 정체 모를 징후가 작품 전반에 도사리고 있어 어딘가 낯설고 기이한 현실감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를 희미한 듯 잡히지 않는 미래는 일찍이 퇴색되었고, 과거와 현재도 전망을 상실한 지 오래지만, 작중 인물인 L은 한강을 바라보며 시도 때도 없이 맥주를 마시거나 근원을 알 수 없는 어깨 통증을 호소하는 모습만을 하염없이 보여준다. 그러는 동안 집안에서는 싱크홀이 발생해 커다란 구멍이 뚫리기도, 한강에서는 인어가 출몰하기도 하는 등 기묘한 사건들이 속출하기 시작한다. 아무런 인과가 성립되지 않는 듯해 보이는 서사의 비논리적 전개에 저항하듯, L은 전 세계가 종말의 기운으로 뒤덮여 있다는 깊은 회의감과 냉소 끝에, 찬란한 인어의 형상을 한 첫사랑 V와 극적으로 재회하는 상투의 결말을 맞닥뜨리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이러니와 부조리감을 느낀다. 동이향 작가 특유의 정확한 현실 인식을 녹여 서사의 구조 속에 슬며시 흘려보냄으로써, 우리가 통상적으로 믿고 있는 현실에 대한 관점이 얼마나 신파에 가까우며 낭만에 불과한 것인지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 절망감을 배가시킨 것이다. 이처럼 희곡집의 인물들은 시종일관 현실에서 벌어지는 기이하고 허무맹랑한 사건들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는 대신, 현상 이면에서 작동하는 삶의 보편성에 깊게 침잠하여 보다 구도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현실의 내면에 움직이는 원리들을 하나씩 들춰낸다.
저자

동이향

극작가이자연출가.〈당신의잠〉〈거의엘렉트라〉〈떠도는땅〉〈암전〉등을연출했다.제7회윤영선연극상과제14회차범석희곡상을수상했다.희곡집『어느날문득,네개의문』이있다.

목차

간과강
내가장롱롱메롱문열었을때
암전
해와달에관한오래된기억
지하철존재론

해설
이원적상상력의여왕,동이향_박상현
연보

출판사 서평

동이향작가는한국예술종합학교웹진K-ARTS에서“신화라고하는아주오래된이야기들이가지고있는역경과고난의의미,깊은공감대,그리고커다란원형적인힘들을동시에생각하면서작업하고있어요.‘인류’라는한사람이겪은어떤기억들이지금우리의삶과어떻게연결될수있을지를찾아보고있습니다.”라고밝힌바있는데,이를통해인간이하는일은무엇이든먼옛날신화속에서한번은일어났던일이고,인류는매일그와같은인용을거듭하며수천년뒤에도이와같은상황을재연하고있을것이라고예상하며당면한현재와미래를유추해낼수있을것이다.이렇듯「간과강」을따라읽어가다보면,인류가지구상에서생물학적정체성을유지하는이상,보다진화하고진보하는동시에,우주를구성하는요소로서결국퇴화하고잃어갈수밖에없는깊은공허와무의미함이라는세계의비밀을결국마주하게될것이다.동이향작가는인류가오랜역사에걸쳐구축하고축적해낸신화에시선을던짐으로써지금우리를둘러싼복잡한이야기들의원형을드러내고,나아가이를바탕으로허구를만들어이세계와연결되기위한노력의방식으로이해와위안을제공한다.

이희곡집속등장인물들을관통하는핵심키워드는‘비현실’이다.「내가장롱롱메롱문을열었을때,」는동시대를살아가는현대인들의부품화를비판하고그에따른대체불가능성을시사하는문제의식으로국한지을수없을만큼여러다양하고복잡한주제를함축하고그의미를반복하고복제하고변형하며상징적완결성으로기어코확장해나간다.작품의줄거리는남자24가다니는회사에서최근2년간23명이잇달아자살하는사건이벌어지는데,회사에서는그이유를찾아직원들의심리상태를조사하지만끝내해결책을찾지못한다.결국회사는연쇄자살사건조차자살한직원의숫자에상응하여창의적인재를채용한다는통계와연관지음으로써회사브랜딩차원에서홍보하는그로테스크한결말로내달리는것처럼일견보이기도한다.그리고이는어둡고매캐한장롱이라는비현실적공간을매개로장롱문과지하철문그리고회사의회의실문을넘나들며해설을쓴박상현극작가겸연출가의표현처럼자본에의해살해되는공동체식솔들의모습을중심으로인간복제와연쇄자살을명분으로상호수렴하며이는시대를관통해영원히순환할것임을암시한다.

「암전」은극장과로비라는이중적층위의공간을배경으로경계를허물기도다시세우기도하며나름의영역을구축하는것으로서전개된다.극장의로비는사람들이발을딛고살아가는거대한세계와유사하고,극장내부는현실의극악무도함에커다란공포를느끼고현실로부터탈출하여숨어들수있는안식처로기능하는듯하지만,연극의특정대목에이르면공연을뛰쳐나오는중년관객H를통해극장역시현실을적나라하게반영하고있는또하나의극중극으로작동하며인물들에게작은경악을안겨다준다.극장에서일하는직원‘이지혜’와그녀의유부남연인‘민’그리고그들이근무하는일터에서어딘가정신이온전치못한듯보이는‘노숙자’와‘정’을통해이야기를교차하며극의내연을심화시킨다.나아가이러한극중극은전쟁이야기를전하는동시에이야기가시작되기전과끝난후‘암전’을환기함으로써「잊혀진부대」의전쟁터에방치된군인들처럼현대인역시오늘날의경쟁과열,양극화사회로인해삶을버티다끝내감당하지못하고자신이이야기의주인공인연극을스스로종식시키고마는오늘날의자살자들을떠올리게한다.

「해와달에관한오래된기억」은이분법적인식체계와이원적표출양식사이에서시적요소로구성된희곡을쓰던동이향작가가다시금이야기의원형으로찾아온이유에대해서고찰해볼여지를제공한다.‘할아머니’라는한사람이자,여럿인신화적인물을인류의대표로내세워아주먼옛날부터아주먼미래까지끝없이출현을반복하는해와달아래에서살아남아살아있고살아갈사람들의일상을휘영청비춤으로써영원토록이어지는아름다운순환을조명한다.「지하철존재론」은대도시지면깊숙이설치된지하철노선과같이지하철속공간에서마주친익명의존재들을다양한관점으로지각하고포착한것이다.동이향작가특유의감각적인이미지를통해서사를구축하는서술적기법을한껏달이고달여응축해낸작품으로,몸과말이라는언어적수단에음향과영상의표현매체를덧씌워한편의희곡으로구현해내었다.여러언어와다양한매체를조립하여구체적의미를갖지않는언어만의언어,즉언어의기하학을완성해냄으로써동이향작가를오랫동안지켜봐온관객과독자라면그가긴기간천착해온시적감수성이「지하철존재론」에서절정에이르렀음을인식할수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