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숨겨진 맛

물의 숨겨진 맛

$12.00
Description
걷는사람 시인선 123
최호빈 시집 『물의 숨겨진 맛』 출간

“폭우가 끝나자마자 폭염이 오면
한 방울의 세계가 완성됩니다”

컴컴한 현실의 풍경을 뜨겁게 응시할수록
제 빛을 드러내는 따뜻하고 먹먹한 물의 세계
최호빈 시인의 첫 시집 『물의 숨겨진 맛』이 걷는사람 시인선 123번째로 출간되었다. 201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으로 등단한 이후 13년 만에 출간하는 첫 시집이다. 수상소감에서 “세상의 전부를 이해하기 위해 모든 인간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몸에 반항하는 한 방식으로 오랜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던 최호빈 시인은 “대상과 세계를 해석하는 강한 추동력과 낮은 자의 고통을 존재의 장소에서 불러내는 동일자의 윤리를 보여준다.”는 평을 받았다. 최호빈 시인은 첫 시집 『물의 숨겨진 맛』에서 “폭우가 끝나자마자 폭염이 오”(「물의 숨겨진 맛」)는 세상에서 “한 방울의 세계”를 완성해 냄으로써, 언어라는 마중물로 푹 잠겨 있었던 깊은 침묵을 길어 올려 어딘가 기묘하고 어쩐지 따스한 시 세계를 펼쳐 보인다. 최호빈의 문장을 천천히 읽어나가다 보면, 한 방울의 세계 위로 굴절된 저마다의 삶과 시간이 찬찬히 흘러가기 시작할 것이다.
최호빈의 시집은 무엇보다 돌아감을 매개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돋보인다. 최호빈의 시편은 현실의 한 속성인 망각의 가능성으로부터 벗어나 끝없이 반복되는 기억들을 되돌아보려고 하나, 번번이 기억을 정확히 복구하는 일에 미끄러져 과거의 기억과 무관한 시공간으로 흘러 들어가고 만다. 이처럼 자신의 기억을 과거 속에 놓아두고 잊어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최호빈의 시적 전략은 “변하지도 않고 그대로도 있지 않은, 그냥 무너지는”(「주소」) 현실을 어찌하지 못하고 그저 “방에 업혀 가고”(「스펀지」) 있었다고 중얼거리는 체념의 어조에서 드러난다. 눈을 크게 떠도 천장 가득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어 힘들여 잠 깰 필요가 없었다는 시적 화자는, 암흑을 오래도록 응시하고 침묵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정물처럼 가만히 누워 있을 뿐이다. 그는 마침내 “커다란 방을 날마다 잘게 부수고서야 검은 씨들은 눈을 깜박이지 않고서도, 태양이 붉어지도록 오래 바라볼 수 있었다”(「소리의 집」)고 말하며 자신을 둘러싼 미세한 상태변화를 감지해 낸다. 이는 강보원 문학평론가의 해설처럼 “소, 염소, 사슴, 기린이 뿔”(「상상의 동물」)을 가지고 있는 현실을 간단히 외면하는 것이라기보다, 현실을 구성하는 한 원리의 다른 발현으로서 “뿔을 가진 개”도 있을 수 있는 현실을 위한 기반을 구축한 것이다.
문장의 가능성과 시적 구조에 기대어 무수한 세계를 창조해 내도 “옛이야기에는 권위적인 힘이 있어서”(「팝업북」) 매일 아침 눈뜰 때마다 자신을 마치 “옛이야기 속 어딘가로 데려다 놓은” 듯한 도무지 변하지 않는 현실에 최호빈의 인물들은 슬픔에 침잠하기도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현실은 여전히 “어머니의 아버지의 어머니의 아버지의 여름처럼 소중한 순간은 쉽게 흘러가”(「다음은 뭘까」)는 데 반해, “목숨을 부지하고 식욕을 유지하려는 인간”(「퀘스트」)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서로 딴 곳을 쳐다보며 웃는 적敵들을 못 들은 척 온몸으로 견뎌야 하는”(「틈」)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변하는 현실을 깊숙이 파고들고 “물결처럼 씨들이 움직이는”(「해바라기」) 면면을 파헤칠수록 그곳엔 “사람이 볼 수 없는 의지가 있”어서, 시적 화자는 자연의 의지에 따라 “거울에도 내가 있는” 세계로 건너간다. 이를 통해 모든 기억과 감정은 홀가분하게 잊힐 순 있어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끝끝내 잔상을 남긴다는 세상의 비밀을 발견한다.
이에 기대어 최호빈의 시적 화자는 “나사가 두 개 빠진 세상”(「나사의 홈」)에 절망하기보다 언어라는 나사에 주목하여 나사 두 개를 서로 조이고 조여 새로운 세계를 재조립하고 배열하는 것으로 살아 있음이라는 아득한 빈틈을 연결해 낸다. “평생 잠만 깨다 죽을 것 같아”(「QQQ」)도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울음마저 피곤하게 느낄 때 내게 열리는 것”(「그늘들의 초상」)이 무엇인지 들여다볼수록, “잘 보이지 않는 것들”로부터 시적 순간이 연속적으로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묘하게 균형을 유지하려는, 책상과 옷장과 침대가 말없이 싸”우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체험 속에서, 깜깜한 현실 위에 또 다른 세계가 제각기 겹치고 때론 한꺼번에 중첩된 끝에, 원시적이고 환상적인 세계가 새로이 만들어질 것이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이름을 붙여준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 다른 나무에 대해 말하기 시작”(「생각의 도넛」)하고, 각자가 바라보는 풍경에 대해 “언어의 형태로 데생”(「묵시록의 기사」)한다면, 제각기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눈앞에 부려 놓는 “살아 있는 것들이 절실하게 살아가고 있어서 아름다운”(「거북이」) 정원도 마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설령 그곳이 건조하고 메마른 정원이더라도 괜찮다. “거짓말이 자욱한”(「비스킷을 굽다」) 감정과 감각이 “시들지 않는 꽃잎을 붉게 물들”여 줄 것이니 말이다.
저자

최호빈

저자:최호빈
1979년서울에서태어났다.한국외대프랑스어과와고려대국어국문학과대학원을졸업했다.2012년경향신문신춘문예에「그늘들의초상」이당선되어작품활동을시작했다.현재국립경국대국어국문학전공교수로재직중이다.

목차


1부사건의밑그림
피서
이사
가로세로높이를가진메모
스페이스X
이방인
이방인
물수제비
물의숨겨진맛
쿠키의반
호흡공동체
상상의동물
게1
기린
팝업북
소리의집
다음은뭘까

2부가야할밤처럼검은해바라기가지천
게2
묵시록의기사
가시가있는국수

블랙스완
거북이
감기
모던타임스
돌의기억
주소
말문
발치
해바라기

3부보풀처럼일어나는기분
QQQ
마린스노우
호문쿨루스의겨울
꽃을든남자들
착란

휘파람이부르는
안테나
퀘스트
블랙박스
스펀지

4부유일하게물려받을집
녹색손
나사의홈
웨스트월드
그늘들의초상
전교
투석기의성
곱슬머리
숨은숲
공기커튼
레미콘
돌연히
비스킷을굽다
생각의도넛

해설
빈집이라는세계
―강보원(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걷는사람시인선123
최호빈시집『물의숨겨진맛』출간

“폭우가끝나자마자폭염이오면
한방울의세계가완성됩니다”

컴컴한현실의풍경을뜨겁게응시할수록
제빛을드러내는따뜻하고먹먹한물의세계

최호빈시인의첫시집『물의숨겨진맛』이걷는사람시인선123번째로출간되었다.2012년《경향신문》신춘문예시부문으로등단한이후13년만에출간하는첫시집이다.수상소감에서“세상의전부를이해하기위해모든인간이되기를바랐다.그래서몸에반항하는한방식으로오랜시간아무것도하지않았다.”고말했던최호빈시인은“대상과세계를해석하는강한추동력과낮은자의고통을존재의장소에서불러내는동일자의윤리를보여준다.”는평을받았다.최호빈시인은첫시집『물의숨겨진맛』에서“폭우가끝나자마자폭염이오”(「물의숨겨진맛」)는세상에서“한방울의세계”를완성해냄으로써,언어라는마중물로푹잠겨있었던깊은침묵을길어올려어딘가기묘하고어쩐지따스한시세계를펼쳐보인다.최호빈의문장을천천히읽어나가다보면,한방울의세계위로굴절된저마다의삶과시간이찬찬히흘러가기시작할것이다.
최호빈의시집은무엇보다돌아감을매개로세계를이해하는방식이돋보인다.최호빈의시편은현실의한속성인망각의가능성으로부터벗어나끝없이반복되는기억들을되돌아보려고하나,번번이기억을정확히복구하는일에미끄러져과거의기억과무관한시공간으로흘러들어가고만다.이처럼자신의기억을과거속에놓아두고잊어버리는것에서부터출발하는최호빈의시적전략은“변하지도않고그대로도있지않은,그냥무너지는”(「주소」)현실을어찌하지못하고그저“방에업혀가고”(「스펀지」)있었다고중얼거리는체념의어조에서드러난다.눈을크게떠도천장가득아무것도보이는것이없어힘들여잠깰필요가없었다는시적화자는,암흑을오래도록응시하고침묵에온신경을집중하며정물처럼가만히누워있을뿐이다.그는마침내“커다란방을날마다잘게부수고서야검은씨들은눈을깜박이지않고서도,태양이붉어지도록오래바라볼수있었다”(「소리의집」)고말하며자신을둘러싼미세한상태변화를감지해낸다.이는강보원문학평론가의해설처럼“소,염소,사슴,기린이뿔”(「상상의동물」)을가지고있는현실을간단히외면하는것이라기보다,현실을구성하는한원리의다른발현으로서“뿔을가진개”도있을수있는현실을위한기반을구축한것이다.
문장의가능성과시적구조에기대어무수한세계를창조해내도“옛이야기에는권위적인힘이있어서”(「팝업북」)매일아침눈뜰때마다자신을마치“옛이야기속어딘가로데려다놓은”듯한도무지변하지않는현실에최호빈의인물들은슬픔에침잠하기도고통을느끼기도한다.현실은여전히“어머니의아버지의어머니의아버지의여름처럼소중한순간은쉽게흘러가”(「다음은뭘까」)는데반해,“목숨을부지하고식욕을유지하려는인간”(「퀘스트」)이“자신을보호하기위해서로딴곳을쳐다보며웃는적敵들을못들은척온몸으로견뎌야하는”(「틈」)곳이기도하기때문이다.그러나불변하는현실을깊숙이파고들고“물결처럼씨들이움직이는”(「해바라기」)면면을파헤칠수록그곳엔“사람이볼수없는의지가있”어서,시적화자는자연의의지에따라“거울에도내가있는”세계로건너간다.이를통해모든기억과감정은홀가분하게잊힐순있어도영원히사라지지않고끝끝내잔상을남긴다는세상의비밀을발견한다.
이에기대어최호빈의시적화자는“나사가두개빠진세상”(「나사의홈」)에절망하기보다언어라는나사에주목하여나사두개를서로조이고조여새로운세계를재조립하고배열하는것으로살아있음이라는아득한빈틈을연결해낸다.“평생잠만깨다죽을것같아”(「QQQ」)도계속살아야할이유가여기에있다.“울음마저피곤하게느낄때내게열리는것”(「그늘들의초상」)이무엇인지들여다볼수록,“잘보이지않는것들”로부터시적순간이연속적으로발생할것이기때문이다.“기묘하게균형을유지하려는,책상과옷장과침대가말없이싸”우는장면을물끄러미바라보는체험속에서,깜깜한현실위에또다른세계가제각기겹치고때론한꺼번에중첩된끝에,원시적이고환상적인세계가새로이만들어질것이다.“나는나대로너는너대로이름을붙여준그때부터우리는서로다른나무에대해말하기시작”(「생각의도넛」)하고,각자가바라보는풍경에대해“언어의형태로데생”(「묵시록의기사」)한다면,제각기튀어오르는물방울이눈앞에부려놓는“살아있는것들이절실하게살아가고있어서아름다운”(「거북이」)정원도마주할수있을지모른다.설령그곳이건조하고메마른정원이더라도괜찮다.“거짓말이자욱한”(「비스킷을굽다」)감정과감각이“시들지않는꽃잎을붉게물들”여줄것이니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