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건 명랑한 최선 (반양장)

남은 건 명랑한 최선 (반양장)

$16.00
Description
“진실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환상을 뒤집어쓴 허상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에도
우리에겐 아직 명랑한 최선이 남아 있다
강나윤 소설가의 첫 소설집 『남은 건 명랑한 최선』이 걷는 사람 소설 17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작가의 말에서 평온한 삶 속에서 느꼈던 불안하고 막막한 마음을 이번 소설집에서 빠짐없이 꺼내놓았다고 말한 강나윤 작가는, 경쾌한 문체와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삶의 불안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현시대의 풍속도를 재기 넘치게 그려냈다. 강나윤은 여덟 편의 이야기에서 저마다 개성 있고 다채로운 인물들을 선명히 그려내지만, 그들은 언제나 이방인처럼 겉돌며, 남다른 사고방식과 언행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이상한 눈빛을 받아 내거나 좀처럼 주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때로는 소외감을 느낄 법도 한데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 그들이 결백한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꿰뚫어 본 현실은 온통 부조리하며 의뭉스러운 것투성이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여간해서 좁혀지지 않는 그들과 세상 간의 거리는 웃음과 울음 사이를 왕복하며 얼마간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는 독자들에게는 방심을 유발할 만큼 유쾌하며 더없이 재미있고 사랑스럽게 다가갈 것이다. 그 속엔 삶을 겹겹이 둘러싼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깊은 통찰이 곳곳에 스며 있어서, 언젠가 삶에서 분주함과 불안감을 마주할 때마다, 강나윤의 인물들이 지난한 고군분투 끝에 내린 용기와 확신에 찬 결심들이 하나둘 떠오르게 될 것이다.
표제작 「남은 건 명랑한 최선」의 화자 ‘나’는 대학생으로, 휴학 후 코딩에 전념하는 중이다. 대학 졸업 후 취업 전선에 내던져져 백수로 남을까 봐 두려워하며 닥치는 대로 자격증을 따고 있다. 취업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만큼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지만, 동시에 끝없는 불안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무언가를 막연히 기대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러던 어느 날, 컴퓨터 학원의 홍보 영상을 운명처럼 마주하고 홀린 듯이 수강 등록을 하게 된 그는, 불행이 일찌감치 대비해 놓은 새로운 사건에 간파당해 “간단히 리셋”(「남은 건 명랑한 최선」)되고 만다. 그러나 원점으로 회귀하는 상황이 역설적으로 지금까지의 실패를 딛고 앞으로 더욱 씩씩하게 살아낼 수 있도록 하는 기발하면서도 기이한 술책이 되어준다.
책의 첫 문을 여는 「방금 있었던 일」 속 ‘보람’은 아스퍼거 증후군일지도 모르는 자신의 병리적 증상을 한사코 거부하지만, 정규직 전환을 위해 결국 현실과 타협하며 끝끝내 고수하던 정체성을 내려놓고 자신만의 세계를 단단히 구축하는 이야기를 생생히 그려낸다.
「카피라이터, 김 과장」 속 ‘나’는 출근하는 직원들의 표정이 죽상일수록 회사가 잘 돌아간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곤 입꼬리를 슬쩍 올리는 더할 수 없이 세속에 물든 자본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정작 본인 스스로는 자신의 과욕적 기질과 면모에 대한 자각이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지만, 김 과장이 말했던 ‘진정성’의 의미를 곱씹으며, 그 역시 시스템을 깊이 체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우체국 여자」는 등단 작가이자 우체국 직원인 ‘나’는 문예 창작 교실에 다니는 학생들이 투고하는 원고를 남몰래 빼돌려 심상한 표정으로 읽고는 상습적으로 판단하는 일을 일삼는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마지막 장을 찢은 원고를 우편 봉투에 넣어 매번 다른 신문사에 응모하며 그들의 운을 시험하는 기행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네 찌찌를 찾고 싶다면 신도림역 4번 출구로 와라」에 등장하는 ‘윤’은 게임 회사에 근무하는 안정된 삶의 한가운데서 갑작스레 젖꼭지가 사라지는 일을 겪는다. ‘윤’에게 젖꼭지는 사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남들 다 있는 젖꼭지가 없다는 건 너무하다고 느끼는 모순된 감정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결국 ‘윤’은 자신의 젖꼭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람의 연락을 받고 그를 만나기 위해 신도림역에 간다.
「오늘의 해시태그」의 ‘희재’는 사회적 가치를 수호하는 행위에 높은 가중치를 부여하며,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위한 학생회 참여부터 여성 인권 운동의 일환으로 삭발까지 감행하는 것으로 대단히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를 사상적으로 감화시킨 사람들의 삶을 분석하고 해부한 끝에 그들의 위선과 허위를 기어코 들춰낸다.
「하루」는 오전엔 병원에서, 오후엔 은행에서 하릴없이 떠돌며 해가 지면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한 노인의 심경 변화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이야기다. 기나긴 하루가 거듭되어 완성되는 찰나같이 짧은 세월을 회고함으로써, 그가 그저 살아내기만 했던 삶도 기꺼이 인정받고 존중받을 필요가 있는 인생이었음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주인공인 ‘보람’이 정규직 전환을 위해 스스로를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 병리화하며, 자신이 고수하던 정체성을 내려놓고 결국 밥벌이를 위한 선택으로 마음을 굳히는 이야기 「방금 있었던 일」부터,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이 늙고 쇠약한 노인이 된 ‘나’가 기나긴 하루 끝에 자신의 죽음 이후를 맡겨야 하는 아들 내외에게 결국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로 결심하는 마음의 경과를 다루는 「하루」에 이르기까지. 강나윤의 인물들은 인생이 두서없고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마다, 그 속에서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는 정체성과 밥벌이라는 영원한 딜레마에 끊임없이 봉착한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는 정체성이라는 개념조차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저 허상으로 가득 차 있을지 모른다는 삶의 무서운 실체를 마주하며, 그것이 동반하는 깊은 불안감과 두려움을 더욱 끌어안는 방식으로 명랑하게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환기한다. 『남은 건 명랑한 최선』은 삶을 견고하게 지지하고 지탱하고 있다고 믿었던 토대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현실을 조명하는 동시에, 앞으로 그것을 딛고 마주할 불안 너머의 아득한 세계를 환한 불빛으로 비춰줄 것이다.
저자

강나윤

저자:강나윤
2020년한국작가회의『내일을여는작가』신인문학상에단편소설「우체국여자」가당선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단편소설「방금있었던일」로제15회노근리평화상을받았다.

목차

방금있었던일
카피라이터,김과장
우체국여자
네찌찌를찾고싶다면신도림역4번출구로와라
오늘의해시태그
한낮의열기
하루
남은건명랑한최선
해설
그불안이당신을구원할것이다
진기환(소설가)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저자의말

작가의말을동생집에서쓰고있다.며칠머물게됐는데공교롭게도작가의말을써야하는시기와맞물렸다.소설쓰는것보다힘든게작가의말쓰는거라더니,정말이었다.사흘내내썼다,지웠다,괴로워하다가산책하고,신나게썼다가지우고좌절하고있는데동생이말했다.“밥먹자.”우린곧장남대문시장으로달려갔다.우리는먹는데있어서는언제나의기투합한다.갈치조림을먹고씨앗호떡을하나씩입에물었다.서울역에있는동생집까지걸었다.날씨는적당히쌀쌀했고미세먼지도괜찮음이었다.
“언니,우리좀신기하다.어릴때우리모지리였는데.둘다꿈을이뤘어.”
어릴적우리는이불속에서머리를맞대고막내를어떻게따돌리고놀러갈것인지모의했고,서로의옷취향을비웃다가아무에게도털어놓지못한은밀한꿈을공유했다.20년넘게한방에서살을맞대고살아서서로에대해모르는게없다고생각했다.거기엔과거와현재는물론이거니와미래도있었다.어른의미래는그리드라마틱하지않다고생각했기에우리의미래도그럴거라여겼다.꿈은현실에발을디디지못한채아득히멀어졌다.더는내게꿈을묻는사람이없었다.꿈을향해나아가는건허망이고,삶을살아내는게현실이다,그렇게살아갔다.하루하루를열심히살수록불안했다.통장잔고와경력이쌓이는데도나는뭔지모를불안감에시달렸다.평온한일상이버겁고,더는현실에발을디디고싶지않은순간에아득한그곳에버려두었던이야기들이내게다가왔다.
나의소설들은평온한삶속에서느꼈던불안이다.왜불안한지모른채그저막막했던마음이문장이되었다.내안에가득한불안한마음을마음껏꺼내놓았다.혼자서는도저히해결할수없었던그마음을마주보고보듬어주고싶었는데꺼내놓기만하고동생의말처럼내가머저리라아무것도해주지못한거같아서미안하다.불안한사람이있다면당신만불안한게아니라고말해주고싶다.
경기문화재단에감사드립니다.책이나오기까지애써주신최지애작가,김성규시인,해설을써주신진기환작가,추천사를써주신우다영작가에게진심으로감사인사드립니다.
나의사랑하는가족들에게감사와사랑을보냅니다.내꿈을지지하고응원해준친구들,미애언니,혜정언니고맙고사랑합니다.소설말고드라마를쓰라는조언을아끼지않는,학창시절문학소녀였다는우리엄마에게이책을바칩니다.엄마,저는소설이좋아요.

2025년
강나윤

책속에서

학교앞횡단보도를건널때신호등에빨간불이들어왔다.6차선한복판에서그는두려움에오도가도못했다.죽으려고결심했으면서차에치여죽을까봐겁났다.
“뭐해?”
보행보조기를밀고가던할머니가보람의어깨를툭쳤다.할머니는느긋한걸음으로횡단보도를건너고있었다.모든게멈췄고할머니만고요하게움직였다.보람은할머니를따라횡단보도를건넜다.그들이횡단보도를건넌후에야차들이움직이기시작했다.
“파란불일때들어서기만하면세이프야.괜찮아.안죽어.”
할머니가말했다.보람은파란불,세이프,괜찮아,파란불,괜찮아,웅얼거리며집으로돌아갔다.
?19~20p(「방금있었던일」中)

“아니,근데솔직히김과장님혼자편지쓴건아니잖습니까.보니까AI도움을많이받으셨던데.”
“지금쯤이면깨달았을줄알았는데아닌가보네요.구독자들이말하는진정성이제노동의흔적이고가치예요.저를채용하실마음이없으신거같으니이만가볼게요.”
?72p(「카피라이터,김과장」中)

가끔그런생각이들었다.세상이내게조금더호의적이었다면어땠을까.나도저들처럼천진한얼굴을하고있었을까.천진까지는아니더라도적어도욕망하는것을스스럼없이욕망했을것이다.일만시간의시간의법칙을가볍게뭉개버린것에대한욕망.그것은사유의문제가아니라태생의문제였다.그것을깨닫는데너무오래걸렸다.
?80~81p(「우체국여자」中)

삶이그대를속일지라도노여워하거나화내지말라는시를본순간아이러니하게도윤은삶에화낼수있다는것을처음알았다.대학교양수업에한국문학이있었다.한국문학을배우는시간에왜푸시킨의시가나왔는지기억나진않지만,윤은시를낭독하던강사의목소리와목소리사이에불던바람소리까지똑똑히기억했다.삶은그를속였고속이고여전히속일것이다.삶에화를내봐야,맞서싸워봤자변하는건없다고시인은노래한다.화내지마,노여워하지마,이유를알려고하지마.죽은시인이윤에게속삭였다.
?136p(「네찌찌를찾고싶다면신도림역4번출구로와라」中)

“헐,뭐야.4B전도사님상의탈의한거아니었어요?왜안했어요?”
연희의팩트공격에4B전도사님의미소가순식간에사라졌다.찰나의정적.진실은움찔하는순간에있다.
“비밀!우리빨리노래방가요.연희씨는어떤노래잘해요?”
4B전도사님이찰나의정적을깨며환하게웃었다.연희의뺨을가볍게꼬집으며웃는4B전도사님의얼굴은여전히예뻤다.친절하고다정한사람,타인의아픔에공감하며같이울어주고웃던그가갑자기낯설게느껴졌다.속이울렁거렸다.
“희재야,가자.저여자뭐야.어이없어.비밀이래.너완전여우한테당한거야.”
연희가내팔을잡아끌었다.
“젠더포비아님,어디가요?취했어요?속이안좋아요?”
속내를들켰음에도4B전도사는천진한얼굴을하고우리뒤를따라왔다.그의말간표정이섬뜩했다.
?171p(「오늘의해시태그」中)

왜경제적수준이맞지않는우리와다닐까?김미효성격이라면아무렇지도않게팀을깰수있을텐데.한번도생각하지않았던의문이들었다.
“얼굴이되게빨개요.알러지있어요?”
김미효가물었다.앙상블팀보다여기가더편해요,몇시부터줄을섰어요?열정이대단하시네,말하며환하게웃던김미효와눈이마주쳤다.다시얼굴이화끈거렸다.7개월동안우리는수없이많은밥을먹었고차를마셨다.나는한번도김미효가편한적이없었다.
?206p(「한낮의열기」中)

나도재호처럼딱열흘만병원에서앓다가죽으면좋겠다고생각했다.열흘이면가족들을다만날수있는시간이다.게다가열흘병원비는남은가족들에게부담이되지않을것이다.남은자들에게부담을주지않고적당하게애통해하는시간을주고죽는것.모든늙은이의소망일것이다.재호의죽음이부러웠는데갑자기부아가났다.가슴에서열이치솟아서밖으로나갔다.호상인데,깔끔한죽음인데눈물이쏟아졌다.재호가너무보고싶었다.
?230p(「하루」中)

“처음엔정신병이생겼나싶었는데엄마가너무순수하고적극적으로사니까나도조금은믿고싶어지더라.종말이오기전까지우리못해본것들다해보자.아빠는그때가되게좋았어.종말론이아니라우울증에걸렸다면절대그시간을견디지못했을거야.우울증보단종말론이낫지.”
아빠가환하게웃었다.형이다른코딩언어를연산하기위해작은따옴표를붙이듯종말론을믿는척하는아빠를상상해보았다.진실하지않아도행복할수있다는게이상했다.
?271p(「남은건명랑한최선」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