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리나무 책방

상수리나무 책방

$12.00
Description
기억 저편에 남은 아버지의 헛기침, 아궁이의 연기, 둠벙배미의 풍경까지
사람과 사람 사이, 느림과 비움의 시학
김춘기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상수리나무 책방』이 걷는사람 시인선 124번째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오랜 시간 삶의 뒷면을 들여다보며 써 온 언어를 통해, 기억과 체온이 묻은 풍경들을 고요하고 단정하게 그려낸다. 이 시집에서는 우리가 오래 잊고 살았던,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풍경이 조용히 되살아난다.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의 해설이 말하듯, 이 시집은 “시간에 풍화되어 가는 기억을 소환하고, 자본 도시의 욕망에서 비켜선 느림과 비움의 미학으로 사람을, 사람 속을, 사람과 사람 사이를 노래한다. 그렇게 유행이나 경향을 좇지 않으면서 관습화된 기성의 서정을 타파하려는 김춘기의 시는 “다른 언어”라는 고유한 방법론으로 서정의 본령을 회복하고자 한다.”
김춘기 시인은 오랜 시간, 기억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가족과 고향의 장면들을 시로 써왔다. 그의 첫 시집에는 유년 시절의 냄새, 부모의 손길, 사소하지만 가슴 깊이 남아 있는 장면들이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펼쳐진다. 「대화」에서는 인기척도 없이 들르시는 외할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는 “소주병을 꺼내서 제단에 술을 따르듯이 / 투박한 사기잔에 술을 가득 따르”시기도 하고 그 시간은 지나서 우리 앞에서 사라졌지만 “벽장의 소주병”은 그 시절과 함께 여전히 그대로다. 「저녁의 감촉」과 「아궁이 신발장」에서는 군불 피우는 새벽, 아버지가 신발을 아궁이에 넣어 따뜻하게 데워 주던 날들이 시 한 줄 한 줄에 고스란히 살아 숨 쉰다.
그의 시에서는 “장마에 떠내려간 작은 미나리밭”(「작은 미나리밭을 생각했다」)이 다시 우리 앞에 소환되고 “더는 우리 땅이 아니게 된 둠벙배미”(「둠벙배미전傳」)도 눈 앞에 펼쳐진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그곳’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그래서 시인은 “봄비는 계속 이유를 묻지 않았고/ 하릴없이 찾아드는 통증”에 가슴이 시린 마음을 시에 담는다. 잊은 줄 알았던 풍경이 한 줄의 시에 담긴 이번 시집은 고향의 언어로 과거의 시절을 되돌아본다.
『상수리나무 책방』은 단순한 회고의 시집이 아니다. 시인은 “천년의 속도로 지나던 벌레”나 사소한 통증처럼 익숙하게 멈춰 있는 풍경 속에서, 일상을 견디는 사람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이처럼 김춘기의 시는 유행이나 경향을 따르지 않되, 누구보다도 ‘지금 여기’의 삶에 깊숙이 닿아 있는 시적 실천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저 물방울이 얼마나 많은 사연을 쌓아야 /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룰까” (「다른 언어를 사용하다」). 시간이 흘러도 기억은 스며든다.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천년이 지나도 / 벌레의 껍질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 (「시골 버스 정류장」)은 시골 풍경, 이것은 우리 역사 속에서 사라질지라도 기억의 한 부분으로 시의 한 장면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상수리나무 책방』은 바쁘게 살아온 나날들 속에서도 어딘가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그 시절’의 조각들을 다시 불러낸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일지라도, 이 시집 속 언어는 그곳의 공기와 감촉을 우리 곁으로 데려온다. 이 책은 이제는 어른이 된 우리 모두에게, ‘다시 찾아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이다. 인간적인 서정을 갈망하는 독자들에게, 오래 곁에 두고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정갈한 언어의 집 한 채가 되어줄 것이다.
저자

김춘기

저자:김춘기
전북진안에서태어나《시문학》과《전주일보》로작품활동을시작했다.전북작가회의를비롯한여러단체에서활동하였으며학교에서학생들을가르치고있다.

목차

1부아궁이신발장
대화
저녁의감촉
조문객을받다
작은미나리밭을생각했다
녹두밥
아궁이신발장
노래자의가을
둠벙배미전
고저무
홈런왕
느티나무의유래
슬픔이슬픔이지않게
과객
데드볼
어떤안부
낱말찾기

2부내곡,싸리꽃피다
숲을거닐다
청춘수필
내곡,싸리꽃피다
검객을위하여
수다
우산전
파묘
감각의제국
12월
나무로잠들다
새벽산행
다른언어를사용하다
간진바위
어떤귀향
지렁이

3부밥한번먹자는말
사천오백원
그들의생존법
복수초연대기
봄바다는전설로남는다
희망의다른말들
조롱이의추억
봄눈
잘못든길
오불쌍한것들
그황홀한피폐함에대하여
퇴근길에길을잃다
목숨
우문현답
살아야하는부끄러움이여

4부웃어주고그랬어
폐광지
해탈
돈키호테를읽는새벽
열하일기
청평역에서
강진을꿈꾸며
저어새도시를걷다
안부를묻거든
철없는것들
궁여지책을위하여

자화상
의자
참늦은사랑
피장파장
시골버스정류장

해설
불연속성에서연속성으로가는다른언어
―이병철시인·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추천사

시의질료로농경문화의기억을사용하는것은자칫위험한일이될수도있다.모더니즘으로부터손가락질을받을수도있기때문이다.김춘기시인은과거를수용하지않으려는세태와상관없이“늙어가는냇가”를고집스럽게오래오래바라본다.거기에는가마니짜고아궁이에군불때던아버지가있다.아버지를거역하거나부정할수없는것은그이가생전에모아놓은각양각색의‘끈’때문이다.끈은“아직도미덥지못해여기저기를/자꾸서성이듯다시부탁하듯”시인에게죄책감을불러일으키는매개체다.끈은꼬이고엉켜관계를형성하고길게늘어져서시간을이어가게해준다.“종이위에서스멀스멀내몸을핥고/내혀와발가락에도스며드는풍경들”은오늘날까지내내이어진다.AI인공지능시대에도과거를소환하거나과거의거울로오늘을들여다보려고하는시인의안간힘은그래서먹먹한바가있다.
안도현(시인)

내가시집을좋아하고읽는이유는아무페이지나펼쳐서읽어도된다는점이다.어느책보다시간이안걸리기도하고한편읽는데어디에서읽든시간이오래걸리지않기때문이기도하고,시인들이세상을바라보는시점은내가알고있는단어를다르게사용한다는게신기하기도하고시를읽는재미이기도하다.김춘기시인은“내청춘한조각탈탈털어서그때의폐허라도불러보자”청춘의한조각을탈탈털다니?내가한번도털어본적이없는청춘을털다니그것도한조각을탈탈털어서?먼지나털었지빗물이나털었지,“사천오백원하는백반이시립도서관어떤책보다철학적이고어떤우주보다더커보일때가있다”싸구려백반을먹으면서도백반한그릇이우주로이어지리란상상을할수있단말인가?얼마든지또있다.내가알면서안쓰던단어를어찌그리잘꿰맞추는지검객자리끼절박하다,등등알던단어지만일찍이써먹은적이없던단어들이나올때그단어를처음알았던때로다시돌아가게만든다는거다.단어들의새로운쓰임과이미지들새로운재미찾기를마음껏즐기시길바란다.
전유성(코미디언,공연기획자,작가)

시인의말

고향집상수리나무연둣빛이
유난히지루하고서러운봄날이다
항상더디고서툴기만한시간이
속절없이흘러간다

당신에게소소한안부와
다정한위로한마디건넬수있어서
참다행이다

혹시내가알지못한
미안함고마움이남아있다면
이시집한권건네고싶다
그리고묵묵히한걸음더나아가보겠다

2025년봄날
김춘기

책속에서

사립문저만치뒤로하고가시곤하셨다
위암이다위궤양이다큰수술을받으시고는
술마시면돌아가신다고모두득달했지만
어머니의술따르기는계속되었다
십수년후에도벽장의소주병은
지금외할아버지가마신술병처럼그대로였다
―「대화」부분

파리한새벽자리끼마저얼어붙고
문풍지따라올라오던매캐한연기
똑똑나뭇가지부러지는소리
어느새방이다시뜨뜻해지면
새벽잠이스르르밀려올때
툭툭툭아버지의옷터는소리
헛기침이깊게울리면
알수없는신호음이되어가슴누르다
―「저녁의감촉」부분

작은미나리밭을생각했다
약속은내내돌고돌아
기억이먼곳으로부터돌아와
온몸이더욱아득해질때

고향집에서봄비를맞다가
문득작년장마에떠내려간
작은미나리밭
봄비는계속이유를묻지않았고
하릴없이찾아드는통증
―「작은미나리밭을생각했다」부분

새벽군불을때신아버지는
온가족의신발을아궁이에
가지런히넣으시곤했다
점점이피어오르는연기가
고즈넉한새벽하늘을가르면
아궁이는점점성전을닮아가고있었다
―「아궁이신발장」부분

어두운새벽에논으로덤벙들어가
논일을하면지나던동네사람
이런꼭두새벽에일하는사람있을까싶어
‘둠벙배미에귀신이있다’
아담한둔덕을끼고돌아움쑥한둠벙배미
이젠우리논이아니다
―「둠벙배미전傳」부분

이슬방울지난밤을애태워지새우더니
뚝뚝떨어지는아침을보아라
호흡한점에도저리쉽게굴복하는것을
저물방울이얼마나많은사연을쌓아야
내를이루고강을이루고바다를이룰까

―「다른언어를사용하다」부분

천년의속도로지나던벌레는
오랜만에인기척에놀라
시간을껍질처럼버리고떠났다
기다리던버스나기다렸던손님들은
하나둘
사소한통증처럼
아물지않은상처처럼
익숙하게멈춰있었다
천년이지나도
벌레의껍질이사라지지않을것같았다
―「시골버스정류장」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