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언덕의 여름, 바깥의 저녁 (양장본 Hardcover)

그 언덕의 여름, 바깥의 저녁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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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형상과 흐름, 병의 시간 속에서 피어나는 언어
박성현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그 언덕의 여름, 바깥의 저녁』(청색종이, 2025)은 깊어진 성찰을 통해 독자들을 내밀한 감각의 세계로 이끈다. 2009년 등단 이후 낯설고 도발적인 이미지로 주목받으며 타자의 공간을 탐색하는 상상력을 보여주었다면, 이번 시집은 오랜 투병의 시간을 통해 체득한 존재론적 질문들을 언어로 길어 올린 기록이다. 시인은 병과 고립이라는 지극한 개인적 체험을 통해 오히려 자아의 경계를 허물고, 세계와 깊이 교감하는 새로운 언어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 시집은 병든 몸과 무너진 시간 속에서 역설적으로 형상과 흐름이라는 시적 지형을 재발견하고, 타자와 사랑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저자

박성현

2009년〈중앙일보〉중앙신인문학상으로등단.시집『유쾌한회전목마의서랍』『내가먼저빙하가되겠습니다』『그언덕의여름,바깥의저녁』이있다.제15회한국시인협회젊은시인상수상.

목차

005시인의말


013저수지
014대나무사이옛집
015게발선인장
016생강
017외투
018몸살
019지금과그때의빛
022측백나무가있는정면
024은빛지느러미를향해
026그남자의옆얼굴
028저숲으로나는
030재와노트
032물고기나무
034파안(破顔)의너머
035일곱번째숲에서온


039한밤
040새의입장
042밤의눈
043나는나의부정어
044당신을걷는다
045그곳이어디든너무멀리가지않기를
046나의모든천국
049헝겊인형
050봄이지나갔다
052햇빛이자란다
054내가내옆에누운후
056사라진
058내게서멀고가파른
060아랍여자외전(外傳)
062제8병동


067청첩
068식물,들
069얼굴이있던자리
070혼자서멀리
072죽음이다가오는방식
073누군가앉아있었다
074이그림에없는것은
075카메라줌인
076다락방에서한때
077유령사냥
081약사
084수염
086사막에서혼자
088새와구름사이
089새의페루


093경주·1
094경주·2
095경주·3
096경주·4
097경주·5
098조금더익숙하고조금덜외로운
100유월의요구
102모든감각을세우고
105불의뼈
106납의두건을쓴
108머무르다
110슬픔조차너무먼
111쓴맛
112흰
113새의방향

해설
115형상과흐름그리고새와당신|소종민(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병과시간의균열,그리고감각의미세화

이시집을관통하는핵심적인배경은시인이오랜시간겪어온병이라는체험이다.이전시집에서시인은“첫시집을내고병(病)을얻었다.그곳에세들어살면서내것이라믿었던시간들이모조리금가고붕괴되는걸속수무책으로바라보았다.”는고백을통해,병이단순한육체적고통을넘어시간과자아에대한근원적인인식의전환점이되었음을드러낸다.‘내것이라믿었던시간들’이속수무책으로금가고붕괴되는경험은,예측불가능한병의속성앞에서인간이느끼는무력감을여실히보여준다.그러나이러한단절되고파편화된시간속에서시인의감각은오히려더욱미세하고날카로워진다.

「저수지」는이러한감각의변화를잘보여주는시다.“겨울에집에두고온사진몇장을생각했다/북쪽에서박하향의은근한/빛이자박거렸다/저녁쓰르라미가잠깐울다갔다”는구절은,거대한흐름이멈춰버린듯한병의시간속에서도미미한감각의흔적들이여전히존재함을일깨운다.사진이라는정지된이미지,박하향처럼은근히스며드는빛의감각,그리고짧게울다사라지는쓰르라미의소리등은일상적인시간의지속이무너진자리에서더욱선명하게다가오는순간들이다.이는병이부여한강요된고립속에서시인의의식이바깥세계의미세한파동에집중하게되었음을의미한다.붕괴된시간의틈새로스며드는이러한감각들은시인에게또다른형태의시간을열어주고,그안에서새로운언어가움틀수있는바탕을제공한다.


자아해체의흐름,그리고물성(物性)의언어

박성현시집에서가장주목할만한시적개념은‘흐름’이다.이‘흐름’은단순한물리적움직임을넘어,자아의고집을해체하고무아(無我)의상태로진입하는시적경지를의미한다.「모든감각을세우고」에서시인은“외투를벗어버리고/흐름이되자고당신이말했네”라고한다.여기서‘외투’는자아를감싸는모든관습적이고방어적인껍질을상징하며,이를벗어던지는행위는자기자신으로부터의해방을지향한다.

시인은‘흐름’이되는순간,“그것은중력을밀어내고/구름위로단번에솟는기분”이라고표현한다.육체의중력과병이주는속박으로부터벗어나구름처럼자유롭게솟아오르는해방감은,병이라는극한의상황속에서얻어지는역설적인깨달음이다.시는더나아가“흐름이된다는것은/사물의모든방향을자유롭게/풀어주는것”이며,“흐름으로남는다는것은/오로지나의의지로나를밀어내는것”이라고선언한다.‘나의의지로나를밀어내는것’은자아중심적인시선을버리고세계의모든존재들과동등하게교감하려는의지의발현이다.소종민평론가에의하면이는“아상(我相)을지우고무아(無我)의상태로‘나’를밀어내는것”이다.자신을비움으로써,타자와세계의물성(物性)이온전히스며들수있는빈공간을마련하는행위다.

이러한흐름의감각은자연의미세한움직임을통해더욱구체화된다.「식물,들」에서시인은“빛이쏟아졌다/손바닥에뭉쳐있다가녹으면서살속을파고들었다/빛의육체를만져본것은그때가처음”이라고고백한다.빛이단순히시각의대상이아니라,피부속으로스며들어육체를이루는경험은시인의감각이얼마나예민하게세계와교감하고있는지를보여준다.또한「햇빛이자란다」에서“단지바라보기만했는데,식물을타고오르내리는물의미세한박동이들려왔다”고쓴대목은,사물을꿰뚫어그본질적인생명력에다가서는시인의통찰력을드러낸다.이처럼박성현의시에서자연과사물은단순한배경이아니라,병든몸의감각을대신하고,흐름의언어를형성하는주체로기능한다.


고립의서사,그리고사랑과타자의역설적출현

시집전반을감싸는정조는고립이다.병든몸은필연적으로세상과의단절을야기하며,시인은‘고립’이라는단어를반복적으로사용한다.그러나박성현의시에서고립은단순한절망의표식으로끝나지않는다.오히려그고립은타자를불러오는역설적인조건으로작동하며,사랑이라는구원의통로를열어준다.

「경주·2」는고립속에서‘당신’이라는타자가스며드는순간을포착한다.“빗방울하나가닿은것인데순간수면이파르르떨렸다”는미세한시작은,모든것이단절된듯한고립속에서도작은외부의자극이커다란파장을일으킬수있음을암시한다.그리고마침내시인은고백한다.“사랑은그렇게온다/다른눈은감겨있고오직한개의시선만이/당신에게길을내었다”.여기서‘다른눈이감겨있다’는것은세속적인시선이나방어적인자아가차단된고립의상태를의미하며,‘오직한개의시선’은오로지‘당신’에게로향하는순수한시선을뜻한다.이구절은고립이단절을뜻하지만동시에사랑이스며들수있는유일한통로임을역설적으로보여준다.사랑은낭만적인감정이라기보다,병든몸을해체하고자아를흐름속에놓이게하는근원적인힘으로작용한다.

더나아가「나의모든천국」에서는이러한타자의수용이극대화된다.“당신을나의모든천국이라불러도/전혀거리낌없지//그러나천국은/살아서는갈수없는곳/결국당신은/나의모든죽음이었네”라는구절은,사랑하는타자가곧자신의궁극적인지향점이자동시에소멸의대상이될수있음을암시한다.‘천국’과‘죽음’이라는상반된개념이‘당신’이라는존재를통해하나로연결되는역설은,타자를온전히받아들이는행위가자아의한계를넘어무한한세계로확장되는과정임을보여준다.

또한시인은「얼굴이있던자리」에서‘얼굴없는’자신의모습을통해타자의시선을내면화한다.“한노인이손가락질했다/당신처럼표정이아예없는사람은처음본다고말했다”는구절에서자아의정체성을상징하는‘얼굴’의상실은,자신을타인의시선으로바라보고객관화하는과정을의미한다.“내손에남겨진굴곡은여전히깊고단순한데왜내게얼굴이없다고말했을까”라는질문은,병을통해육체적형상이흐릿해지고자아가해체되는경험이타인의눈에어떻게비치는지를성찰하는시인의태도를보여준다.「내가내옆에누운후」에서“내가,/내옆에눕는다/늙어가는/그얼굴을지켜본다”고쓴대목또한,자신을대상화하여바라보는시인의시선을통해병으로인해변모하는자아의모습을냉철하게인식하려는노력을엿볼수있다.이는고립과병이자아를해체하지만,그해체를통해역설적으로타자와깊이연결될수있는가능성을열어주는중요한전환점이된다.


‘새’의은유와방향성의재구성

박성현의시집에서‘새’는특별한은유로반복해서등장한다.‘새’는죽음과삶의경계를넘나들고,고립을초월하여새로운방향을제시하는존재다.「새의방향」은이시집의중요한전환점이되는작품이다.시인은“나는죽었고/누군가내시체를묻었다”는충격적인고백으로시작한다.“나는죽었고”라는문장은실현불가능한역설처럼들리지만,시적허용안에서자아의근원적인소멸과변모를암시한다.‘오래된정류장’,‘뒤틀린잡목들’,‘지저분하게변색된지방도로이정표’등이‘내가본세계의마지막풍경’으로제시될때,이는병으로인해닫혀버린유한한세계의끝을상징한다.

그러나시는여기서멈추지않는다.“이제나는죽었고/신은나를완벽한고립에던져넣었다”는절망적인진술뒤에“그는나를덮은흙더미에또다른이정표를꽂았다/덧칠된화살표위로/새가날아갔다/새가날아가고방향이생겼다/황혼이다시깊어졌다”는반전이일어난다.죽음과완벽한고립의자리에서‘새’가출현하고,그‘새’의날갯짓을통해비로소‘방향’이생성되는것이다.여기서‘새’는시인의자아가죽음을통해변모한새로운존재이거나,혹은절망속에서피어나는언어자체를의미할수있다.육체의소멸과고립을경험한시인의자아는‘새’의형상으로재탄생하며,삶의새로운방향성을찾아나선다.

이러한‘새’의움직임은비단「새의방향」에만머무르지않는다.「다락방에서한때─북촌방향5」에서“노래에깃든모든장소가한꺼번에떠올랐다”고쓴소년의노래처럼,‘새’는고립된공간에서시간을넘어선자유로움을부여한다.‘새’는병든몸의한계를초월하여,감각과언어의새로운지평을열어주는매개체이자,시적자아가궁극적으로도달하고자하는자유의상징이다.


무너진시간에서피어난언어의꽃

박성현시인의『그언덕의여름,바깥의저녁』은오랜투병과고립이라는지극히개인적인경험을보편적인인간의실존으로확장시키는심도깊은시집이다.시인은병으로인해금가고붕괴되는시간속에서좌절하기보다,오히려그틈새를통해세계의미세한감각들을포착하고,자아를해체하여‘흐름’이라는자유로운상태에도달한다.이러한과정속에서고립은역설적으로타자와의깊은만남과‘사랑’을불러오는통로가되며,‘새’라는은유를통해죽음을넘어선새로운삶의방향성을제시한다.

이시집은“형상과흐름,그리고새와당신”의시집이라는소종민평론가의규정과같이병든몸의기록이자동시에사랑의시학이며,언어가자기자신을끝까지밀어내고해체할수있는가를묻는실험적도전이다.박성현의언어는무너진시간속에서피어난한송이꽃처럼고립은사랑으로이어지고병의시간은새로운세계의시작이될수있다는강렬한메시지를우리에게전달한다.그의시는불확실한시대속에서살아가는우리에게고통속에서도빛과희망을발견할수있는감각의가능성과언어의힘을일깨워준다는점에서한국시단에서보기드문빼어난성취라할수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