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가는 사람 (김진환 시집)

건너가는 사람 (김진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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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김진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건너가는 사람』이 출간되었다. 이 시집은 불 속을 건너는 자의 심정으로 삶의 경계를 통과하는 존재의 기록이자, 사라짐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생명의 찬가다. 불멍에서 시작된 언어는 틈새의 잡초처럼 버티고, 바람과 비, 빛과 소리 속에서 모성의 온기로 되살아난다. 김진환의 시는 절제된 문장 속에 인간 존재의 온기를 담아낸다. 그는 불과 흙, 어둠과 빛의 경계를 넘나들며 ‘건너감’의 미학을 완성했다. 이 시집은 오늘의 한국시가 잃지 말아야 할 깊이와 품격, 그리고 생명의 윤리를 아름답게 증언하는 시적 성취다.

불 속을 건너는 자 - 존재의 기원으로부터

김진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건너가는 사람』은 제목부터 하나의 행위, 곧 건너감의 동사를 품고 있다. ‘건너가는 사람’은 단순한 이동자가 아니라, 삶과 죽음·내면과 외면·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오가는 존재이다. 시집의 첫머리에 배치된 「불멍」은 그 상징적 서막이다. “누군가 불 속으로 달려든다/ 텅 빈 낯빛 망설임도 없이”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시인이 자기 내면의 한 조각을 불길 속으로 던져 넣는 모습을 본다. 불은 파괴의 이미지이자 정화의 이미지다. 김진환의 시는 바로 그 양가성 위에서 시작된다. 불은 업보와 기억, 억눌린 감정의 잔재를 태우지만, 동시에 언어의 재를 남긴다. 시인은 그 잿불을 “휘저어줘야겠지”라고 말하며, 자신이 불태운 마음의 잔해 속에서 다시 언어를 길어 올린다.

이러한 장면은 시인의 시적 기원을 드러낸다. 시 쓰기는 불 속으로 뛰어드는 행위, 곧 자기를 소멸시킴으로써 새로운 목소리를 얻는 의례다. 김진환의 ‘건너가는 사람’은 바로 그 소멸의 문턱을 넘어가는 존재, 혹은 불길과 어둠의 경계에서 언어를 부활시키는 자로 읽힌다. 따라서 이 시집은 삶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시의 존재론을 탐색하는 장편의 시적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저자

김진환

1956년서울종로구에서태어났다.계간《문학과창작》을통해시인으로등단했다.1976년원불교공모전에서동화가당선되었다.시집으로『어리연꽃피어나다』『건너가는사람』이있다.

목차

005시인의말


013불멍
014마음궤적
015헛가래
016틈새
017혼불망각
018칡꽃
019건너가는사람1
020건너가는사람2
021건너가는사람3
022건너가는사람4
023건너가는사람5
024건너가는사람6
025건너가는사람7
026마음풍경
027된볕
028월동이후
029어떤맛일까
030천둥작달비


033마음세초
034짚라인
035안개는개
036툭던지고싶다
037다시사랑하기
038몸가시
039겨울바다3악장
040산소리
041씬벵이낚아채기
042언덕에서는이유
044툭투득
045그집
046백두대간금강송
047흉터는상처보다가렵다
048까투리복숭아
050순지르기
052공
053새벽바람비


057가자미처럼
058옛집
060봄날의기도
061까치걸음
062가지치기
063구순의지팡이
064박힌업보
065깡통
066마음간격
067나는곱빼기
068사나사일주문
069싸리울타리
070물수제비
071뻐꾸기시계
072십팔원오십전
073평상
074PorUnaCabeza
075고래비상을꿈꾸다


079단심
080소소리바람
082돌담집붉은동백
084안부
085하지감자
086눈색이꽃
087산노루
088유둣달
089고성천진바다
090내사랑,세뇨테에잠들다
092새벽숲
093물총새
094가위바위보
095다락논
096웃비
097유혹
098고드름
099밭이랑삼백평


해설
101생명의시심詩心과모성적사랑|이성혁(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틈새의생명과언어-미물의숭고함

이시집에서가장인상적인정조는‘틈새’와‘잔여’에대한시선이다.「틈새」의“구멍이숭숭뚫린돌담/틈새를비집고나온잡풀”은폐허와생명,시간과욕망이공존하는이미지다.시인은이틈새의풀을뽑으려다끝내포기한다.왜냐하면그풀의뿌리는“죽자살자걸어잠그는목숨이니”라고,스스로의생을움켜쥔의지의은유이기때문이다.

김진환의시세계는늘이런‘틈’에서시작된다.그는자연을낭만적으로노래하지않는다.오히려부서진돌담,흙의상처,헐거운호흡속에서생명의심지를본다.“목숨줄하나움켜잡고/씨줄날줄자아내다가/멈칫숨죽이는거미”(「짚라인」)와같이,미물의생존은시인에게하나의윤리적감각으로확장된다.생명이란거창한자연의합창이아니라“손가락하나들이밀기도빠듯한”틈바구니에서조용히버티는목숨들의연대다.

이러한생명의감각은김진환시의언어적질서와도맞닿는다.그의시어들은결코장식적이지않다.한줄의문장속에곧은숨결과낮은온도를남긴다.“둘둘말아다시밀어넣는다”(「헛가래」)라는절제된리듬속에는고통을언어로봉합하려는인간적몸짓이있다.말하자면그의시는근육의미학,즉상처와버팀의언어학이다.

‘건너가는사람’의존재론-나와타자,기억과사라짐

연작시「건너가는사람」은이시집의중심축을이룬다.각편에서‘그사람’은시인의앞뒤를오가며,때로는타인으로,때로는내면의분신으로등장한다.

“지는해를보며가슴이저리면/제목숨을달아맨허공때문이다.”(「건너가는사람1」)라는첫연은,이미존재가죽음의사선위에놓여있음을암시한다.시인은저녁빛속에서‘하늘강건너는사람’을본다.그사람은결국“나를건너가는사람”이며,곧내안의타자이자나를낳는시심(詩心)이다.그는붙잡을수없는존재로반복등장하지만,그부재가곧시의동력으로작용한다.

이‘건너감’의운동은단지물리적이동이아니라기억과망각,삶과죽음사이를잇는행위다.「건너가는사람6」의“느슨해진줄을꽉부여잡고”,“힘에부친듯헐렁해지다가/이내곧추서는저심지(心志)”는그상징적장면이다.헐거워지는줄을부여잡는몸짓은,흔들리면서도쓰러지지않으려는존재의의지다.이‘심지’야말로김진환시의핵심이다.시인은언제나불안정한경계위에서균형을잡는다.그경계는죽음의언덕일수도,생의문턱일수도있다.결국그는스스로를“건너가는사람”으로규정함으로써,존재의지속을위한시적행위를제시한다.

바람,소리,모성-존재를이어주는매개

시집후반부로갈수록,‘건너감’의주체는개인의내면에서세계의질서로확장된다.시인은자연의미세한징후들(바람,빛,소리)속에서생명들의상호작용을감지한다.「산소리」에서“향피리소리듣는다”는구절은단순한청각적감상이라기보다,세계의숨결을감응하는행위다.돌이끼,산죽,석간수까지‘숨고르는소리’를내는순간,자연은거대한합주가된다.이때시인은‘심산계곡악공’이되어그생명의리듬에화답한다.

그리듬은바람과비로이어진다.「웃비」의“밭이랑뒤적이던어머니처럼/허리펴지않은채/산중(山中)우주를구석구석훑어내고있다”는구절은,비를모성적행위로전환시킨다.바람과비,달빛은모두세계를어루만지는손이다.시인은그손을‘어머니’로읽는다.모성은단지여인의상징이아니라존재를지속시키는보편적에너지다.‘생명의시심’이곧‘모성적사랑’이라는이성혁평론의결론은,이러한세계적공명속에서다시확인된다.그러나김진환의모성은신화적이거나초월적이지않다.그것은밭이랑을뒤적이는손,산안개한자락에둘러앉은일상의몸짓이다.그의시는어머니의노래가아니라,어머니의노동에가깝다.

존재의온도를지키는시

『건너가는사람』은생명에대한찬미이면서동시에인간의유한성을통과한사유의기록이다.시인은생명체들의‘망집(妄執)’을연민의시선으로바라본다.그것은생존의고집이자존재의존엄이다.그는삶의주변부,흙의틈,불의잔해에서시의원형을길어올린다.

그의언어는낮고느리며,흙냄새와재냄새가배어있다.그러나그느림속에서우리는인간존재의온도를느낀다.‘건너가는사람’은타자이자나자신,생명이자시인,그리고어머니이기도하다.결국김진환의시가향하는곳은건너감의미학,즉사라짐을통해존재를새로이낳는순환의윤리다.「새벽숲」에서“어둠을밀치며꿋꿋이건너가는/누군가”를시인은끝내지칭하지않는다.그러나우리는안다.그가바로‘시’이며,또다른생명을향해불속을건너는김진환시인자신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