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이 자라는 속도 (허은희 시집 | 양장본 Hardcover)

손톱이 자라는 속도 (허은희 시집 | 양장본 Hardcover)

$13.00
Description
결여의 공학과 통증의 합창
허은희의 시집 『손톱이 자라는 속도』가 출간되었다. 이 시집은 결여를 주제로 삼는다기보다 결여가 어떻게 신체의 습관이 되고 언어의 구조가 되며 관계의 조건으로 작동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이 시집에서 결여는 부족함의 감정이 아니라 기능하는 상태다. 「동행」에서 ‘ㅂ’과 ‘ㅇ’이 빠진 자리들은 의미를 지워버리는 공백이 아니라 발음과 호흡을 어긋나게 만드는 장치로 놓인다. 빠진 것은 설명되지 않고, 대신 말하는 방식 전체를 흔든다. 허은희의 시에서 결여는 보충의 대상이 아니라 언어를 생성하게 만드는 압력이다.

이 시집의 인물들은 서로를 이해하거나 보듬는 위치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무너진 것들 깨진 것들은 / 안부를 전하는 방법을 모릅니다”라는 진술처럼 관계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조건 위에 놓인다. 화자와 타자는 서로 다른 부족의 말을 쓰며, 같은 방향으로 서 있지 않고, “엎드린 자세만 닮”아 있다. 이 닮음은 친밀의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오해의 출발점이다. 허은희의 시는 관계를 교감의 사건으로 그리지 않고, 실패가 반복되는 구조로 배치한다.

이러한 구조는 신체 이미지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시집의 신체는 온전하지 않다. “토르소”, “잘린 팔 다리”, “짝이 다른 신발”, “목발”, “줄에 걸린 발목”은 상처의 비유라기보다 관계가 작동하는 방식의 도식이다. 넘어짐과 절뚝임은 예외적인 사고가 아니라 기본 자세가 된다. 그래서 이 시집에서 신체는 감정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세계와 부딪히는 방식 그 자체다. “언제까지 짝이 다른 신발을 주문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은 불운의 탄식이 아니라 항상 어긋난 조건 속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존재의 상태를 묻는다.

소리는 이 신체적 어긋남을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허은희의 시에서 음악은 위안의 매개가 아니라 불일치의 증폭 장치다. 「토르소」에서 “노킹 온 헤븐스 도어”를 발음하는 행위는 문을 여는 동작이 아니라, 발음이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는 과정이다. “이제 막 지나간 / 기타의 에이마이너만 좇는 귀”는 감정의 조율이 아니라 이미 사라진 것만을 추적하는 감각이다. 「스타카토 효과」에서 연주는 흐름이 아니라 단절의 연속으로 제시되며, “마비된 음 하나”는 끝내 꺼내지지 않는다. 소리는 연결을 약속하지 않고, 오히려 관계가 끊기는 순간을 반복해서 들려준다.

허은희의 언어가 특히 강하게 작동하는 지점은 말이 ‘음식’처럼 다뤄질 때다. 「체벌의 방식」에서 “그냥 하는 말들”은 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 관용구가 아니라 입속에서 질척이는 덩어리로 남는다. 그 결과 “목에 걸린 건 / 가시가 아니라 손톱이었다”라는 전환이 발생한다. 손톱은 몸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도구다. 자라고, 갈리고, 씹히며, 결국 다른 몸을 할퀸다. 여기서 ‘손톱이 자라는 속도’는 시간의 은유가 아니라 상처가 반복적으로 갱신되는 주기를 가리킨다. “손톱이 자라는 속도에 맞춰 / 할퀴어질 것들은 / 새 옷을 입고 태어날 거야”라는 문장은 회복의 낙관이 아니라, 상처가 다시 태어나는 메커니즘에 대한 관찰이다.

약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시편들 역시 안정이나 진정을 향하지 않는다. 「알프라졸람」과 「졸피뎀」에서 약물은 상태를 덮는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절단과 파편화를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깨진 거울 / 잘린 눈 코 입 // 달아난 고백”은 무너진 자아의 묘사가 아니라, 정상이라는 기준이 이미 파손된 상태임을 보여주는 배열이다. 이 시집에서 병동, 폐쇄, 체벌, 징후는 예외적인 공간이 아니라 관계가 기본적으로 작동하는 장면이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숨은 증상이었구나”라는 문장은 친밀의 언어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상태를 악화시키는 조건이 되는 상황을 정확히 지시한다.

형식적으로도 이 시집은 끊임없이 절단과 과잉을 오간다. 어떤 시는 행을 짧게 끊어 파편을 던지고, 어떤 시는 산문처럼 밀어붙이며 숨이 찰 때까지 이어진다. 이 차이는 변주라기보다 동일한 상태의 다른 표정이다. 말이 끊길 때는 침묵이 아니라 곰팡이 핀 글자들이 입속에 들어차고, 말이 이어질 때는 해명이 아니라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목을 조정하는 동작이 된다. 이 시집에서 말하기는 언제나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한 몸의 반사 작용에 가깝다.

“나를 잃는 것이 / 나의 일이었”다는 시인의 말 역시 하나의 긍정적 선택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시집 전반에 걸쳐 자기 소거는 스스로 감수되는 장면과 반복되는 압력 속에서 굳어지는 장면을 동시에 가진다. 「마중물」에서 “퍼 부은 손과 퍼 올린 손”이 합장을 하며 물을 긷는 장면은 어떤 지속을 보여주지만, 그 지속은 구원의 서사가 아니라 끝까지 몸을 소모하는 동작이다. “이제껏 하지 못한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말 것”이라는 문장은 말의 절제가 아니라, 말이 드러나는 순간 감당해야 할 파열을 알고 있는 상태에 가깝다.

허은희의 시에서 관계란 결국 사투에 가깝다. 「미끼를 물었다」에서 말하듯, 그것은 “알몸으로 날을 가는 것”이며 “줄이 끊어질 때까지 흔들리는 일”이다. 쥐와 고양이가 서로를 물고 물리는 「가위 바위 보」의 반복 구조는 승패의 은유가 아니라, 역할이 고정되지 않는 순환을 보여준다. 여기서 누구도 최종적으로 안전한 위치에 도달하지 않는다. 다만 반복만이 남는다.

이 시집의 말들은 완결을 지향하지 않는다. “찢긴 한 장의 모서리로 서사를 이으려”는 시도처럼 말들은 늘 불완전한 상태로 서로를 긁고 스치며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허은희의 시는 결여가 언어를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지에 대한 지속적인 기록이다. 말은 상처를 봉합하지 않고, 대신 상처가 생겨나는 속도를 정확히 따라간다. 『손톱이 자라는 속도』는 그 속도를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시집이다.
저자

허은희

2003년《시사사》로등단.시집『열한번째밤』『손톱이자라는속도』가있다.

목차

005시인의말


13동행
15토르소
16냉담
17아는사이
18코러스밖을펼치면
20미늘
22누가씹던껌을붙여놓았다
23알프라졸람
24체벌의방식
26뱀이또아리를틀때
27미끼를물었다
28오른쪽눈동자와왼쪽눈동자는언제마주치나
30절정,직전
31노숙
32역울음


35아직이른시작
36아무것도변하지않았으므로
38의문형대화
40복화술은언제배웠니
41당신의어깨는당신의어깨가아니다
42불특정다수
44폐쇄병동
45어떤작업의형식은악수(惡手)에서시작된다
46줄넘기
48달에찍힌시놉시스
50제자리걸음
51마중물
52그물속하모니
53오역


57스무켤레의신발을갈아신는동안
58초조(抄造)한코
59가차된표정
60거울속커튼콜
61아이스크림의취향
62함정
63우발적경로
64가위
65촉
66선문답
67휴대폰전원을꺼주세요
68감긴눈들의잠


71스타카토효과
72소리로빚은오타
73못갖춘마디
74의심스런알람
76여독
77징후
78가위바위보
80지루한잠
81졸피뎀

해설
83결여된자들의노래|김대현(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