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을기리며
다시부르는이름,
박열아시인
문정희(시인)
한시대의문학은언제나그시대가끝내다받아들이지못한이름들을남긴다.빛을향해나아가던언어가어느순간그바깥으로밀려나더깊은어둠속에서오래숨쉬는일이있다.박열아라는이름은바로그러한경우에속한다.이시집은뒤늦게도착한책이아니다.오히려너무일찍쓰였으나우리가늦게읽게된책이다.
박열아라는이름은낯선이름이아니었다.다만오래도록불리지않았을뿐이다.동국대학교에서수학하던시절,서정주라는같은스승아래에서문학을배우던시간속에,그는분명히우리곁에있었다.그러던그를다시떠올리게한것은어느날그의아드님이보내온한통의편지였다.오래묻혀있던기억이그때문득또렷해졌다.
1960년〈동아일보〉신춘문예에「전표지역」이당선되었을때,박열아시인은여느시인과달리하나의징후로받아들여졌다.그것은전쟁이후의폐허와상처를감상으로풀어내지않으면서도,그내부에응결된고통을끝까지응시하려는새로운시적태도의출현이었다.당시문단은여전히서정의계보위에있었으나그틈사이에서보다단단하고거친언어로현실을밀어붙이려는움직임이나타나고있었다.박열아시인의시는바로그변화의한복판에놓여있었다.
그의시에서먼저다가오는것은감정이아니라장면이다.설명하지않고,설득하지않으며,다만그자리에놓여있는사물들.그러나그이미지들은서로를밀어내고부딪치며하나의압력을형성한다.전쟁의잔해는풍경이아니라응결된물질로남고,노동의시간은서사가아니라육체의피폐함으로드러난다.인간은그속에서감정을토로하는존재가아니라상처와흔적을몸에지닌채견디는존재로나타난다.이때시는서정을덜어낸자리에남은밀도,곧현실의무게를직접감당하는언어가된다.
특히「목탄」과「사막의배」에이르면그의시는하나의상징적물질과집단적경험을결합시키며더욱넓은장을형성한다.목탄이라는물질은시대의잔해이자내부의불씨로작동하고,사막과바다는소진과생존이교차하는현장으로변한다.이때그의시는개인의서정을넘어,시대의균열과집단의상처를떠안는구조를갖는다.그것은존재의조건을드러내는방식이다.
1960년대는한국시가새로운전환을모색하던시기였다.전쟁의기억은고스란히남아있었고,산업화의징후는사회의질서를빠르게바꾸고있었다.시는더이상개인의내면에머무를수없었고,보다넓은현실과맞닿아야했다.그과정에서등장한여러시적도전가운데박열아시인의시는특히강한밀도와긴장을지니고있었다.그의언어는매끄럽지않았고,때로는거칠었으며,그렇게의도적으로서정을밀어냈다.그렇게시대의균열은더욱선명하게드러난다.
그럼에도그의이름은어느순간문단의전면에서멀어져갔다.그것이개인의선택이었는지,시대의흐름이만들어낸결과였는지는단정하기어렵다.다만분명한것은문단의중심에서멀어지는일이곧시의소멸을의미하지는않는다는사실이다.오히려다른삶의자리를마련하는과정에서시는더깊은곳으로침잠하기도한다.
문학사는기록된이름들만으로이루어지지않는다.오히려기록되었으되충분히읽히지못한이름들,혹은기억의바깥으로밀려난이름들이그사이를채운다.박열아시인의시는바로그공백속에놓여있었다.그렇기에이번유고시집이자첫시집의출간은한국현대시가놓쳐버린한갈래를다시불러내는일이다.이는한개인의복원이아니라문학사자체의균형을회복하는작업에가깝다.
그의시를다시읽는다는것은과거를복원하는일에그치지않는다.오히려지금의시가어디에서있는지를되묻는일이다.세계와의긴장을포기하지않는언어,현실과부딪히는태도,그리고그것을끝까지밀고나가는의지.박열아시인의시는이러한질문을다시우리앞에놓는다.
문학은기억의예술이지만,동시에망각과싸우는예술이기도하다.어떤이름들은오래도록빛속에머물고,어떤이름들은어둠속에서잊힌다.그러나그어둠속에서더오래지속되는목소리도있다.
이제우리는이이름을다시불러야한다.그것은한시인을위한일이라기보다우리문학이스스로의잃어버린시간을회복하는일이기때문이다.이시집이그첫장이될것이다.
책속에서
오랜수난의일정(日程)을거두어돌아간피곤한손들이먼지평(地平)에하얀전표(戰標)로서면
이름없이죽어간어느병사의무덤앞에
하얗게분장한묘비는
이슬져승화(昇華)한가슴을마주하여먼날의눈을들고
상처난수목(樹木)의등어리엔적요한비가내리고있다.
충충한숲을돌아가던가슴의긴포복(匍匐)이끝나는곳에
파문(波紋)져오는바람의여운….
잔광(殘光)에씻기운하얀촉루위에어둠은내리고
아물어가는우리들손의상흔언저리에잠들어있는전쟁.
어두워가는폐원의뒤안길에서
목잘린해바라기는
기아(飢餓)의골짜구니로줄지어밀리고.
끊어진다리아래아직도목쉰노랫소리는남아
저리도긴강물이되어흘러가고있다.
마지막계단을향하여숨죽여오르던의지의절정에서
가슴을앓는비둘기.
갈갈이찢기운기폭(旗幅)에바랜얼굴을부비며
사탑(斜塔)의그늘밑으로떨어져가면
목숨의밑바닥으로만흘러가는강기슭에도이름없는묘비는서고
무덤으로가는커다란군화발자죽마다
슬프게싱싱한가슴들이잠들어있다.
지금,
창(窓)을등지고돌아앉은무덤속에서
하늘을바라보는어린병사의푸르고순수한눈에
적요한비는내리고.
분산(分散)된사상의내부에서
가슴을상한전쟁은마지막방위(方位)의선(線)을긋고있다.
냉각(冷却)된기류속을오가는싸늘한시선(視線)들-.
마지막얼키는시선의매듭에서스스로의자세를가누는오늘.
한색으로물들어가는우리들손의상흔에
음(陰)칠월의싱그런포도(葡萄)는익어가지만
깨어진형상을흔들며울려오는종소리.종소리….
도색(塗色)된분신을떨어뜨리며돌아간시간의어깨너머
태양은
무너진성벽밑으로하강하고.
밀려간폐상(廢像)의긴대열(隊列)끝에
뒤척이는묘지.
낯서른철조망가에
죽어간젊은혼들의마지막음성에젖어
다시나뭇잎은피어도
낭자한파편의무덤가에서
지금도우리는
수피(樹皮)의상흔하나무심히보아넘길수없다
아,초연(硝煙)에그슬린악보(樂譜)에상채기진얼굴을묻고
이름없는묘비에등을기대면
가슴은빛나병들지않았으나성낸포복(匍匐)은끝날줄을모른다.
기도와같이
가느란목을빼어느리어비정한음악을흔들자.
응혈진눈을닦으면
녹스른탄피에묻혀간어린날의기억위에
적요한비는내리고
우후(雨後)의죽순처럼무구(無垢)하게돋아난묘비위에비는내리고
깨어진도시의창에도지붕위에도,
우리들모두의가슴에도
적요한비는내리고….
1959.10.(〈동아일보〉신춘문예당선작1960년1월20일)
-「전표지역(戰標地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