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황은덕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서울, 보스턴, 필라델피아에서 일하고 공부했다. 현재 부산에 살고 있다. 2000년 신춘문예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펴낸 소설책으로 『한국어 수업』 『우리들, 킴』 『한나 아렌트, 난민이 되다』가 있으며, 산문집 『황은덕 소설가의 공감 공부』, 역서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스노우 헌터스』 등이 있다. 계간지 《오늘의 좋은 소설》 편집주간으로 일했고, 현재 부산대학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다. 부산작가상, 부산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타인의 위치」의 무함마드는 “나는 녹음기예요.”라고 말한다. 김 선생의 지시에 따라 단어와 문장을 반복하는 원어민 강사의 처지가 이 한마디로 전해진다. 박 선생과 그는 영어와 번역 앱을 이용해 대화한다. 서로의 말뜻을 확인하고 웃기도 하지만, 감정까지 같은 방식으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박 선생과 무함마드가 서툰 대화로 가까워지는 과정과 그 안에 남는 어긋남을 함께 보여 준다.
“아나 아흐부카”라는 말의 반복은 특히 인상적이다. 무함마드가 중얼거릴 때에는 번역이 없지만, 박 선생의 아이가 외칠 때에는 “(사랑해.)”라는 풀이가 붙는다. 아이를 안은 박 선생은 거울 속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무함마드를 보고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같은 말을 서로 다른 상황에 놓으면서, 소설은 인물의 감정을 길게 설명하지 않고도 두 사람 사이의 변화를 전한다.
「사랑받은 사람」에서는 아내의 오디오북 낭독이 남편의 시선과 나란히 놓인다. 남편은 “인간 종에 대한 혐오.”라는 문장을 듣고 소름이 돋는다. 그는 아내가 시가에서 겪은 부당한 대우를 이야기할 때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고 말해 온 사람이다. 아내가 읽는 글과 부부의 지난 생활을 함께 읽으면서, 독자는 남편이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아내의 처지를 돌아보게 된다. 낭독하는 목소리를 통해 인물의 관계를 비추는 구성이 돋보인다.
「우리 사이」의 공동 연구실에서는 문 여닫는 소리와 실내 온도를 두고 신경전이 벌어진다. “누군가에겐 아무렇지 않은 문 여닫는 소리가 다른 누군가에겐 견디기 힘든 소음”이다. 함께 쓰는 공간의 작은 불편을 통해 사람마다 다른 감각과 생활 방식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황은덕 작가는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법한 소리와 몸짓을 관계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옮겨 놓는다.
「이사」에서 미숙은 소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진경은 목구멍의 이물감으로 고통받는다. 소설은 두 사람의 생활과 기억을 따라가며 그들이 겪는 불안을 드러낸다. 「은수와 현정」에서는 관절 통증 때문에 병뚜껑을 열거나 몸을 움직이는 일이 어려워진다. 이러한 신체의 감각은 인물의 일상을 실감 나게 전하고, 주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을 보여 준다.
공간을 다루는 방식도 구체적이다. 「해수」에서 택시가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 「타인의 위치」에서 어학원과 사원으로 이어지는 길, 「사랑받은 사람」에서 휴게소와 강변을 가르는 도로는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 선명해진다. 특히 「사랑받은 사람」에서 남편은 도로 건너에 선 아내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돌아온다. 그러나 모친의 전화에 그가 계단참에서 멈추자,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맞잡은 손을 떨치고” 내려간다. 두 사람의 관계가 짧은 동작 안에 응축되는 장면이다.
「우리 사이」의 김에게도 움직임의 변화가 있다. 지도 교수의 ‘바로’라는 말을 곱씹고, ‘지체 없이’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던 그는 그날 밤 호출에 응하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다음 날 아침에는 아무도 없는 연구실에 “짐짓 쿵쾅거리며” 들어간다. 조심스럽던 몸짓이 달라지는 모습을 통해, 소설은 관계를 대하는 김의 태도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는 걸 전한다.
인물의 마음을 보여 주는 시점의 구성은 소설집의 중요한 장점이다. 「타인의 위치」는 박 선생과 무함마드의 내면을 오가고, 「이사」는 딸 수현에게서 어머니 진경으로 이야기의 중심을 옮긴다. 독자는 각자의 사정을 읽으면서 한쪽의 시선만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관계를 살피게 된다. 「사랑받은 사람」은 남편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의 생각과 아내의 행동을 함께 읽도록 한다. 작품마다 다른 서술 방식이 인물을 이해하는 경험을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은수와 현정」에서 현정은 병원에 같이 가겠다는 은수의 말을 반가워하지만, 대답은 밋밋하게 한다. 그러고는 신맛 나는 과일을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자두와 살구와 복숭아를 주문한다. 은수는 냉장고에서 그 과일을 꺼내 씻고 접시에 담는다. 소설은 현정의 마음을 먼저 보여 준 뒤 두 사람이 과일을 나누는 장면을 놓는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배려가 일상의 사물과 행동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다.
서로 다른 생활을 해 온 두 친구는 상대의 취향과 습관을 기억한다. 에릭 클랩튼의 노래를 들으며 예전의 번역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도 오랜 교류가 느껴진다. 두 사람의 우정은 큰 고백이나 극적인 사건보다, 함께 듣는 음악과 주고받는 말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문학평론가 권영빈은 해설에서 “‘곁에 있음(besideness)’으로 그의 자존을 지켜 주는 것”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작품의 아침 주방은 그 말을 구체적인 장면으로 보여 준다. 현정이 생수병과 밀폐 용기를 내밀며 “이거 좀 열어 봐.”라고 하면 은수는 뚜껑을 열어 준다. 은수는 현정이 일러 주는 대로 떡 비닐을 찢고 콩고물을 묻힌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대로 아침 식사를 함께 마련한다.
전날 밤, 은수는 아픈데도 꼿꼿이 앉아 있는 현정에게 왜 편하게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현정은 “음… 나한텐 이게 편해.”라고 대답하고, 은수는 “그렇구나!” 하고 수긍한다. 짧은 문답 안에서 상대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드러난다.
은수가 집을 떠날 때 현관문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은 동시에 긴 한숨을 내쉰다. 소설은 그 한숨의 뜻을 하나로 정하지 않는다. 독자는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과 서로 다른 생활을 떠올리며 그 장면에 머물게 된다. 황은덕 작가의 소설 『우리 사이』는 관계를 설명하는 말뿐 아니라 병뚜껑을 열어 주고, 과일을 씻고, 상대의 대답에 수긍하는 행동을 오래 바라본다.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작가의 물음은, 이러한 작은 몸짓을 통해 독자의 일상 가까이 다가온다.
우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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