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블랙 : 2023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화이트, 블랙 : 2023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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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선로를 따라 순환하면 언젠가 목적지에 이르리란 생각이었다.”
‘평범’의 폭력에 경계 밖으로 내쳐진 사람들,
은연필의 첫 소설집

“기록된 글은 특정한 물질로서 어딘가에 남아 다시 또 새로운 10년을 기약하게 될지 어떨지
사뭇 궁금해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_「작가의 말」에서

· 2023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은연필의 소설집이 나왔다. 2022년 장편소설 『동화, 혜화』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이번 작품집은 경계 밖으로 내쳐지는 사람들에 관한 2편의 단편을 담았다. 작품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연한 기회에 “경로를 이탈”(「해설」)하여 다른 세계에 떨어진다. 하지만 그곳에서 오히려 지금 속한 세계 속에서의 자신을 여실하게 맞닥뜨린다. 영화를 전공한 작가는 ‘평범’이란 이름 뒤에 숨어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가하는 집단의 폭력을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결말로 섬뜩하게 전한다.

바로 경로의 이탈이다. 우리는 도시에서 차를 잘못 타거나, 무언가에 눈길을 빼앗기거나,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정처 없이 걸을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목적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표류할 수 있다.
이러한 이탈의 경험은 가장 현명한 자들이 발견한 도시의 속성 중 하나다. 게오르그 짐멜은 도시에서 “첫번째 행보로 목표에 도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_「해설」에서


경계 안을 허락하지 않는 ‘평범’의 폭력

걔네들 생머리하고 화장 싹 지운 다음, 얌전한 청바지에 흰 티셔츠 입고 오빠, 오빠 하면 누가 그런 애들인지 알겠어요. 남성분들 정말이지 조심해야 합니다. 인생 망치고 싶지 않으시면 우리들처럼 먼저 나서야 합니다. 뻔뻔스레 일반인인 것처럼 나오니 다른 방법 없잖아요.
_「화이트: 화인」에서

첫번째 작품 「화이트: 화인」의 등장인물 화인은 성노동자이다. 으레 까다로운 고객을 만났고, 만취상태였던 화인은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던 어느 퇴근길”, 불법 택시인 ‘나라시’에 오르기 무섭게 밀려드는 답답증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화인은 택시에서 내려 충동적으로 지하철을 탄다. 두 정거장이면 되는 거리이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았다. “두 정거장을 통과하는 일이 사막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것처럼 기약 없이 막막하거나, 좁고 컴컴한 골목을 지나는 것만큼 위험한 시간”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날 화인은 “일종의 뿌듯함”을 느낀다. 그 감정은 무엇을 해낸 것에서 오는 성취감만이 아니었다.

첫차를 타고 자신만의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 하루의 시작대 위에 당당히 올라서 아침을 여는 그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화인에게 무엇인가를 환기시켰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엇이었다. 놓쳐서는 곤란한, 반드시 붙잡아야 할, 아마도 이제는 화인 자신과 멀어진 무엇.
_「화이트: 화인」에서

처음으로 자리에 앉았던 날, 화인이 잠깐 조는 틈을 타 그녀의 무릎 위에 누군가 영화 티켓을 올려놓는다. 화인은 평소 흑백영화를 좋아하는 주홍에게 티켓을 전한다. 주홍은 오래전부터 화인과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화인이 보기에 주홍은 “세상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풍경, 특히 인물들이 흑백의 화면에서 건네는 말들, 예사롭지 않은 눈빛, 지금에서는 은막에 생의 흔적으로만 남은 격한 몸동작을 바라보면서 일종의 안정감을 되찾는 것” 같았다.
주홍은 영화를 보러 나갔던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주홍의 실종신고를 내고 수소문하다 옛 고객이었던 검사를 찾아간 화인은 한 인터넷 사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여성의 알몸 사진과 심지어 노골적인 성행위가 담긴 동영상이 실시간으로 오르는 그 사이트에서 ‘직업여성란’을 클릭한다. 그곳에는 첫차에 올랐던 자신의 모습이 가득한다. 그리고 익명성 뒤에 숨어 달린 욕설들.

아아, 아침마다 정말 짜증납니다, 향수 냄새 너무 심해요. 얼굴과 몸매로 보면 돈은 충분히 벌겠군요. 저도 3번 칸으로 가야겠네요, 주위에도 막 추천중. 누가 그년 좀 안 말려주나요. 왜 하필 첫차를 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안 그래도 새벽 출근길이라 힘든데 하루일 시작하기도 전에 술이나 향수 냄새 장난 아니니, 꼭 사람들 발정 일으키려고 작정한 것 같아요. 죽여버리고 싶어.
_「화이트: 화인」에서

끝내 주홍은 처참한 모습의 주검으로 돌아왔다. 화인은 잠시 원했던 일상적인 삶, 그리고 그 삶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다시 무너지기 시작한다. “출입문 사이를 지나는 사소한 발걸음이나 차분히 내릴 때를 기다리는 누군가의 일상적인 모습이 눈부”셨던 화인은 그들과 함께하고 싶었을 뿐이다.


‘존중’과 ‘예의’에서 배제되는 도시의 저편 사람들

두번째 작품 「블랙: 개를 데리고 다니는 동안」에서 인석은 ‘개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날, 인석은 “정성이 부족했고” “애정과 존중이 없어” 개를 불편하게 했다는 이유로 고객에게 뺨을 맞고 개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받는다. 개를 태우기 위해 고객의 차를 이동하다가 그의 돌아올 수 없는 질주가 시작된다. 동물과 함께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던 인석의 평범한 삶에 균열이 생긴 것은 병원에서 사라진 가난한 형 때문이다. 응급수술 중 암을 발견한 형이 인석에게 이를 말하지 않고 평소처럼 듬직한 목소리로 안심하라며 전화를 건 이후였다. 억대 치료비를 서슴없이 내는 개들이 인석의 균열을 비집고 들어왔다. 인석은 고급 외제차에 앉아 “평생 처음 느껴보는 기분. 몇 기통인지 몰라도 엔진이 부르릉 거리는 소리는 무슨 교성처럼 아찔”함을 느낀다.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공사중이었고, 교통경찰이 불법을 단속하고 있었고, 휴대전화를 떨어뜨려 신호를 놓쳤기 때문에, 인석은 ‘유턴’하지 못한다. 그렇게 인석은 의전을 받기라도 하는 듯 ‘존중’과 ‘예의’ 속에서 황실에서 자랐다는 고객의 카발리에 킹 찰스 스패니얼종의 개와 “자신과는 무관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왕자의 옷을 입은 거지를 대하듯 세상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진 것을 인석은 차츰 인정해나갔다. 그것을 돈의 힘이라고 해야 할지, 장인과 명품에 대한 경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껏 자기와는 무관한 세계였으며,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_「블랙: 개를 데리고 다니는 동안」에서

결국 사고를 내고 개와 함께 쫓기던 인석이 찾은 곳은 “학대당하거나 버려져 이곳저곳을 떠돌다 병들고 부상을 입은 개들이” 모여 있는 유기동물보호소였다.


흑과 백으로 도시의 지형도를 그려내는 영화적 상상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도는 순환선이라는 경계에서 화인은 “어쩐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제자리로 돌아가기만을 소망했다는 사실을 별안간 깨달았”지만 자신이 꿈꾸었던 삶에서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을, 그리고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인석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가 한없이 낮음을 느끼는 순간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급급했다. 하지만 숨 한 모금조차 힘든 지금의 현실에서 탈출하고 저쪽 세계로 넘어가는 일은 이들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사회는 그들 세계에서 그들이 이탈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작품을 읽고 표제 ‘화이트, 블랙’을 마주하면 하얀빛과 검은빛 속으로 페이드아웃되는 화인과 인석의 모습이 그려진다.

요컨대 은연필은 이탈의 이야기를 통해 도시의 진정한 지형도를 그려내고 있다. 그는 도시에서 정해진 경로를 이탈한 청년을 뒤따라간다. 그 여정은 우리를 도시의 반대편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거기에서 우리는 뜻밖에도 도시의 양극이 서로 접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 도시는 이탈의 가능성으로 가득하면서도 사실은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시공간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은연필의 글쓰기는 진정 도시적인 이탈, 나아가 진정 도시적인 플롯을 그려내고 있다.
_「해설」에서
저자

은연필

중앙대영화학과졸업
2022년장편소설『동화,혜화』,
2023년소설집『화이트,블랙』출간

목차


화이트:화인
블랙:개를데리고다니는동안

해설|진정도시적인이탈_유인혁(문학평론가)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경계안을허락하지않는‘평범’의폭력

걔네들생머리하고화장싹지운다음,얌전한청바지에흰티셔츠입고오빠,오빠하면누가그런애들인지알겠어요.남성분들정말이지조심해야합니다.인생망치고싶지않으시면우리들처럼먼저나서야합니다.뻔뻔스레일반인인것처럼나오니다른방법없잖아요.
_「화이트:화인」에서

첫번째작품「화이트:화인」의등장인물화인은성노동자이다.으레까다로운고객을만났고,만취상태였던화인은“평소와다를것하나없던어느퇴근길”,불법택시인‘나라시’에오르기무섭게밀려드는답답증에숨이막힐것같았다.화인은택시에서내려충동적으로지하철을탄다.두정거장이면되는거리이지만그녀는지금까지대중교통을이용하지않았다.“두정거장을통과하는일이사막한가운데를통과하는것처럼기약없이막막하거나,좁고컴컴한골목을지나는것만큼위험한시간”으로느껴졌기때문이다.그날화인은“일종의뿌듯함”을느낀다.그감정은무엇을해낸것에서오는성취감만이아니었다.

첫차를타고자신만의목적지로향하는사람들,하루의시작대위에당당히올라서아침을여는그들과함께보내는시간들이화인에게무엇인가를환기시켰다.오래전에잃어버린무엇이었다.놓쳐서는곤란한,반드시붙잡아야할,아마도이제는화인자신과멀어진무엇.
_「화이트:화인」에서

처음으로자리에앉았던날,화인이잠깐조는틈을타그녀의무릎위에누군가영화티켓을올려놓는다.화인은평소흑백영화를좋아하는주홍에게티켓을전한다.주홍은오래전부터화인과같은일을하고있었다.화인이보기에주홍은“세상에더이상존재하지않는시간과풍경,특히인물들이흑백의화면에서건네는말들,예사롭지않은눈빛,지금에서는은막에생의흔적으로만남은격한몸동작을바라보면서일종의안정감을되찾는것”같았다.
주홍은영화를보러나갔던그날밤집으로돌아오지못한다.주홍의실종신고를내고수소문하다옛고객이었던검사를찾아간화인은한인터넷사이트에대한이야기를듣는다.여성의알몸사진과심지어노골적인성행위가담긴동영상이실시간으로오르는그사이트에서‘직업여성란’을클릭한다.그곳에는첫차에올랐던자신의모습이가득한다.그리고익명성뒤에숨어달린욕설들.

아아,아침마다정말짜증납니다,향수냄새너무심해요.얼굴과몸매로보면돈은충분히벌겠군요.저도3번칸으로가야겠네요,주위에도막추천중.누가그년좀안말려주나요.왜하필첫차를타는건지이해할수없습니다.안그래도새벽출근길이라힘든데하루일시작하기도전에술이나향수냄새장난아니니,꼭사람들발정일으키려고작정한것같아요.죽여버리고싶어.
_「화이트:화인」에서

끝내주홍은처참한모습의주검으로돌아왔다.화인은잠시원했던일상적인삶,그리고그삶이가능할지도모른다는기대와함께다시무너지기시작한다.“출입문사이를지나는사소한발걸음이나차분히내릴때를기다리는누군가의일상적인모습이눈부”셨던화인은그들과함께하고싶었을뿐이다.

‘존중’과‘예의’에서배제되는도시의저편사람들

두번째작품「블랙:개를데리고다니는동안」에서인석은‘개호텔’에서아르바이트를하고있다.그날,인석은“정성이부족했고”“애정과존중이없어”개를불편하게했다는이유로고객에게뺨을맞고개에게사과할것을요구받는다.개를태우기위해고객의차를이동하다가그의돌아올수없는질주가시작된다.동물과함께하면서생명의소중함을느끼던인석의평범한삶에균열이생긴것은병원에서사라진가난한형때문이다.응급수술중암을발견한형이인석에게이를말하지않고평소처럼듬직한목소리로안심하라며전화를건이후였다.억대치료비를서슴없이내는개들이인석의균열을비집고들어왔다.인석은고급외제차에앉아“평생처음느껴보는기분.몇기통인지몰라도엔진이부르릉거리는소리는무슨교성처럼아찔”함을느낀다.다시돌아올생각이었지만공사중이었고,교통경찰이불법을단속하고있었고,휴대전화를떨어뜨려신호를놓쳤기때문에,인석은‘유턴’하지못한다.그렇게인석은의전을받기라도하는듯‘존중’과‘예의’속에서황실에서자랐다는고객의카발리에킹찰스스패니얼종의개와“자신과는무관한세상”속으로들어간다.

왕자의옷을입은거지를대하듯세상의태도가확연히달라진것을인석은차츰인정해나갔다.그것을돈의힘이라고해야할지,장인과명품에대한경이라고해야할지알수없었지만이제껏자기와는무관한세계였으며,아마앞으로도그럴것이라는것은분명한사실이었다.흥분은쉽게가라앉지않았다.
_「블랙:개를데리고다니는동안」에서

결국사고를내고개와함께쫓기던인석이찾은곳은“학대당하거나버려져이곳저곳을떠돌다병들고부상을입은개들이”모여있는유기동물보호소였다.

흑과백으로도시의지형도를그려내는영화적상상력

안으로들어가지못하고주변을도는순환선이라는경계에서화인은“어쩐지이곳에서한발자국도물러서고싶지않았다.”“오래전부터제자리로돌아가기만을소망했다는사실을별안간깨달았”지만자신이꿈꾸었던삶에서너무멀리와버린것을,그리고다시돌아갈수없음을깨닫는순간이었다.인석은자신의존재의의미가한없이낮음을느끼는순간“어딘가먼곳으로떠나고싶다는”생각에벗어나고싶다는생각에급급했다.하지만숨한모금조차힘든지금의현실에서탈출하고저쪽세계로넘어가는일은이들에게허용되지않는다.사회는그들세계에서그들이이탈하는것을원치않는다.작품을읽고표제‘화이트,블랙’을마주하면하얀빛과검은빛속으로페이드아웃되는화인과인석의모습이그려진다.

요컨대은연필은이탈의이야기를통해도시의진정한지형도를그려내고있다.그는도시에서정해진경로를이탈한청년을뒤따라간다.그여정은우리를도시의반대편으로안내한다.그러나거기에서우리는뜻밖에도도시의양극이서로접합되어있다는사실을발견하게된다.이때도시는이탈의가능성으로가득하면서도사실은도저히탈출할수없는시공간으로나타난다.여기서은연필의글쓰기는진정도시적인이탈,나아가진정도시적인플롯을그려내고있다.
_「해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