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가라앉고싶은날을위한이야기,책장에꽂아두는‘장마한조각’.
우리에겐쨍하고청량한여름뿐아니라,이토록짙고습한녹색을품은여름도있기에.
혼자만의시간을보내고싶을때가있다.방안에고요히누워,끊이지않는생각을느릿느릿이어가고가고싶은마음.그럴땐생각들사이를오가는일도소란하지가않다.생각의모서리를하나하나매만지며아,이런모양이었구나,이런느낌이구나,깨닫는일이만족스러울테니까.그런날창밖의풍경으로는장대비가어울리지않을까?
한없이가라앉고싶은날을위한이야기『여름을열어보니이야기가웅크리고있었지』는책장에꽂아두는‘장마한조각’같은책이다.우리에겐쨍하고청량한여름뿐아니라,이토록짙고습한녹색을품은여름도있기에.여름을배경으로하는소설과에세이를한데묶고,표지에는자신만의녹색의세계를일구어가는사진작가요초의작품를사용했다.
잡히지않는마음의탐구자―김화진
파열하는욕망,그끈적한피로쓴사랑―이희주
산책하듯낯선풍경으로이끄는,이런전위(前衛)―박솔뫼
차분한광기,은근한유머,소리내읽고싶은문장들―정기현
언젠가서평가금정연은독자란‘존재’가아니라‘상태’라고말한적이있다.
“독자라는‘존재’가따로있는게아니라,특정한순간에무언가를읽고있는‘상태’가있는거예요.(…)낮의카페에서약간의소음과함께읽을수도있고모두잠든밤에홀로스탠드를켜놓고읽을수도있습니다.그리고이런각각의상황은우리의독서에각기다른영향을미칩니다.미칠수밖에없죠.늘그렇다고말할수는없지만,때때로이런영향은치명적이기도할것입니다.”(『한밤의읽기』,스위밍꿀,2024)
그의말처럼어떤상황이읽기에미치는영향은때로텍스트그자체보다‘치명적’이기까지하다.그러니까침잠하고싶은날,얼핏연결점이하나도없어보이는작가들을나란히읽는상황은어떨까?이책에는널리사랑받은김화진의「사랑의신」,이희주의「탐정이야기」,박솔뫼의「사랑하는개」와함께,이제막작가로데뷔한정기현의「검은강에둥실」이실려있다.
먼저,잡히지않는마음의탐구자김화진과파열하는욕망의끈적한피로사랑을쓰는이희주를함께읽는일을상상해보자.이때마음과욕망의사이는얼마나멀면서도또닮아있을까?또산책하듯낯선풍경으로독자를이끄는박솔뫼와차분한광기,은근한유머,소리내읽고싶은문장을지닌정기현을연달아읽는일은어떨까.기대를배반하는문장의흐름을홀린듯따라갔을때두작가는각각어떤풍경을준비해놓았을까?
읽는이마다서로다른경험을할테지만,확신할수있는분명한사실이있다.이미잘알고있다고믿었던작가의세계가틀림없이낯설게느껴지리라는것말이다.이소설이이렇게슬픈이야기였나?여기에이런장면이있었던가?고개를갸웃하면서.
“나는또다른물기억을가질수있다.여름이오고있다.물과함께.”
어떤이야기가마음에남는다면,그곁에누워볼수도있을것이다
이책의마지막에실린에세이「물기억잇기」에서정기현은물과관련된다양한기억들을이어붙인다.이를테면아홉살때이끼를밟고미끄러져계곡물에빠진순간과스물네살이구아수폭포인근마을의수영장에둥둥떠있던순간을연결하는식이다.그사이에놓인십오년이라는시간을지우고,그는아찔함과평화로움을하나의리듬으로엮어낸다.그덕분에우리는물에빠졌다다시떠오르는익숙한장면속에새겨진기이하고미묘한굴곡을생생히느낄수있게된다.
그러고나서그는이렇게말한다.“물은언제나약간혹은많이무섭지만잠깐참아봐,그럼나는또다른물기억을가질수있다.여름이오고있다.물과함께.”시차를둔이런저런기억을이어붙여새로운이야기를만드는것처럼,아마당신도이책에실린이야기를읽고그러한작업을해볼수있을것이다.오로지자신만의여름을위해.그리고어떤이야기가마음에남는다면,그곁에누워볼수도있을것이다.이‘장마한조각’으로여름의한순간을,혼자만의시간을충만하게즐길수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