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중국인들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중국인’ 중 공자에 이어 2위가 시황제입니다.
시황제 영정은 전국 시대 진나라의 제31대 왕으로, 춘추 전국 시대를 끝내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대륙을 통일한 인물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최초의 황제’라는 의미로 ‘시황제’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군현제 실시와 문자 · 화폐 · 도량형 통일 등 중국의 중앙 집권 체제의 기반을 마련하는 치적을 세웠으나 만리장성이나 아방궁 축조 등 대규모의 토목 공사와 분서갱유 사건 등 엄청난 폭정을 행사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영정은 전국 시대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로 기원전 246년 열세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한 그를 대신하여 어머니 조희와 승상 여불위가 섭정을 맡지요.「사기」에 따르면 영정의 어머니인 조희는 장양왕이 태자가 되기 전 조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할 때 여불위가 바친 기녀라고 합니다. 조희가 그 당시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는 설이 있어 항간에서는 그가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영정은 어린 시절을 조나라에서 보냈고, 기원전 250년 아버지 장양왕이 진나라로 돌아와 태자에 책봉되면서 그 후계가 되었습니다.
장양왕이 죽고 즉위한 영정은 여불위를 상국에 임명하고 정치적 전권을 넘겼습니다. 이때 여불위는 훗날 영정의 오른팔이 되어 활약할 이사를 천거했습니다. 기원전 237년 영정은 드디어 친정을 선포합니다. 1년 전 영정의 어머니와 정을 통하던 환관 노애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영정은 노애를 극형에 처하고 그의 가문을 멸했으며, 노애와 정을 통한 어머니를 감금시키고, 어머니와 노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을 죽입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당시 최대 권력자였던 승상 여불위를 해임하고 드디어 기원전 237년 친정에 임하게 됩니다.
친정을 시작한 영정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바로 이사였습니다. 그는 전국 시대의 7웅 중 하나였던 진나라가 천하 통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통일 이후에는 대륙을 통치할 많은 정책을 세운 장본인입니다. 순자의 문하였던 이사는 강력한 법가 사상가로, 철저한 법치만이 백성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영정 자신도 이사의 영향으로 법가 사상을 중시했고, 군주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강력한 군주제를 수립합니다.
영정은 기원전 230년부터 주변국을 정복하기 시작하여 한 ㆍ 조 ㆍ 위 ㆍ 초 ㆍ 연을 차례로 정복합니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제나라를 정복함으로써 중국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했습니다. 그는 전설의 삼황오제(중국 역사를 시작한 전설상의 황제들)를 능가한다는 의미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자신을 시작으로 후손들이 제국을 이어나가기를 바라며 스스로를 시황제라고 칭했습니다.
통일 이후 시황제는 황제로서의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중앙집권 체제를 세우는 데 착수했습니다. 먼저 군웅들이 난립해 있던 전국 시대의 혼란은 지방 귀족들의 통치를 인정한 분봉제 때문이라고 여기고 중앙이 지방을 통치하는 군현제를 실시했습니다. 이사는 진나라의 영토를 전국 36개 군과 현으로 재편하고,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습니다. 이로써 진나라만의 중앙집권 체제가 정비되었고, 이 체제는 이후 중국의 중앙집권 체제의 기본 골격이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시황제는 영토 확장도 계속하여 흉노를 물리치고 베트남, 해남도까지 군현을 설치했습니다.
또한 시황제는 전국의 문자와 화폐 ㆍ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에 도로와 운하를 건설했습니다. 먼저 승상 이사로 하여금 소전 문자를 만들게 하여 모든 공문서와 법령에 쓰이는 문자를 통일했습니다. 또한 황금을 상폐, 동전을 하폐로 하여 화폐를 통일시켰습니다. 도량형의 명칭도 통일했는데, 길이는 촌 · 척 · 장, 양은 승 · 두 · 통, 무게는 양 · 근 · 석으로 통일했습니다. 모두 효율적인 중앙집권 체제를 달성하는 정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황제는 업적만큼 폭정도 휘둘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분서갱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시황제와 유학자들 사이의 마찰이 극대화되면서 벌어졌고 시황제는 최측근 이사와 함께 법가 사상에 기반을 둔 정책을 시행했는데, 유학자들은 이를 끊임없이 반대했습니다. 특히 제나라 출신의 박사 순우월淳于越이 옛 봉건제를 부활시킬 것을 주청하는 데까지 이르자, 기원전 213년 승상 이사는 유생들이 위험한 사상을 펼치는 것을 막기 위해 진나라 내의 모든 책을 태워 버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립니다. 이에 시황제는 의학 ㆍ 점술 ㆍ 농경 분야를 제외한 모든 책을 불태우게 하고, 유교를 공부하거나 자신의 정책을 반대하면 극형에 처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분서 사건입니다.
갱유 사건은 기원전 212년에 벌어진 것으로 불로장생 약에 대한 시황제의 염원이 발단이었습니다. 신선 사상에 심취한 시황제가 불로장생을 꿈꾸며 방사(도인)로 하여금 불로초를 구해 오게 했는데, 방사는 불로초를 구해 오는 대신 도망을 갑니다. 이에 시황제는 자신을 속인 방사와 여러 분야의 학자 460여 명을 잡아 땅에 파묻습니다. 이 두 사건을 합쳐 ‘분서갱유’라고 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폭정으로 보기보다는 시황제가 난립해 있던 사상을 통일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대륙을 통치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황제의 정책 중 백성들의 원성을 산 것은 단연 무리한 토목 공사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만리장성이죠. 이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데는 150만 명의 백성들이 동원되었으며, 4년 만에 30만 명이 사망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그는 아방궁을 건설하기 위해 70만 명의 백성들을 동원했고, 후에 자신이 묻힐 능묘인 여산릉을 조성하는 데도 무리하게 백성들을 동원합니다. 이러한 대규모 토목 공사가 이어지자 나라의 재정이 바닥났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면서 민심이 흉흉해졌습니다.
암살 기도가 이어지면서 시황제는 더더욱 주위를 불신하고 고립되어 갑니다. 그러면서 시황제는 점차 죽음을 두려워하며 불로장생을 꿈꾸게 됩니다. 시황제는 불로초를 찾기 위해 수많은 방사들을 백방으로 보냈는데, 특히 방사 서복이 왜국에 불로초가 있다고 한 말을 믿고 많은 돈을 주고 불로초를 찾으러 보냅니다. 그러나 서복은 동남동녀 3천 명을 이끌고 왜국으로 향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죠. 이는 서복의 거짓말이었지만 시황제는 죽는 날까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기원전 210년 순행 도중 병을 얻은 시황제는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사기」에는 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황제의 마지막 순행길에 유성이 떨어졌다. 그 운석에는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分’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라는 의미로, 시황제는 이에 충격을 받고 쓰러진 후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 라고 합니다. 시황제는 태자 부소를 후계자로 지목했으나 이사와 환관 조고 등의 음모로 부소가 자결하고 황자 호해가 이세황제로 즉위합니다. 이세황제가 즉위한 후 진나라는 진승과 오광의 난, 유방과 항우의 반란 등 숱한 내란에 시달렸고 호해는 결국 4년 만인 기원전 207년에 조고에 의해 강제로 자결했으며 이후 유방이 수도 함양에 입성하면서 진나라는 멸망합니다.
시황제는 사후 자신이 조성한 여산릉에 묻혔습니다. 1974년 서안의 한 시골 마을에서 우물 공사를 하던 중에 땅속에서 도기인형 조각과 쇳조각이 발견되면서 발굴이 시작되었고 전체 규모가 약 2만 5천 제곱미터에 달하는 4개의 갱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갱에는 많은 사람들이 순장되었다고 하며, 실물 크기의 흙 인형인 토용도 6천구 이상 발굴되어 당대의 군사 양식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시황제는 거대한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며, 여러 가지 엄청난 치적을 쌓았습니다. 여러 악정에도 그는 오늘날까지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히며, 그의 강력한 왕권에 대해서는 중국의 이후 왕조들과 주변 국가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2025년 2월 김혜정
시황제 영정은 전국 시대 진나라의 제31대 왕으로, 춘추 전국 시대를 끝내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대륙을 통일한 인물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최초의 황제’라는 의미로 ‘시황제’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군현제 실시와 문자 · 화폐 · 도량형 통일 등 중국의 중앙 집권 체제의 기반을 마련하는 치적을 세웠으나 만리장성이나 아방궁 축조 등 대규모의 토목 공사와 분서갱유 사건 등 엄청난 폭정을 행사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영정은 전국 시대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로 기원전 246년 열세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한 그를 대신하여 어머니 조희와 승상 여불위가 섭정을 맡지요.「사기」에 따르면 영정의 어머니인 조희는 장양왕이 태자가 되기 전 조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할 때 여불위가 바친 기녀라고 합니다. 조희가 그 당시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는 설이 있어 항간에서는 그가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영정은 어린 시절을 조나라에서 보냈고, 기원전 250년 아버지 장양왕이 진나라로 돌아와 태자에 책봉되면서 그 후계가 되었습니다.
장양왕이 죽고 즉위한 영정은 여불위를 상국에 임명하고 정치적 전권을 넘겼습니다. 이때 여불위는 훗날 영정의 오른팔이 되어 활약할 이사를 천거했습니다. 기원전 237년 영정은 드디어 친정을 선포합니다. 1년 전 영정의 어머니와 정을 통하던 환관 노애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영정은 노애를 극형에 처하고 그의 가문을 멸했으며, 노애와 정을 통한 어머니를 감금시키고, 어머니와 노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을 죽입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당시 최대 권력자였던 승상 여불위를 해임하고 드디어 기원전 237년 친정에 임하게 됩니다.
친정을 시작한 영정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바로 이사였습니다. 그는 전국 시대의 7웅 중 하나였던 진나라가 천하 통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통일 이후에는 대륙을 통치할 많은 정책을 세운 장본인입니다. 순자의 문하였던 이사는 강력한 법가 사상가로, 철저한 법치만이 백성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영정 자신도 이사의 영향으로 법가 사상을 중시했고, 군주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강력한 군주제를 수립합니다.
영정은 기원전 230년부터 주변국을 정복하기 시작하여 한 ㆍ 조 ㆍ 위 ㆍ 초 ㆍ 연을 차례로 정복합니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제나라를 정복함으로써 중국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했습니다. 그는 전설의 삼황오제(중국 역사를 시작한 전설상의 황제들)를 능가한다는 의미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자신을 시작으로 후손들이 제국을 이어나가기를 바라며 스스로를 시황제라고 칭했습니다.
통일 이후 시황제는 황제로서의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중앙집권 체제를 세우는 데 착수했습니다. 먼저 군웅들이 난립해 있던 전국 시대의 혼란은 지방 귀족들의 통치를 인정한 분봉제 때문이라고 여기고 중앙이 지방을 통치하는 군현제를 실시했습니다. 이사는 진나라의 영토를 전국 36개 군과 현으로 재편하고,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습니다. 이로써 진나라만의 중앙집권 체제가 정비되었고, 이 체제는 이후 중국의 중앙집권 체제의 기본 골격이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시황제는 영토 확장도 계속하여 흉노를 물리치고 베트남, 해남도까지 군현을 설치했습니다.
또한 시황제는 전국의 문자와 화폐 ㆍ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에 도로와 운하를 건설했습니다. 먼저 승상 이사로 하여금 소전 문자를 만들게 하여 모든 공문서와 법령에 쓰이는 문자를 통일했습니다. 또한 황금을 상폐, 동전을 하폐로 하여 화폐를 통일시켰습니다. 도량형의 명칭도 통일했는데, 길이는 촌 · 척 · 장, 양은 승 · 두 · 통, 무게는 양 · 근 · 석으로 통일했습니다. 모두 효율적인 중앙집권 체제를 달성하는 정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황제는 업적만큼 폭정도 휘둘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분서갱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시황제와 유학자들 사이의 마찰이 극대화되면서 벌어졌고 시황제는 최측근 이사와 함께 법가 사상에 기반을 둔 정책을 시행했는데, 유학자들은 이를 끊임없이 반대했습니다. 특히 제나라 출신의 박사 순우월淳于越이 옛 봉건제를 부활시킬 것을 주청하는 데까지 이르자, 기원전 213년 승상 이사는 유생들이 위험한 사상을 펼치는 것을 막기 위해 진나라 내의 모든 책을 태워 버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립니다. 이에 시황제는 의학 ㆍ 점술 ㆍ 농경 분야를 제외한 모든 책을 불태우게 하고, 유교를 공부하거나 자신의 정책을 반대하면 극형에 처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분서 사건입니다.
갱유 사건은 기원전 212년에 벌어진 것으로 불로장생 약에 대한 시황제의 염원이 발단이었습니다. 신선 사상에 심취한 시황제가 불로장생을 꿈꾸며 방사(도인)로 하여금 불로초를 구해 오게 했는데, 방사는 불로초를 구해 오는 대신 도망을 갑니다. 이에 시황제는 자신을 속인 방사와 여러 분야의 학자 460여 명을 잡아 땅에 파묻습니다. 이 두 사건을 합쳐 ‘분서갱유’라고 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폭정으로 보기보다는 시황제가 난립해 있던 사상을 통일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대륙을 통치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황제의 정책 중 백성들의 원성을 산 것은 단연 무리한 토목 공사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만리장성이죠. 이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데는 150만 명의 백성들이 동원되었으며, 4년 만에 30만 명이 사망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그는 아방궁을 건설하기 위해 70만 명의 백성들을 동원했고, 후에 자신이 묻힐 능묘인 여산릉을 조성하는 데도 무리하게 백성들을 동원합니다. 이러한 대규모 토목 공사가 이어지자 나라의 재정이 바닥났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면서 민심이 흉흉해졌습니다.
암살 기도가 이어지면서 시황제는 더더욱 주위를 불신하고 고립되어 갑니다. 그러면서 시황제는 점차 죽음을 두려워하며 불로장생을 꿈꾸게 됩니다. 시황제는 불로초를 찾기 위해 수많은 방사들을 백방으로 보냈는데, 특히 방사 서복이 왜국에 불로초가 있다고 한 말을 믿고 많은 돈을 주고 불로초를 찾으러 보냅니다. 그러나 서복은 동남동녀 3천 명을 이끌고 왜국으로 향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죠. 이는 서복의 거짓말이었지만 시황제는 죽는 날까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기원전 210년 순행 도중 병을 얻은 시황제는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사기」에는 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황제의 마지막 순행길에 유성이 떨어졌다. 그 운석에는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分’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라는 의미로, 시황제는 이에 충격을 받고 쓰러진 후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 라고 합니다. 시황제는 태자 부소를 후계자로 지목했으나 이사와 환관 조고 등의 음모로 부소가 자결하고 황자 호해가 이세황제로 즉위합니다. 이세황제가 즉위한 후 진나라는 진승과 오광의 난, 유방과 항우의 반란 등 숱한 내란에 시달렸고 호해는 결국 4년 만인 기원전 207년에 조고에 의해 강제로 자결했으며 이후 유방이 수도 함양에 입성하면서 진나라는 멸망합니다.
시황제는 사후 자신이 조성한 여산릉에 묻혔습니다. 1974년 서안의 한 시골 마을에서 우물 공사를 하던 중에 땅속에서 도기인형 조각과 쇳조각이 발견되면서 발굴이 시작되었고 전체 규모가 약 2만 5천 제곱미터에 달하는 4개의 갱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갱에는 많은 사람들이 순장되었다고 하며, 실물 크기의 흙 인형인 토용도 6천구 이상 발굴되어 당대의 군사 양식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시황제는 거대한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며, 여러 가지 엄청난 치적을 쌓았습니다. 여러 악정에도 그는 오늘날까지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히며, 그의 강력한 왕권에 대해서는 중국의 이후 왕조들과 주변 국가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2025년 2월 김혜정
13세에 왕이 된 진시황제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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