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항》이제주근대의시간과장소를함축한제주항을중심으로섬의역사와민중들의삶을살폈다면,이번신작소설집에는현재의4·3,과거사로서의4·3이아니라현재까지도그질긴역사가남긴인연에엮여있는삶을살핀다.단편〈실향〉,〈마을제[酺祭]〉,중편〈강정길나그네〉는4·3을다룬작품들이다.
〈실향〉은4·3으로인해뒤엉킨가족의수난이세대를넘어계속되고있음을용의주도하게짚어낸단편이다.제주의심각한현안인제2공항문제가거기에긴밀히연결되어있음을드러낸다는점에서특히주목된다.4·3때제주섬에관철된국가폭력이시대와얼굴만바꾸었을뿐여전히반복되고있다는점을드러낸다,
〈마을제〉의공간적배경은‘K읍S리’로설정되어있는데,이곳은작가의고향이기도하지만,다랑쉬굴이존재하는구좌읍세화리임을단박에알수있다.이작품은바로세화리의중산간에있는다랑쉬굴사건을다루고있다.주지하다시피이는1948년12월행방불명되었던주민11명의유골이굴속에가지런히놓여있음이1992년봄에알려지면서4·3의참상을다시금널리인식시킨사건이다.다랑쉬굴발굴20주년인2012년마을주민의눈으로이사건을되짚었다.
〈강정길나그네〉는5장으로구성된중편소설이다.4·3의깊은상처와관련된현실에서의용서와화해가간단하지않음을인상적으로다루었다.
이소설의주인공인김석우는지난날4·3의엄청난격랑에휩쓸리면서파란만장한삶을살았다.전란의한복판에서큰고통을겪은그는귀향해서도온전한생활을영위하지못하였다.악몽에시달리면서팍팍해진삶을계속하던그는성당에다니면서안정을찾고자하였다.성당미사중수십년만에4·3때누이를총살한전직경찰인고승록을만나게된다.하지만,학살자고승록은4·3이후에도천주교신자로경제적으로도풍요롭게잘살아온듯한그는“나는나라를어지럽히는폭력에적극대항해온사람이오.(…)나는떳떳하게살아왔다고자부하오.”라면서무고하게죽은4.3희생자들에게대한아무런죄의식도없이오히려당당히4·3학살의정당성과자부심을드러내는그를보면서피해자는용서하지않았는데,교회가오히려그를용서하는형국에대해깊은회의를느낀다.반성없는단죄없는용서에대한근본적인회의인것이다.
김석우는4·3후유장애자이기도한데,마침성당에서해군기지건설반대투쟁으로뒤숭숭한강정마을에서미사를진행하자이를계기로해군기지반대투쟁의현장에참여하기도하면서사복형사의조사경험에서다시떠올린4·3의트라우마,강정에서옮겨진법정보호생물인맹꽁이들이결국이식해간곳에서포식자의먹이로사라져버렸음을깨닫고는4·3당시고향마을에서쫓겨나고끌려가생명을잃은수많은얼굴들을떠올리다가결국아무말도못하는먼산바라기가되었다가산속의요양원으로끌려가고만다.4.3을거치면서뒤틀린그의모진역정은그의삶전체에관통하며정신마저무너뜨려버린것이다.
오경훈은4·3의문제를과거의특정한사건으로한정시켜두지않는다.끊임없이지금-여기와소통하는가운데절실한당면과제로오롯이끌어온다.마을공동체에대한확장된인식을통해4·3해석의방향을제시하고자했으며,강정해군기지건설의폭력성과제2공항추진의야만성을돋을새김하는가운데신제국의야욕이폭발한지점이라는4·3의본질을끊임없이곱씹어야함을강조하고있다.(김동윤의해설중에서)
4·3의법적·제도적후속조처의완료,4·3유족에대한희생자보상등4·3의제도적절차가마무리되면4·3은완전한해결에이르는가?라는근원적질문을던지게하는소설이기도하다.섬의숙명또는영원한약자로남을수밖에없는섬의운명속에제2,제3의4.3은언제나도래하는현재형이라는묵직한메시지를던진다.
〈가깝고도먼곳〉,〈사교〉,〈열쭝이사설〉은노년의작가가인간이얼마나나약한존재인가를,죽음과운명에대한노년의성찰이짙게깔린작품들이다.
2007년9월나리태풍때의복개천범람에따른참상을재현한〈악마는숨어서웃는다〉는개발지상주의의폐해를지적한다는점에서4·3을바라보는작가의인식과일맥상통하는소설이라고할수있다.부동산업자,건설업자,사업발주기관,어용전문가등등경제적이득만추구하는이들의탐욕을더이상좌시해서는안된다는발언이다.“인간의이기적이고오만한개발이불러온재앙에몸을떨”(187쪽)게되는주인공의인식은악마처럼도사려있는인간의탐욕이활개치는작금의제주상황이얼마나위험한지를일깨우는준엄한경고다.
국제관광지,에메랄드빛청정바다,유네스코등재화산섬,1950미터의한라산,올레코스,골프장과특급호텔등제주를상징하거나떠오르게하는이미지들그아래지층처럼쌓여있는제주섬의운명의키워드들섬,4·3,개발광풍등은섬의트라우마이자생채기이기도하다.
제주섬사람으로서오롯이살다간소설가오경훈은제주섬사람들의이야기를써내려갔다.어쩌면그가남기지않으면,끓는여름바다를건너쇄도해온태풍이모든걸집어삼켜지워버릴지도모른다는두려움에,절대잊히면안될섬사람들의이야기를소설로남겼는지도모르겠다.
묵직한성찰과따끔한전언
김동윤(제주대교수,문학평론가)
1.중단편35편,장편1편을남긴제주섬의작가
오경훈(吳景勳)작가가지난2월22일별세했다.제주도북제주군구좌면세화리에서1944년1월19일에태어났으니향년81세로이승의날개를접은것이다.사실이소설집원고는작가가별세하기전에출판사로넘어가있었다.그런데갑작스러운병환으로세상을떠남에따라뜻하지않게유고집으로나오게되었다.오경훈이그동안펼쳐왔던작품활동에대해정리하는작업이필요한때다.
제주대학병설교육과(현재의제주대학교교육대학)를졸업하여1964년부터초등학교교사로근무하던오경훈은1974년《제주문학》에첫소설〈우도〉를발표하면서작가로서의길을모색하였다.이후1976년〈표류〉가《현대문학》에초회추천되었지만추천작가인오영수의타계(1979)로등단이지연되고있었다.그런가운데《경작지대》동인으로창작을계속하다가마침내1987년〈사혼〉을《현대문학》에발표(하근찬추천)하면서추천완료되었다.
오경훈은첫작품집《유배지》를1993년에펴냈는데,여기에는〈세월은가고〉,〈사혼〉,〈당신의작은촛불〉등9편의중단편이수록되어있다.이어서1997년에는《날개의꿈》이라는장편소설을전작(全作)으로출간하였다(4·3을다룬이장편은2001년에내용을고치고제목을바꾸어《침묵의세월》로재출간됨).2005년에는〈비극의여객선〉,〈가신님〉,〈빌린누이〉등의‘제주항’연작(連作)9편을묶어《제주항》을펴냈고,2024년에는여기에〈진상가는배〉,〈탑동광장〉,〈항구다방〉을보태어총12편연작의《증보판제주항》으로완간하였다.
《유배지》
(1993)
〈유배지〉(86),〈세월은가고〉(89),〈사혼(死婚)〉(87),〈당신의작은촛불〉(88),〈역사만들기〉(87),〈호랑가시나무추억〉(92),〈우도〉(74),〈나래지친새〉(84),〈그래도한세상〉(81)*9편
《제주항(증보판)》
(2024)
연작소설〈객사(客舍)〉(02),〈진상가는배〉(06),〈모변(謀變)〉(02),〈비극의여객선〉(03),〈유한(遺恨)〉(05),〈가신님〉(01),〈빌린누이〉(03),〈어선부두〉(05),〈기념탑〉(04),〈동거〉(03),〈탑동광장〉(05),〈항구다방〉(06)*12편
《가깝고도먼곳》
(2025)
〈가깝고도먼곳〉(20),〈열쭝이사설〉(21),〈사교〉(22),〈실향〉(23),〈마을제〉(12),〈악마는숨어서웃는다〉(10),〈강정길나그네〉(16)*7편
《침묵의세월》
(2001)
장편소설《침묵의세월》(*《날개의꿈》(97)을개작ㆍ개제)*1편
작품집에수록되지않은단편
〈표류〉(76),〈밀항의하늘〉(84),〈바람부는땅〉(84),〈작은섬〉(87),〈은폐〉(99),〈바람속에서〉(99),〈깡통〉(07)*7편
이번에펴내는작품집《가깝고도먼곳》에는표제작인〈가깝고도먼곳〉을비롯해서〈열쭝이사설〉,〈사교(邪敎)〉,〈실향〉,〈마을제[酺祭]〉,〈악마는숨어서웃는다〉등단편6편과중편〈강정(江汀)길나그네〉(원제:〈맹꽁아너는왜울어〉)등총7편이수록되었다.그렇다고오경훈이그동안발표한소설들이모두이들작품집에수록된것은아니다.〈표류〉,〈밀항의하늘〉,〈바람부는땅〉,〈작은섬〉,〈은폐〉,〈바람속에서〉,〈깡통〉등7편은어떤작품집에도묶이지않은소설이다(김소영,〈오경훈연작소설〈제주항〉연구〉참조).따라서작품집에수록되지않은것들까지합했을때오경훈이남긴소설은[표]에서보는바와같이중단편35편,장편1편인셈이다.
2.제주현대사와현안에대한웅숭깊은현실인식
오경훈은부산공고에잠시재학했던1년과육군현역병으로근무한3년을제외하고는평생제주도에서만살았다.그랬기에그가“전작을쓰는동안나는번번이눈시울을적시고영탄하고고개를젓지않을수없었다.마음이약해서가아니다.비애와분노,미련,애상이송두리째내것이었으며나는제주인이기때문이다.”(《제주항》증보판작가의말)라고고백했음은충분히수긍할만하다.그만큼오경훈은제주토박이작가로서시종일관지역민의정서를바탕으로섬의역사와현실에천착하였다.이번작품집에서도제주의현대사와당면문제에관련된웅숭깊은현실인식은여전하다.
〈마을제〉의공간적배경은‘K읍S리’로설정되어있는데,웬만한독자라면이곳이구좌읍세화리임을단박에알수있다.바로다랑쉬굴사건을다루고있기때문인데,주지하다시피이는1948년12월행방불명되었던주민11명의유골이굴속에가지런히놓여있음이1992년봄에알려지면서4·3의참상을다시금널리인식시킨사건이다.다랑쉬굴의소재지인세화리는바로오경훈의고향마을인바,오래전부터4·3을탐색해온작가로서다랑쉬굴발굴20주년인2012년에마을주민의눈으로이사건을되짚었다.
다랑쉬굴유골발굴을계기로마을일각에서는“역사는이미그들의봉기를숭고한항쟁으로기정사실화하고”있으므로“그동안폐지되었던마을제를부활하여그들의죽음을자연스럽게애도하고추모하는의례를행하는게좋”(129쪽)겠다는의견이제기된다.반면에“큰일을위해서라면나약한사람들을얼마든지죽이고재산을소진해도좋단말인가.(…)저쪽사람들은다망해가는과정에서항쟁과는거리가먼만행을저질렀다.”(132쪽)면서산부대(무장대)의잘못에대해서도짚어낸다.굴속유골들은산부대의일원으로마을을습격했던이들일진대어떻게숭고한뜻만기리느냐는지적이다.
일곱살에참화를겪었던석주와한세는“이쪽이당한참화엔눈을감으면서왜굴속의뼈조각에대해선귀물이라도발견한듯호들갑을떠는가”(123쪽)하는의문을갖지않을수없었다.“한세아버지는뒤뜰에서산사람들과마주쳤는지옆구리에창을맞고울타리밖으로떨어져무너진돌담아래깔려있었”고“석주네아버지는처마아래쓰러져죽었는지불타는처마도리와서까래에덮여시신이숯덩이가되어있었”(128쪽)던처절한기억이선명하기때문이다.석주와한세는군인들의만행도목격하였다.이웃마을과경계인연대동산에서집단총살장면을숨어서본것이다.군인들은주민들에게구덩이를파게했다.
“살려주세요.제발,목숨만살려주세요….”/누더기짜리들은무릎을꿇고곱작대며두손을머리위로올려파리발을드렸으나군바리들은개잖게쏘아볼뿐이었다./허리에찼던권총을뽑아든전투모의사나이가총부리로구덩이쪽을가리키며꼬붕군바리들에게구령했다./“일렬횡대로!거총!”/(…)노리쇠를튕겨장전하는소리,때깍하고소총의안전장치를푸는소리,그뒤로울부짖는소리가들릴때한세와석주는뒤꽁무니를뺐다.그들은엎드러지고미끄러지면서모래산을뛰어내려갔다.연발하는총소리를들으며쫓기는짐승처럼혼쭐빠지게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