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뮤지컬 <명성황후> 탄생부터 30주년 기념공연까지 | 양장본 Hardcover)

명성황후 (뮤지컬 <명성황후> 탄생부터 30주년 기념공연까지 | 양장본 Hardcover)

$35.00
Description
한국 뮤지컬의 살아 있는 역사 〈명성황후〉
지속 가능한 ‘마스터피스’를 만들기 위한 30년간의 여정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 그것은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다.
‘의지’다. ‘열정’이다. ‘꿈’이다!
한국 창작 뮤지컬의 선구자 윤호진 예술감독이 〈명성황후〉 30주년 기념공연을 맞아 지난 30년간의 열정과 도전을 담은 자전 에세이 『명성황후』(부제 : 뮤지컬 〈명성황후〉 탄생부터 30주년 기념공연까지)를 내놓았다. 뮤지컬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서 숱한 우여곡절을 딛고 1995년 무대에 첫선을 보인 뒤 아시아 최초로 브로드웨이 진출, 영국 웨스트엔드 무대 입성, 200만 관객 돌파 등 수많은 기록을 갈아치우며 한국 뮤지컬의 살아 있는 역사가 된 〈명성황후〉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윤호진 감독이 뮤지컬에 매료된 것은 1982년 영국 연수 중 웨스트엔드에서 당시 초연 중인 〈캣츠〉를 보고 나서였다. 줄거리만 보자면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음에도 그는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빠졌다. 스펙터클하면서도 아름다운 무대, 생생한 분장과 디테일한 안무, 감미로우면서도 다양한 음악…. 그때까지 유신에 반대하던 사회성 짙고 진지한 연극만 하던 그에게는 한마디로 문화적 쇼크였다. 윤 감독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우리도 준비하지 않으면 손 한번 쓰지 못하고 우리 시장을 고스란히 내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방어 의식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 이 뮤지컬이 꽉 막힌 우리 공연문화에 어쩌면 새로운 돌파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운명처럼 만난 뮤지컬에 매료돼 1984년 한 학기 등록금만 간신히 마련해서 뉴욕대학교 대학원 공연학과에 입학해 악착같이 일하고 공부해 4년 만에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대학 강의실과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이론과 실전을 두루 섭렵한 그는 그동안 품고 배웠던 뜻을 펼치겠다는 포부를 안고 뉴욕 공항을 떠나며 속으로 다짐했다. ‘기다려라, 브로드웨이. 내가 딱 10년 안에 내 작품을 들고 다시 돌아온다!’

귀국 후 윤심덕과 김우진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그린 세미 뮤지컬 〈사의 찬미〉로 뮤지컬의 가능성을 엿본 그는 1991년 극단 에이콤을 설립한 데 이어 1993년에는 국내 최초의 뮤지컬 전문 회사 에이콤인터내셔널을 만들고 본격적인 뮤지컬 제작에 들어갔다. 1994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올린 〈아가씨와 건달들〉이 창립 작품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빚을 내서 시작한 공연이었는데 정산해 보니 5억이 남았을 정도로 대박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는 연장 공연 없이 한 차례 지방 공연 후 모든 세트를 불살라 버렸다. 당시 머릿속에 기획 중인 〈명성황후〉로 가득 차 있던 때라서 행여 미련이 남을까 부린 객기였다.

그리고 5년간의 준비 끝에 1995년 12월 30일 뮤지컬 〈명성황후〉를 무대에 올렸다. 명성황후 시해 100주기가 되는 1995년 10월 8일에 맞춰 올리려고 했지만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 윤 감독은 “고백하건대, 처음부터 〈명성황후〉가 30년을 롱런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무대에만 올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고 말한다. 기획부터 대본 작업, 캐스팅, 음악, 의상, 무대장치 등에 이르기까지 제작 과정이 그만큼 지난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역은 배우 윤석화가, 고종 역은 홍경인이 맡아 열연한 〈명성황후〉 첫 공연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막이 내리자 모두 기립해서 한참 동안 열화와 같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당시 연극평론가 유민영은 “구한말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비극적 죽음을 당한 민비를 오늘의 시각에서 재구성하고 그것을 다시 빼어나게 예술화함으로써 관중을 숙연케” 한다며 “종래의 진부한 서양풍 뮤지컬과는 달리 관중에게 색다른 맛과 감동을 안겨 줄 것”이라고 호평했다. 언론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러분, 돈 받고 독립운동 했다는 얘기 들어 봤습니까?”

그리고 마침내 1998년 브로드웨이에 진출하는 꿈을 이루었다. 한국 최초, 아시아 최초의 뮤지컬 공연이었다. 10년 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매스컴은 〈명성황후〉의 브로드웨이 진출을 대서특필했지만 후원을 하겠다는 기업이 하나도 없어 고난의 행군 끝에 이뤄낸 성과였다. 배우들을 캐스팅해 놓고도 돈이 없어 계약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할 수 없이 그는 배우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돈 받고 독립운동 했다는 얘기 들어 봤습니까?”

게다가 공연 전날까지도 돌발상황이 속출해 진땀을 흘려야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딛고 〈명성황후〉는 2586석의 링컨센터 뉴욕주립극장이 연일 매진 사례를 기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 것을 소재로 하면서도 역사와 환경이 다른 사람에게도 공감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던 윤 감독의 뚝심이 결실을 본 순간이었다. 《뉴욕타임스》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황금 같은 조명과 기발한 무대 세트, 화려한 의상으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며 극찬했다.

그 뒤로도 1998년 두 번째 뉴욕 공연과 LA 공연, 2002년 영국 공연, 2003년 LA 공연, 2004년 캐나다 토론토 공연을 하며 한국 창작 뮤지컬의 위상을 높여 갔다. 물론 그사이 힘든 일도 많았다. IMF로 뉴욕 두 번째 공연이 처참한 흥행 실패로 20억 적자를 봤을 때는 호텔에서 뛰어내리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참담했다. 그러나 비극적인 뉴욕 공연을 끝내고 돌아와 올린 예술의전당에서의 공연에 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면서 20억의 빚을 갚고 흑자를 냈다. 믿기지 않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명성황후〉의 항해는 그 뒤로도 계속돼 10주년 공연, 20주년 공연, 25주년 공연에 이어 이제 30주년 기념공연을 하기에 이르렀다. 200만 관객 돌파, 2000회 공연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2009년에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그린 뮤지컬 〈영웅〉을 세상에 내놓았다. 윤 감독은 이제 항일 역사 뮤지컬 연작 세 번째 작품으로 이순신 장군과 그 시대 민중들의 삶을 그린 〈칼의 노래〉를 기획하고 있다.

꿈이 많은 윤 감독은 지금도 다면기를 두는 바둑기사처럼 몇 개의 작품을 머릿속에 넣고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다. 그는 “나는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연극을 만들 때부터 뮤지컬을 만드는 지금까지 남들이 모두 안 된다는 길만 걸어왔다. (…) 뮤지컬 불모지인 이 땅에서 대형 창작 뮤지컬을 만들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라고 손가락질했고 외면했다. 그런데 그 뮤지컬 〈명성황후〉가 30년을 롱런하고 본고장인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서 호평을 받았다. 남들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현실로 이뤄 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 그것은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다. ‘의지’다. ‘열정’이다. ‘꿈’이다.”라며 “지금 꿈이 없는 이는 꿈을 꾸고, 또 꿈을 꾸고 있는 이는 더 큰 꿈을 꾸라”고 말한다. 그러면 “머잖아 세상이 여러분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공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뮤지컬 〈명성황후〉 30년’ 총정리

이 책은 윤호진 감독의 자전적 에세이와 함께 뮤지컬 〈명성황후〉 30년을 총정리한 글도 실려 있다. 부록은 세 사람의 필자가 썼는데, 뮤지컬 〈명성황후〉의 탄생부터 20주년 기념공연까지를 다룬 1장부터 6장까지는 〈명성황후〉 공연사와 해외 공연 동향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윤정 홍익대 교수가 썼고, 그 후부터 30주년 기념공연까지 지속 가능한 마스터피스를 만들기 위한 10년간의 여정을 정리한 7장부터 9장까지는 〈명성황후〉 연출가 안재승이 썼다. 마지막으로 스펙터클한 무대로 찬사를 받는 〈명성황후〉 무대미술 30년사를 정리한 10장은 무대디자이너 박동우가 썼다. 뮤지컬 〈명성황후〉의 탄생부터 현재까지의 발전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어 작품에 대한 이해를 한층 높여 줄 것으로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역대 포스터와 공연 연표, 수상 내역, 역대 명성황후, 30주년 기념공연 배우와 스태프까지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다. 공연예술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 보길 권한다.
저자

윤호진

충남당진에서태어났다.고등학교때처음접한연극에매료돼대학3학년때실험극장연습생으로연극계에발을들여놓았고,동국대대학원연극영화과에도진학했다.1976년〈그린줄리아〉를통해연출가로선을보이고,이듬해남아공의인종차별과인권문제를다룬〈아일랜드〉로이름을알렸다.이작품으로동아연극상연출상을받았으며,해외연수기회도얻었다.유학을떠나기전에만든연극〈신의아그네스〉는국내최장기공연에최다관객기록을갈아치우며크게히트했다.영국연수중뮤지컬〈캣츠〉를보고충격을받아1984년뉴욕대학교대학원공연학과에입학해뮤지컬을공부했다.
4년간의유학을마치고한국으로돌아와1991년극단‘에이콤’을만든데이어1993년국내최초의뮤지컬전문회사‘에이콤인터내셔널’을설립하고본격적으로뮤지컬제작과연출에들어갔다.〈사의찬미〉와〈아가씨와건달들〉로뮤지컬의가능성을확인한후,한국창작뮤지컬〈명성황후〉를명성황후시해100주년이되는1995년12월무대에올렸다.〈명성황후〉는1997년아시아최초로브로드웨이에진출한것을시작으로1998년두번째뉴욕공연과LA공연,2002년영국런던공연,2003년LA공연,2004년캐나다토론토공연등코로나19이전까지단한해도빠지지않고국내외공연을한것은물론,2015년20주년기념공연,2021년25주년기념공연,2025년30주년기념공연을하기에이르렀다.2009년안중근의사의의거를그린뮤지컬〈영웅〉역시지난해15주년기념공연을성황리에마쳤다.
이밖에도연극〈사람의아들〉(1980),〈들소〉(1981),〈마지막잔을위하여〉(1989),〈실비명〉(1989),〈안토니와클레오파트라〉(1991),〈두교황〉(2012),뮤지컬〈겨울나그네〉(1997),〈FAME〉(1999),〈둘리〉(2001),〈몽유도원도〉(2002),〈라롱드〉(2006),〈러브〉(2008),〈완득이〉(2012),〈보이첵〉(2014)등을무대에올렸다.
한국뮤지컬협회초대회장,극단실험극장대표,한국연극연출가협회회장,단국대공연영화학부교수,홍익대공연예술대학원대학원장을지냈으며,현재㈜에이콤예술감독으로활동하고있다.

목차

프롤로그기억은기록을이기지못한다


1새로운세상을만나다

연극에흠뻑빠지다
내인생을다시바꾼〈캣츠〉
웨스트엔드찍고브로드웨이로~
브로드웨이돌며공연관람
10만관객돌파한〈신의아그네스〉
늦깎이유학생활
‘기다려라,브로드웨이.10년안에내작품들고다시돌아온다!’


2내인생을바꾼명성황후

뮤지컬의가능성보여준〈사의찬미〉와〈아가씨와건달들〉
뮤지컬〈명성황후〉의닻을올리다
이문열의〈여우사냥〉
풍부한색상과장중한질감의의상들
오늘의〈명성황후〉를있게한일등공신들
스펙터클한무대〈명성황후〉
매일매일이전쟁
〈명성황후〉첫공연폭발적반응


3브로드웨이찍고웨스트엔드로!

‘감정에동서양이따로있나’
“여러분,돈받고독립운동했다는얘기들어봤습니까?”
명성황후역에이태원·김원정더블캐스팅
돌발상황의연속이었던뉴욕공연전날
브로드웨이뉴욕주립극장연일매진사례
《뉴욕타임스》의극찬
뉴욕두번째공연,IMF위기로20억적자
〈명성황후〉브로드웨이진출과성과
영어버전〈명성황후〉들고런던무대입성
LA,토론토,구마모토공연


4〈명성황후〉의항해는아직끝나지않았다

〈명성황후〉20주년공연
뮤지컬〈영웅〉의탄생
〈영웅〉탄생15년
내탓이오,내큰탓이로다
〈명성황후〉25주년공연장덮친코로나사태
서른살맞은뮤지컬〈명성황후〉


에필로그〈명성황후〉그이후



부록뮤지컬〈명성황후〉30년

1.뮤지컬〈명성황후〉의탄생
2.한국뮤지컬최초로브로드웨이진출
3.2002년영국무대입성
4.다시떠난북미투어
5.명성황후의숨결을찾아서
6.〈명성황후〉20주년기념공연
7.2018년공연
8.〈명성황후〉25주년기념공연
9.〈명성황후〉30주년기념공연
10.〈명성황후〉무대미술30년사



역대포스터
뮤지컬〈명성황후〉공연연표
뮤지컬〈명성황후〉수상내역
역대명성황후
뮤지컬〈명성황후〉30주년기념공연배우와스태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