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시 없이도 잘 사시면 시인이십니다
이 책은 지은이의 여전한 시와 여전한 산문을 인쇄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은이의 지루하고 이기적인 글의 대표성을 편집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울 것은 없다는 것. 상투적이고 반복적이고 작위적인 내용이 책의 중심을 이룬다. 지은이는 새롭다는 착각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썼던 시 쓰던 문체로 변함없이 다시 쓴다. 이 책 ≪그분, 아직 살아 있나요?≫는 앞의 책 ≪당신이 읽어도 상관없는 시≫를 다시 썼고, ≪당신이 읽어도 상관없는 시≫는 직전의 책 ≪하루의 기분과 명랑을 위해≫를 다시 썼으며, 같은 방식으로 ≪하루의 기분과 명랑을 위해≫는 그 앞의 책 ≪날씨와 건강≫을, ≪날씨와 건강≫은 바로 앞책 ≪시를 소진시키려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시도≫를 다시 쓰고, ≪시를 소진시키려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시도≫는 또 그 앞전의 책 ≪썸≫을 정확하게 다시 썼다. 지은이는 이런 방식으로 직전의 텍스트를 베껴왔다. 지은이의 이 필기 방식은 한글 타이핑 방식의 반복이자 반복의 반복이 된다. 지은이의 책을 소개하자면 또는 그의 책세계를 개관하자면 지은이의 첫 책 ≪꿈꾸지 않는 자의 행복≫까지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지은이의 반복술을 이해한다면 그의 첫책이 아니라 마지막 책을 읽는 것으로도 부족하지 않다. 이와 같은 저술 방식을 지은이는 자신만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살펴보자면 그것이 그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대개의 지은이들이 이와 같은 반복적 자기 변조로 저술작업을 이어가는 것은 아닌가, 라고 지은이는 되묻지만 질문은 빠른 속도로 그의 품으로 환원된다. 지은이의 산문집도 같은 방식으로 필사된다. ≪그분, 아직 살아 있나요?≫ 직전에 인쇄한 책은 창작 일기 ≪생각과 망각 사이≫다. 이 책 역시나 지은이의 다른 책의 저술 방식을 고스란히 따른다. 자기 표절과 지치지 않는 동어반복이 그것이다. 일기를 가장한 ≪생각과 망각 사이≫는 문학 에세이 ≪봉평 세미나≫와 다르지 않고, ≪봉평 세미나≫는 ≪시보다 멀리≫와 다르지 않고, ≪시보다 멀리≫는 또 앞의 책 ≪필멸하는 인간의 덧없는 방식으로≫와 전혀 다르지 않다. 이런 계보를 추적하면 역시 산문으로 된 첫 책 ≪설렘≫을 만나게 된다. 지은이가 저술한 세 권의 소설도 같은 맥락에서 이탈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소설 ≪여담≫은 소설 ≪쓸모없는 인간≫을 다시 쓴 것이고, ≪쓸모없는 인간≫은 소설 ≪페루에 가실래요?≫를 키보드를 바꾸어 다시 써 본 것이다. 지은이는 왜 이렇게 반복하는가. 지루하고 따분하지 않는가. 지은이는 필자의 위치에서 정확하게 대답한다. 자신의 꿈은 반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복을 그치는 것이라면서 글쓰기의 반복을 그치는 것에 실패하기 때문에 다시 쓴다고 말한다. 책에 들어갈 글을 쓸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이기를 희망하지만 그때마다 실패한다. 필자로서 혹은 지은이로서 유일한 꿈이 이것이며 이 책 또한 이처럼 정확하게 실패한 꿈의 결론이다. 이번에 인쇄하는 책 ≪그분, 아직 살아 있나요?≫에 대한 책소개도 이 이상을 넘어설 수 없는 지점에 있다. 덧붙여 지은이는 말한다. 자신의 책 또는 이런 따분한 책소개를 일부러 찾아서 읽을 수 있는 자신의 순수 독자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잘라서 말한다. 그가 말하는 순수 독자는 이를테면 자신을 만나려고 네비게이션에도 없는 자신의 집을 찾아 대문을 두드리고 현관을 넘어오는 독자를 가리킨다. 정보 차원에서 자신의 책소개를 열람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책이란 꽃무릇, 그런 차원에 자신의 알몸을 열고 싶어하지 않는다. 지은이의 처지에서는 이번 책도 대여섯 권 팔리면 대박에 준하는 ‘세상에 이런 일’이 된다. 거기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못박는다. 미스 터치에 브라보를 외치며 기립박수를 보내는 청중은 어디에나 있다. 지은이의 책이 대여섯 권 팔리는 일은 그가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일 만큼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지은이는 자신의 언어적 분비물을 세상에 던진다. 쓸데없이 공허하고 어지럽고 난망한 지은이의 책상 위가 그의 세상이다. 그의 꿈은 책을 더 이상 인쇄하지 않는 일인데 여전히 희망은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다. 지은이는 책을 인쇄할 때마다 모호한 슬픔을 겪는다. 자신의 언어적 분비물에 가격을 매겨서 시장에 내놓는 슬픈 작위성이 그것이다. 능청스런 노릇인 줄 잘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것은 시라는 지저분한 운명 때문이다. 시는 책이라는 종이의 물성 속에서만 깜빡인다는 사실을 신앙하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순수 독자가 있다면 ≪그분, 아직 살아 있나요?≫라는 발언으로 오픈되는 인터넷의 책소개를 읽는 것으로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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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 아직 살아 있나요? (박세현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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