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백에 술을 숨긴 적이 있다 - 시의적절 10

핸드백에 술을 숨긴 적이 있다 - 시의적절 10

$15.00
Description
난다의 시의적절, 그 열번째 이야기!
시인 임유영이 매일매일 그러모은
10월의, 10월에 의한, 10월을 위한
단 한 권의 읽을거리
첫 시집 『오믈렛』(문학동네, 2023)을 통해 “감각적인 예지력”(김행숙)으로 빚은 “고유한 음악”(박연준)을 선보이며 한국시의 새 이름으로 떠오른 임유영 시인이 ‘시의적절’ 그 열번째 주자로 등판했다. 책을 펼치자니 10월을 닮은 냄새, 그러니까 10월을 맞은 우리 마음에서 불어오는 냄새를 언뜻 느낀 듯도 하다. 시의 안팎을 두루 거니는 ‘시의적절’의 일편답게 시와 에세이는 물론 관람 후기와 메모 등을 경유하며 사진, 회화, 음악, 영화까지 예술 전반을 ‘유영’하는 이야기라 말해볼 수 있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론, 삶에 예술을 푹 담글 때 거기서 무르익는 것이 ‘시’임을, 그리하여 삶이란 어떤 취기임을 알게 하는 글이기도 하다.

다음 시집에선 보이지 않는 것들, 안 보이면서도 확실히 거기에 있는 것들에 대해 집중하고 싶다. 냄새, 기운, 공기, 느낌 같은 비물질적인 것들. 만약 이 책에서 술냄새가 난다면…… 그것은 당신의 마음에서 나는 냄새다. 10월의 냄새다.
─본문 중에서

시와 시 아닌 것 사이에 깨어야 할 벽도 차려야 할 법도 없음을 이미 알고 있는 그이니, ‘시의적절’의 취지에 애초 맞춤할 수밖에 없는 시인일 것이다. 산문인가 하고 읽다보면 이것이 시이고, 시로구나 끄덕이다보면 그것이 에세이가 되는 분방함이 있다. 하긴 ‘술을 숨긴 적’은 있어도 그 숨김을 고백하는 단에서야 이미 더없이 솔직한 쓰기다. 10월 추수 지나 남은 곡식은 술을 담그는 데 쓴다 하니, 시인의 신명이 그리고 결행이 어디서 오는지 짐작하기에도 적절한 달 10월이었을 테다.

시와 글과 거기에 머리 맞댄 예술들, 시인의 넓고도 유연한 애정이 어디서 왔을까, 그 일상과 단상들 통해 엿보게도 된다. 특히나 시인의 삶 또한 결국 사람의 속이고 사람의 사이구나 한다. 책 속에서 친구들 이름 하나하나 부르며 일상을 매김할 때, 그것이 꼭 달력 속 날들 하루하루 꼽는 일 같다. 그것이 임유영이 말하는 매일의 사랑이고 매일의 쓰기일 것이다. 어김없이 취하고, 숨김없이 쓰고, 남김없이 나누는 사랑이 여기 있다. 얼큰하고도 덜큰한 10월의 냄새가 있다.

내 마당이 보이는 책상에 앉아서 쓰겠지. 그땐 정말 앞이 깜깜했고, 참 힘들게 살았었다고, 젊은 나를 가엾게 여기고. 잔인한 운명과 고난을 증언하고. 하지만 빈 주머니에 주먹만 두 개 넣고 다니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그리 다르지도 않다고. 사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노라고. 나이가 들어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여전히 많다고 겸손을 담아 진심으로 쓰겠지. 가벼운 수치심 같은 건 잘 이겨내겠지. 아름다운 마당에 속수무책으로 자라는 식물의 색과 모양이 계절마다 바뀌는 걸 관찰하면서, 잡은 벌레를 놓아주겠지. 그리고 말할 거야. 내가 예전부터 이런 걸 참 좋아했다고.
─본문 중에서
저자

임유영

저자:임유영
1986년경남진주에서태어났다.한국예술종합학교미술이론과를졸업했다.2020년문학동네신인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으로『오믈렛』이있다.

목차

작가의말마시기좋은계절7

10월1일시예언13
10월2일에세이파리의공기50cc17
10월3일에세이내영혼은오래되었으나23
10월4일시그빛31
10월5일에세이빌고싶은마음35
10월6일낭독용시성물45
10월7일에세이바텐더49
10월8일연작시우울한여자57
10월9일연작시슬픈여자61
10월10일연작시행복한여자65
10월11일에세이과거로부터69
10월12일시악령시장77
10월13일시까마귀는발이세개81
10월14일관람후기휴먼스케일85
10월15일시사향93
10월16일메모익명의중독자들97
10월17일에세이만신전103
10월18일시전라감영109
10월19일시실제로일어나는일113
10월20일에세이누가빨강,노랑,파랑을두려워하랴?117
10월21일시연해주125
10월22일에세이섬광129
10월23일시한국의재배식물135
10월24일에세이보일듯이보일듯이보이지않는137
10월25일시아스파라거스가있는정물145
10월26일시가드닝149
10월27일에세이쉬운소나타153
10월28일시행성159
10월29일에세이물한사발163
10월30일시회고와전망169
10월31일에세이작고성가시고끈질기게173

출판사 서평

‘시의적절’시리즈를소개합니다.

시詩의적절함으로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제철음식대신제철책한권

난다에서새로운시리즈를선보입니다.열두명의시인이릴레이로써나가는열두권의책.매일한편,매달한권,1년365가지의이야기.이름하여‘시의적절’입니다.시인에게여름은어떤뜨거움이고겨울은어떤기꺼움일까요.시인은1월1일을어찌다루고시의12월31일은어떻게다를까요.하루도빠짐없이,맞춤하여틀림없이,매일매일을시로써가는시인들의일상을엿봅니다.

시인들에게저마다꼭이고딱인‘달’을하나씩맡아자유로이시안팎을놀아달라부탁했습니다.하루에한편의글,그러해서달마다서른편이거나서른한편의글이쓰였습니다.(달력이그러해서,딱한달스물아홉편의글있기는합니다.)무엇보다물론,새로쓴시를책의기둥삼았습니다.더불어시가된생각,시로만난하루,시를향한연서와시와의악전고투로곁을둘렀습니다.요컨대시집이면서산문집이기도합니다.아무려나분명한것하나,시인에게시없는하루는없더라는거지요.

한편한편당연길지않은분량이니1일부터31일까지,하루에한편씩가벼이읽으면딱이겠다합니다.열두달따라읽으면매일의시가책장가득하겠습니다.한해가시로빼곡하겠습니다.일력을뜯듯다이어리를넘기듯하루씩읽어흐르다보면우리의시계가우리의사계(四季)가되어있을테지요.그러니언제읽어도좋은책,따라읽으면더좋을책!

제철음식만있나,제철책도있지,그런마음으로시작한기획입니다.그이름들보노라면달과시인의궁합참으로적절하다,때(時)와시(詩)의만남참말로적절하다,고개끄덕이시라믿습니다.1월1일의일기가,5월5일의시가,12월25일의메모가아침이면문두드리고밤이면머리맡지킬예정입니다.그리보면이글들다한통의편지아니려나합니다.매일매일시가보낸편지한통,내용은분명사랑일테지요.

책속에서

몰라서못본미욱한빛이내안에도참많았는데.지금은붙잡고싶어도다떠나고없다.언제다시온다는기약도없고죽었는지살았는지도모르겠다.시커먼어둠속에손을욱여넣으면축축하고물렁거리는것만잡힐뿐이다.나는이것을가지고평생살아야한다.

정말몰랐다고할수는없다.새까맣게몰랐다면그것들이있다가없이된건어찌알았을까.

저기봐라.먼하늘에내얼굴하나날아간다.
_10월1일「예언」,15~16쪽

그는아주사소하고사악한거짓말로아무도모르게누군가를집요하고고통스럽게괴롭힐수있었다.어쩌면그것때문에죽은사람이있었을지도모르는데그는전혀신경쓰지않는다.그러니사실상그들의고통에대해서는누구도신경쓰지않는것이다.

그는멈추지않는다.멈출수가없다.

그의본성이이토록악하다는사실은오직신만이이해하시리라.이악취나는영혼은지옥에서영원히불타리라.

“기쁨.”

그에게기쁨을주고싶지않다.

그래서더사랑한다.
미칠듯사랑한다.
_10월4일「그빛」,33~34쪽

기억하고싶지않아서오래오래지운다.첫시집에실린시「미래로부터」는2020년봄에초고를썼다.그때도나는나로부터가장먼곳에있는것들에대해서만쓰고싶었다.내내혼자말하고혼자듣던,저주처럼염불처럼줄줄외는고백같은건다시하기싫다.그런데쓰다보면가족들이자꾸시에나온다.난아직준비가안됐는데자꾸만튀어나온다.죽은사람마저곧잘되살아나나를망치려고온다.고요하고한적한성의풍경.지우려고애쓰면분명떠오르는것들.매일책상앞에서다짐한다.시에서가족을빼자.집을빼자.몸을빼자.고통과슬픔을빼자.아직도피흘리고있는사건들을빼고쓰자.키우던개와고양이를빼자.유년기를빼자.소년기도빼자.구체적인날짜,지명과,헛것들도빼자.귀신,유령,천사,신,무당,모두빼고,산사람과죽은사람을빼고,그래,계절과날씨도빼자.전부다빼고쓰자.물론잘되지않는다.보다시피.항상내가쓴글이읽자마자사라지는것이었으면하고바란다.과거의모든사실과기억도꿈결처럼바람처럼가벼이흩어져사라지면좋겠다.그러나그것들은오래전지어진성벽처럼언제나있다.
_10월11일「과거로부터」,74~75쪽

나도그렇게생각한다.사람은무언가에중독되었거나중독되지않았거나,둘중한쪽밖에고를수없다.한번중독되면멈출수없으며멈출수있다면중독이아니다.하지만나는조절할수있다고믿는다.오늘은컨디션이별로라일찍떠난다는말을남기고자정전에집에들어가는사람이될수있다고믿는다.희망이구나,희망.중독은희망이구나.
_10월12일「익명의중독자들」,100쪽

한동안여성시인들의첫시집을찾아읽었다.그들의최근대표작대신,꼭처음,첫시집이어야만했다.그책들을읽으면아무것도쓰고싶지않았고,쓸수없었고,이따금무엇이든지쓰고싶어졌다.중간이없었다.그들처럼나를바닥까지가라앉히고끝까지밀어붙이고싶지만.나는이제야,뻔뻔하게도,그러나어설픈포즈조차도제대로취하지못하고있다는생각.내가어디서무얼하고있는지는아직깜깜하지만,그래도가고싶은곳이있다.
_10월29일「물한사발」,167쪽